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96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96화
말을 들은 아수라마궁 쪽에서 두 명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흐흐! 웬 애송이 녀석이 설치는 게야? 난 아수라마궁의 육궁주 구궁건(鳩窮乾)이라 한다. 옆은 칠궁주 냉무심(冷無心)이라 하지."
"허! 이름은 중원식이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뭐요? 보아하니 싸울 기세인데 말이오."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말하는 소천악의 기세는 공기를 가르며 싸늘하게 다가섰다. 그 만만하지 않은 기세에 잠시 안색이 변한 두 궁주가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파파팡.
기세의 충돌이 일자 공기가 회오리치듯 하늘로 올라가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거대한 암경을 느낀 두 궁주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으음!"
중압감에 낮은 신음을 토한 두 궁주는 소천악을 바라보고 경악했다. 전혀 미동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일종의 기선제압이었다. 나름대로 두 궁주의 무공경지를 파악해 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더욱 여유를 부렸다.
"한판 하시려고 온 건 아는데 싸워봐야 서로 힘들기만 하니 먼저 대화로 풀어봅시다."
"시끄럽다. 무림의 법은 힘이다. 말로 뭘 하겠다는 거냐?"
잠시 기세에 눌리자 열이 받은 구궁건이 소리쳤다.
"오호라! 힘이라. 좋소이다. 그럼 일단 궁주님들과 한판 해봅시다. 일단 고수끼리 몸 풀고 단체로 싸우든지 말로 하든지 결판을 냅시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두 궁주를 보며 기분 좋을 리 없는 소천악이 거칠게 나오자 두 궁주는 새파란 안광을 번뜩였다.
"피라미 같은 놈이 감히!"
"피라미인지 대어인지 일단 말만 하지 말고 오슈."
아예 시비조로 나오는 소천악의 말에 격분한 육궁주 구궁건이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어디 네놈 입만큼 실력이 되는가 보자."
"얼마든지 보시구려. 솔직히 걱정되는 건 나이가 계셔서 뼈라도 부러지면 한동안 고생하실 거 같소이다."
살살 약을 올리는 소천악을 보며 이미 냉정을 찾은 육궁주 구궁건이 천천히 보법을 밟아 다가왔다. 아수라마궁 비전절기인 유유보였다. 좌측으로 가는 듯하면서도 우측으로 전개하는 신묘한 보법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소천악도 서서히 움직였다.
일단 둘이 몸을 움직이자 순간 모습을 놓칠 정도로 쾌속하게 변화하는 모습에 보는 이의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다.
순간 육궁주의 눈이 번쩍이며 소천악의 빈틈을 찾아낸 듯이 번개같이 발을 움직여 십여 번이 넘도록 강타해 왔다. 소천악은 얼음같이 차가운 안광을 빛내며 침착하게 손을 들어 발끝을 내력으로 틀어댔다. 육궁주의 발은 손에 막혀 대혈을 치지 못하고 허무하게 빗나갔다.
"제법이구나. 과연 큰소리칠 만한 실력이군."
"후후! 육궁주님도 제법이시군요."
비위를 건드리는 말투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육궁주의 연환공세가 이어졌다. 두 발을 교차해 탄력을 받은 그의 몸은 허공에서 세차게 회전하며 소천악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깰 듯 밀려왔다. 육중한 몸이 마치 물 찬 제비처럼 자유자재로 허공을 휘젓는 모습이 차라리 아름다울 정도였다.
"조심해라, 애송아!"
고절한 무공을 지닌 소천악에게 호감을 느낀 육궁주가 말했다. 힘을 숭상하는 문파답게 강자에게 너그러움을 보였다. 그 마음을 짐작한 소천악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서 오시지요."
말과 함께 소천악은 양손을 구부려 팔꿈치로 다가서는 발을 세차게 격타했다.
퍼퍼퍽.
육궁주의 발은 무서울 정도로 매서웠다. 연거푸 막아대는 소천악이 연신 뒷걸음질치며 충격을 완화시킬 정도였다. 혈검문의 비전무공은 검술에 치중할 뿐 권각술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고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각이 약한 소천악이 아니다. 발차기가 끝나는 순간 마치 먹이를 본 송골매처럼 무서운 반격이 시작되었다.
내공을 쏟아 부은 육궁주가 잠시 허공에서 호흡을 고르려는 때 소천악의 몸이 매섭게 허공으로 솟구치며 가슴을 노려갔다. 육궁주가 섬뜩한 마음에 급히 몸을 돌려 피하려는 순간 이미 지척으로 밀려든 소천악이다.
놀란 육궁주가 연환퇴로 발을 현란하게 놀려 소천악의 전신을 노렸으나 이미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손발을 막을 틈이 없었다.
팍!
연환퇴의 한 발이 소천악의 어깨를 강타했으나 자신도 권과 각의 연타에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커흑!"
가슴에서 올라오는 비명을 참으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인정사정없이 전신대혈을 강타하는 권에 순간 정신을 잃어버렸다.
쿵.
육중한 몸이 땅에 떨어지며 기절한 육궁주였다. 땅에 내려선 소천악은 격타당한 어깨가 쑤셔오는 통증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심하게 손을 쓰진 않았으니 괜찮을 거요."
놀란 칠궁주가 서둘러 육궁주의 혈도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얼마 후 비로소 정신을 차린 육궁주 구궁건이 파안대소했다.
"크하하! 허약한 중원 땅에도 인재가 있었구나."
"과찬이시오. 손속에 사정을 봐준 덕분이오."
소천악의 말에 입가에 피를 묻힌 채로 웃던 구궁건이 천천히 일어섰다. 패배했지만 후회 없는 비무였기에 기분은 상쾌한 터였다.
"좋네. 이제 자네가 말하는 대화를 이야기해 보게나."
호탕한 소리로 말하는 구궁건을 보며 새삼 감탄이 일어나는 소천악이다. 무인다운 기상을 보이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하하! 저는 머리 쓰는 건 영 취미에 맞지 않습니다. 저기 우리 수석책사이신 심자앙 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그런가? 나도 그런 건 싫네. 우리도 칠궁주 냉무심이 말할 걸세. 자네와 난 술이나 한잔함이 어떤가?"
"그거 좋은 소리죠. 판 벌이고 한잔하시죠."
이후.
심자앙과 냉무심은 머리를 싸매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걸려고 아등바등거렸고, 팔자 늘어진 소천악과 구궁건은 술동이를 옆에 끼고 부어라 마셔라에 깊이 빠져들었다.
길고 긴 줄다리기가 끝나고 피차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심자앙 수석책사가 말했다.
"칠궁주님! 그럼 약속대로 아수라마궁 고수 분들을 언제 보내주실 겁니까?"
"가서 일궁주님께 말하고 바로 보내주지요."
냉막한 인상답게 싸늘하게 말한 냉무심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구궁건을 부축한 채 말없이 사라졌다. 물론 아수라마궁 고수들도 따라갔다.
술에 취한 소천악을 끌다시피 데려온 심자앙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행들은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소천악을 보고 기가 막혔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종천리가 다급히 묻자 소천악을 부축하느라 진이 빠진 심자앙이 힘겹게 말했다.
"이야기가 잘되었소. 자, 이제 갑시다. 가다 보면 아수라마궁 고수들이 호위행렬에 합류할 거요."
"나참! 대주님이 가시기만 하면 일이 술술 풀리니 이건 도대체!"
"서로에게 좋으면 싸울 일이 없지요. 갑시다."
일행은 잘 풀렸다는 말에 안심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육궁주 구궁건이 이끄는 아수라마궁 고수들이 합류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상단을 급하게 꾸며 데리고 왔다.
이후 아무도 소천악을 보기는 힘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구궁건과 죽이 맞아 술타령하느라 마차 안에서 거의 나오질 않았다. 이제는 일행을 건드리는 문파는 멸문을 각오하고 덤벼야 할 판이다.
중원과 천축을 주름잡는 거대문파가 총동원된 사신단을 건드릴 담량을 가진 문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중원을 떠난 지 어느새 일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전서구가 다니기는 어려워 이제는 중원 사정은 전혀 모르는 형편이다. 하긴 굳이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발음하기도 힘든 여러 곳을 지난 관무평을 비롯한 사신 행렬은 마침내 제대로 된 천축이라는 대식국을 향해 힘차게 접근해 갔다.
"종 막주님, 이거 살다 보니 별 나라를 다 가봅니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상한 인연으로 천축 땅을 온통 구경 다니네요."
"듣자 하니 대식국인가 뭔가 하는 나라가 천축을 쥐락펴락하는 강대국이라 하데요."
"그런가 봅니다."
무심한 종천리의 대답을 듣던 소천악이 한숨을 쉬며 하소연을 했다.
"강대국이고 나발이고 어서 관무평 대인께서 제대로 일처리하고 중원으로 돌아가야 속이 편할 텐데요."
"왜, 재미없나요?"
"재미는 무슨! 이건 체면 차리느라 술자리도 제대로 못 하고 말입니다. 사신 분들은 왕실 접대라도 받지요. 우린 뭡니까? 자나 깨나 호위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투덜거리는 소천악을 보며 종천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아무리 무공고수라 할지라도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는 걸 느꼈다.
"다르게 생각하셔야지요. 이번 여행에서 변방의 강파와 유대관계를 맺은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무사히 약속대로 일이 끝나면 그들은 앞으로 대주님이 도움을 청한다면 기꺼이 움직일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뒤에 버티면 제아무리 정파가 모인다 해도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긴 힘듭니다."
"음, 그렇군요. 하긴 제가 봐도 강하긴 강하더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소천악을 보며 기회를 잡았다는 듯 종천리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제 돌아가면 대주님은 중원에서 몇째 안 가는 부자가 될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상행이 빈번해질수록 이익은 산더미처럼 늘어날 겁니다."
"제길! 어디 인생이 돈과 힘만으로 행복합니까?"
투덜거리는 소천악을 보며 미소짓던 종 막주가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었다.
"부와 무공을 갖춘 대주님을 중원의 모든 미녀들이 오매불망 사모할 건 당연합니다."
"헉!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요. 돌아가시면 실감하실 겁니다."
"으하하! 종 막주님의 고견을 들으니 기분이 확 바뀌는군요."
서로 듣기 좋은 덕담을 나누며 호탕하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다른 일행들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대식국에 도착하자 관무평 대인은 국왕을 접견하러 떠났고 상인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거래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각 문파의 고수들이 철두철미하게 호위하는 탓에 별다른 불상사도 일어날 리가 없는 형국이다. 잠시 비는 시간을 이용해 소천악 일행은 성내 구경에 나섰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건 대식국 특유의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날카로운 강철가시가 무수히 박혀 있는 판 위에 아무렇지 않게 올라가 책을 보는 허연 수염을 지닌 노인네를 보다 보니 경악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거 분명히 내공 없이 하는 건데 어찌 저럴 수가!"
"허허! 저건 대식국 특유의 정신수양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경지라고 책에서 배웠습니다."
심자앙의 설명에도 놀란 소천악의 탄성은 그치질 않았다.
"오호! 정말 놀랍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수행을 거쳐야 저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연신 감탄사를 던지던 소천악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통역을 위해 심자앙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