소천악 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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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99화
"염려 마라. 국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노라. 자식의 목숨을 두고 장난치는 부모는 없느니라."
이야기가 술술 풀리자 소천악은 사전에 준비한 대로 말을 꺼냈다.
"일단 왕자님과 용모가 비슷한 아이를 구하십시오. 아직 중원에 왕자에 대해 자세한 용모파기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아니, 그럼 바꿔치기를?"
희색이 만면한 아타수 국왕이다.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배 곯고 자란 아이로 구하시지요. 아무래도 먹성이 좋아야 오래 살고 그래야 다시 볼모를 바꾸는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아, 그렇지."
"그 후 왕자를 몰래 감추고 분노한 척 사방에 소문을 뿌려대기만 하시면 됩니다. 잘하면 오히려 황제의 목덜미를 잡아챌 구실도 될 겁니다."
"허허, 무인인 줄만 알았더니 지략도 제법일세."
새삼 감탄한 듯 아타수 국왕이 칭찬하자 머리를 긁적이던 소천악이 말했다.
"다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만들어낸 묘안일 뿐입니다. 아무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말씀하신 걸 마차에 실어 동쪽으로 오십여 리 밖에 가져다주십시오. 확인하자마자 바로 왕자님을 온 사람 편에 몰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음, 좋다. 일단 믿어보마. 만약 거짓일 시는 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너를 죽이고야 말겠노라."
"염려 마십시오. 그런 생각이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만 물러가고 왕자님은 예정대로 된다면 내일 오전 중에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소천악이 번쩍하는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언가 어리하더니 사라진 소천악을 보며 새삼 놀란 아타수 국왕이 중얼거렸다.
"놀라운 무공을 지닌 무인이로고. 부디 잘 돼야 할 텐데."
소천악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불안 반 안도 반의 복잡함이 풍겨나왔다.
날이 밝자 소천악은 약속된 장소에 은신해 있었다. 옆에는 종천리 막주가 수혈이 짚여 잠든 왕자를 안고 안광을 빛냈다.
"대주님! 오긴 올까요?"
"오겠지요. 누구처럼 자식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이야 하겠소이까?"
왠지 가시가 낀 말투에 뭔가를 짐작한 종천리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이럴 때 침묵이 최고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 저기 마차들이 보입니다."
낮게 탄성을 발하는 종천리의 말에 고개를 돌린 소천악의 눈에도 다가서는 마차 수십여 대가 보였다.
"종 막주님! 지금 온 대인에게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십시오. 전 왕자를 전해줘야겠습니다."
"그러지요. 몸조심하십시오."
종천리가 슬쩍 몸을 날려 사라진 후 마차가 약속된 지점에 모여 서 있자 왕자를 안은 소천악의 신형이 번뜩였다.
약속대로 아타수 국왕은 마차를 놓고 마부와 병사들을 일 리 밖으로 보냈다. 그 중에 지휘자가 있는 마차를 이내 찾아낸 소천악은 나무 그늘을 타고 살며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미 얼굴에는 검은 복면을 한 상태였다.
"누구냐?"
놀라 경호성을 지르는 이는 목여의 중신인 미가루였다.
"조용히 하시오. 여기 왕자가 있으니 어서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 아타수 국왕에게 약속을 지켜줘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음."
말없이 탄성만 내지르는 미가루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닮은 애는 어디 있소?"
"여기 있다."
퉁명스럽게 말하며 한쪽으로 움직이는 미가루였다. 그가 마차 안에 가려진 천을 들추자 왕자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지닌 소년이 누워 있었다. 만족한 미소를 지은 소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구려. 알겠소이다."
"그리고 이건 국왕께서 주시라는 겁니다. 미리 언질을 주신 물건이라면 알 거라 했소이다."
칠보로 장식된 고급스런 상자를 내밀자 소천악은 망설임 없이 받았다. 미가루는 아타수 국왕에게 당부를 안 받았으면 벌써 소리쳐 병사들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감히 왕명을 거역할 만큼 간담이 큰 미가루가 아니다.
잠깐 왕자의 몸에 이상이 없나 살펴보던 그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자 이미 소천악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앞에서 없어진 그의 가공할 능력에 등에 식은땀이 난 미가루는 새삼 왜 왕이 신신당부를 했는지 알 만했다.
교환이 끝나자 미가루가 지휘하는 병사들은 일제히 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차 안에 들어가 가득 쌓인 황금을 보자 누리끼리한 금에 왜 그리 사람들이 광분하는지 영 이해가 안 가는 소천악이다.
한참을 마차 위에서 기다린 후에야 온 대인이 데리고 온 마부들이 나타났다. 온 대인은 마차 안에 실린 어마어마한 금덩이에 놀라 급히 물었다.
"아니, 이게 무슨 금입니까?"
"그저 길 가다가 얻은 부수입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 중 일천 관은 호송비와 상단 운영비로 쓰시고 나머지는 전장에 맡기고 나중에 제가 필요하다 하면 전표로 주시오."
무심히 대답하는 소천악의 배포에 질리기도 했거니와 내막을 숨기려는 기색을 알아챈 온 대인은 두말없이 대답했다.
"알겠소이다. 중원에 가는 즉시 바로 처리해 드리지요."
"마차 안에 있는 황금에 대해선 모두에게 함구령을 내려주시지요. 아무래도 견물생심이라 다른 이들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소이다."
"염려 마시오. 우리 상단 사람들은 입이 다 무겁소이다. 내 거기다 특별히 당부해 두겠소."
자신 있게 말하는 온 대인을 보며 신뢰를 보낸 소천악이다.
마차를 몰고 다시 사신단에 합류한 후 온 대인의 지략으로 상행에서 얻은 특산물로 안 다른 일행들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챙긴 은자만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라 굳이 탐심을 드러낼 필요도 못 느꼈다.
한동안 평화로운 여행이 지나가는 동안 어느덧 중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장장 일 년 육 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끝나가는 시점이다. 소천악과 일행은 감개무량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대여정이었다.
마침내 서장에 도착하자 포달랍궁의 마라십존자 중 혈존자가 웃으며 말했다.
"대주님!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궁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들러 사의를 표하겠습니다. 오늘은 일정이 빡빡해 그냥 간다고 달라이라마님에게 인사 전해주십시오."
얼굴 가득 호의를 담은 소천악의 말에 절로 흐뭇해진 혈존자의 입에서 다정한 말이 나왔다.
"물론입니다. 약속을 지켜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대주님은 우리와 친구 사이입니다. 언제든지 시간 나시거나 어려움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들르십시오."
얼굴에 호의가 가득한 얼굴로 덕담을 나눈 후 헤어졌다. 얼마 지나자 대뢰음사와 소뢰음사 고수들도 작별을 고하고 멀리 떠나갔다.
감회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천악이 심자앙 수석책사에게 말했다.
"심 책사님! 드디어 무사히 중원 땅으로 돌아가나 봅니다. 이게 다 책사님이 마련하신 계책 덕분입니다."
"허허! 과찬을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참으로 뜻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리 생각하시니 불초소생도 기분이 좋습니다."
말을 타고 터덜터덜 가는 일행의 얼굴에는 고향을 찾아간다는 기쁨이 한가득 자리했다.
제3-7장 혈교의 습격
그 잠시의 평온을 망치는 전서구가 하늘을 가르며 소천악에게 다가왔다. 하오문의 전서구란 걸 이내 깨달은 그는 별 생각 없이 다리에 묶인 서찰을 꺼내 읽었다.
읽을수록 얼굴이 굳어지는 그를 본 일행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다 본 소천악은 옆에서 궁금증을 애써 누르던 심자앙 수석책사에게 서찰을 건네주었다. 얼른 읽어본 심자앙의 안색도 굳어졌다.
"이거 막 가자는 거지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소천악의 입에서 거친 언사가 튀어나왔다.
"그럴 만합니다. 우리가 가진 은자가 도대체 얼마입니까? 삼 할을 나눠 주고도 열 배를 남긴 장사 아닙니까? 저라도 알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 겁니다."
"제길! 이거 다 와서 다시 피 보게 생겼습니다. 일단 모두 모여 회의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소천악과 흑마전 그리고 혈살막 고수는 물론 사존맹과 집마부 고수들도 모두 모여 회의에 들어갔다. 사실을 이야기하자 모두의 얼굴에는 격한 분노가 올라왔다.
특히 사존맹과 집마부 고수들의 눈빛이 바로 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싹수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감히 우리가 일 년 육 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벌어온 은자를 입도 안 씻고 털어 먹으려고 해!"
"맞소이다. 감히 우리 집마부를 뭐로 알고! 이런 죽일 놈들이."
구지귀왕 요문탁이 버럭 소리치는 걸 시작으로 졸지에 회의장은 시장바닥으로 변해 정체불명의 집단을 성토하는 자리로 둔갑했다.
잠시 후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소천악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우리 같은 무인보다야 심자앙 수석책사 같은 분들이 훨씬 나은 방책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폭급함을 드러내던 요문탁과 지공타 등 양파 고수들이 모두 심자앙 수석책사를 쳐다보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선 그는 바로 입을 열었다.
"비록 적이 숨어서 기습을 노리지만 이미 우리가 아는 이상 크게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다만 서찰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적들도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감히 사존맹과 집마부를 상대로 싸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만 봐도 수월한 상대가 아닙니다. 다만 저들도 황궁과의 마찰을 꺼려하여 정체를 감추는 걸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적어도 산적 따위는 아닐 겁니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소천악이다. 사실 그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혈교였다.
그들이 아니고는 감히 사마도를 대표하는 양파를 적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문파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다. 물론 밝히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괜히 분란을 일으켜 자신이 선봉에 서기는 성가신 점이 너무 많을 듯했다.
"서찰에 의하면 그들은 오로지 상단만 노리는 걸로 판단된다 합니다. 좌우간 사신단은 한 명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보호해야 합니다. 만약 죽거나 다치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꼴입니다. 황제의 분노를 받는다는 건 유쾌하지 않지요."
"음! 골치 아프군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요문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심자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기습을 알고 있으니 적보다 우리가 유리합니다. 최소한 기습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허허! 기습하려는 자를 되려 기습한다라! 흥미가 당깁니다."
천상 무골인 지공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웃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거센 살기가 풍겨나왔다.
"일단 대비책을 우리 책사들이 모여 만들 테니 여러분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비함이 옳은 듯하외다."
잘라 말하는 심자앙을 보며 다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천축길에서 보여준 그의 지략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신뢰감을 가지고 쉽게 따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