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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90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3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90화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이번은 절대 안 됩니다. 한 번 더 포달랍궁이 공격한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선봉에 서면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겁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들은 듯 대번에 일축하는 소천악이다. 조심스레 말을 잇는 심자앙이다.

 

  "그래도 대의명분상 정파인들은 피해가 커 우리를 앞에 내세운다면 곤란한 처지입니다."

 

  "하하, 그럴 줄 알고 미리 진여해 장로님에게 언질을 받아놓았습니다. 걱정 말고 우리 갈 길이나 조용히 갑시다."

 

  "아, 그런… 도대체 무슨 말을?"

 

  궁금함을 못 이긴 심자앙 수석책사의 말에 소천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이 약속하시길 사신단과 자기네들 상단은 책임지고 지킬 테니 우리는 다른 상단이나 제대로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원래 남아일언 중천금이지요. 암, 그렇지요.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높으신 정파 분들이 일구이언(一口二言)이야 하겠습니까?"

 

  "허."

 

  명분보다 실리를 중요시하는 소천악의 의지를 확인하자 심자앙 수석책사는 더 이상 권유하기가 힘들었다. 막상 결정을 내린 후라면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걸 익히 아는 그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주군을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려고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더욱더 신뢰감이 드는 게 이율배반적이다.

 

  자신의 사람을 아끼는 면모가 유사시에 그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 그로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크게 소리쳐 말하는 그들의 대화를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물론 무공을 익혀 귀가 한결 밝아진 각파의 고수들이 못 들을 리 없었다. 대화 내용을 들은 모든 이는 소천악의 품성에 새삼 감탄했다.

 

  자신들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명성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그에게 없던 신뢰도 팍팍 샘솟았다. 하물며 병사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것도 소천악의 지략이라는 걸 그들이 안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하지만 마냥 그런 건 아니었다. 소천악도 세상을 접하다 보니 자신의 사람이 소중하다는 걸 어느 정도 깨달았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긴 애매했다. 바야흐로 산에서 사람이라곤 혈사부밖에 모르던 그가 천천히 인생을 배워가는 순간이다.

 

  그 순간 멀리서 먼지가 일더니 어느새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부지런히 접근해 왔다. 처음엔 혹시 포달랍궁의 고수들이 공격하는 게 아닌가 긴장하던 일행은 가까이 다가온 이를 확인하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모두 화산파의 무복을 걸친 이십대 후반의 무인이었다. 그들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후기지수의 상징인 매화이십사검 중의 이 인이었다. 나름대로 준수한 용모에 눈에 패기가 넘쳐흘렀지만 어딘지 모르게 교만한 기운이 풍겨나왔다.

 

  중원에서 대륙이 좁다 하고 위명을 떨치던 그들의 복색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악전고투를 거친 상태란 게 첫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다가온 그들은 소천악을 찾아와 말을 전했다.

 

  "우리는 진 장로님이 보낸 화산 매화검수 진가승(眞加承), 진가중(陳可中) 형제외다. 소천악 대주님을 찾아 전하라는 전갈을 가지고 왔소이다."

 

  "이리로 오시오, 진씨 소협들!"

 

  느긋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확인하곤 둘은 바로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서신을 전했다. 그 모습에는 소천악을 향한 일 점의 존경심이나 예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위에 서 있던 종천리 혈살막주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려는 순간이다.

 

  서신을 천천히 읽어본 소천악은 고개를 저으며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가서 전해주시오. 이번 싸움으로 입은 손실에 안타까운 마음이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선봉에 설 채비가 아니 되었으니 조금 더 진용을 갖추고 고려해 보겠다고 전해주시오."

 

  "아니, 대주님! 지금 선봉은 포달랍궁의 기습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일단 정비해야 하는 처지외다. 어찌 그런 망발을!"

 

  노기가 치민 진가승이 혈기를 참지 못하고 거칠게 말하자 소천악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지금 진 소협이 감히 금위대 대주를 협박하는 것이오? 아무리 무림과 황실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묵계도 모른단 말이오? 지금 난 무림인이기 이전에 이 행렬의 총호위책임을 맡은 지휘자요. 어디서 감히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말을 하는 겁니까?"

 

  사납게 소리치는 소천악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두 형제를 도륙낼 기세였다. 물론 화산파가 배출한 걸출한 후기지수란 소리를 듣던 진씨 형제가 순순히 꼬리를 내릴 리 만무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감히 화산파를 능멸하는 겁니까?"

 

  "오호, 말씀 잘 하셨소이다. 그럼 화산파는 지금 황궁을 능멸하는 거 맞지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소천악의 말에 말문이 막힌 진씨형제였다. 아차 하면 화산파가 황궁을 능멸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황당한 경우에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진가승은 내심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미안하오이다. 사정이 화급해 나도 모르게 실언을 한 점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대주님 말은 선봉에 안 서겠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소. 아직 준비가 덜 되었고 전에 진 장로님과 협약을 맺은 점도 있소. 가서 말씀하시면 알아들으실 거외다. 그렇다고 마냥 피하자는 게 아니고 곧 선봉에 설 거라는 말도 전해주시오."

 

  "알겠소이다. 그리 전하지요. 그럼 이만 소생들은 물러가외다."

 

  울화통을 애써 누르며 진씨 형제는 서둘러 말고삐를 돌려 정파 무림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꼭 보면 위신은 살리면서 부탁인지 요구인지 헷갈리게 한다니까."

 

  투덜거리는 소천악을 보며 심자앙은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화산파 제자를 가볍게 입으로 뭉개는 기세와 무당파의 원로이자 정파 무림인들의 구심점인 진여해 장로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뱃심에 찬탄도 나왔다.

 

  "대단하십니다."

 

  "후후. 세게 나갈 때는 이렇게 해야 상대가 무시하지 않죠."

 

  "그런데 정파 무림인들이 가만있을까요?"

 

  걱정스레 반문하는 심자앙 수석책사를 보며 소천악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뭐 내가 애초에 이러자 한 겁니까? 그분들이 알아서 편성한 건데요. 아, 명성을 얻으려면 피도 흐른다는 걸 모를 분들도 아니지요."

 

  그다운 답이 나오자 심자앙도 말문을 닫았다.

 

 

 

  한편 진씨 형제가 돌아가 소천악의 답을 이야기하자 정파 무림인들은 격분했다.

 

  "아니, 이럴 수가! 어찌 이렇게 나올 수가!"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저들은 그저 편하게 우리를 뒤따라오며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정파 무림인들을 바라보던 진여해 장로는 착잡한 마음이다.

 

  "모두 조용하시오. 소 대주가 저리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전에 그가 찾아와서 의논할 때를 생각해 보시오."

 

  "커험!"

 

  폐부를 찌르는 말에 정파 무림인들은 어색한 헛기침만 할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아무리 중원을 떠난 길이라지만 감히 천하의 고수들이 운집한 사신 행렬을 기습할 간담을 가진 변방 문파는 없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그들의 자만심을 짓밟고 먼저 포달랍궁이 공격했고 겨우 물리쳤지만 다시 공격할 기미를 느낀 후퇴였다. 그들의 힘은 정말 만만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문파들도 조용히 자신들을 보낸다는 확신이 이제는 도무지 서지 않았다. 고민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자자! 이러지 말고 관무평 사신님을 만나뵙고 의논을 드려야 할 것 같소이다. 소 대주가 선봉을 아예 피하는 것도 아니고 정비할 시간을 달라는데 뭐라 하기도 사실 그렇소."

 

  진 장로의 말에 정파 무림인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 무인이 반발했다.

 

  "그거 말로만 하고 나서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허허! 그때가 되면 관무평 대인께서 다 말씀하실 겁니다."

 

  수심에 찬 표정으로 관무평 대인을 찾아가는 진여해 장로의 표정은 노련한 강호인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관 대인! 아무래도 포달랍궁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소이다."

 

  "허! 이거 난제올시다. 중원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런 어려움이 있다니."

 

  피 튀기는 혈전을 두 눈으로 지켜본 관무평의 눈은 심하게 흔들렸다. 평생을 문약한 선비로 살며 벼슬길에 있던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잠시 우리가 후미에 서고 소천악 대주가 이끄는 행렬을 선두에 서게 하심이 어떨지?"

 

  "아니, 진 장로님! 바로 어제 선봉은 정파 무림인들이 선다며 소 대주를 눈앞에서 면박 주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면 승낙하겠습니까?"

 

  "아마 관 대인이 명하시면 될 듯도 합니다만. 황상 폐하의 뜻도 있으시고."

 

  은연중에 황상을 거론하며 압박하는 진여해 장로였다. 그 말뜻을 모를 리 없는 관무평 사신이 몸을 움찔거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바로 서찰을 써내려갔다. 붓을 놓은 그가 말했다.

 

  "자! 이걸 소 대주에게 전달해 주시오."

 

  "허허! 관 대인께서 이리 도와주시니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다 잘되자고 하는 일입니다. 명색이 상관인 제 말을 소 대주가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서로 나누는 두 사람이다. 관 대인과 헤어진 진여해 장로는 바로 소천악에게 인편을 통해 서찰을 보냈다.

 

  결과는!

 

  단칼에 거절한 소천악이다. 답신으로 보낸 서찰 내용에 진여해는 머리를 싸매야 했다.

 

 

 

  <관무평 대인!

 

  사신단과 상단의 모든 호위 책임은 제가 관할합니다.

 

  관 대인께서는 그저 사신으로서의 임무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외에는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혹여 제가 선봉에 나선다면 정파 무림인들이 실패했다는 문서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사신단 호위단장 금위대 대주 소천악 배상.>

 

 

 

  사리에 맞는 글에 관무평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씁쓸하게 웃던 관무평이 넌지시 물었다.

 

  "서찰을 쓸 수 있겠소, 진 장로님?"

 

  "불가합니다. 어찌 천하의 정파를 대표한 제가 실패를 자인하오리까! 염려 마십시오. 우리 정파 무림인들이 똘똘 뭉쳐 기필코 이번 사신행을 성공으로 이끌겠습니다."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치는 진여해 장로를 바라보는 관무평의 시선은 불신이 서서히 새겨져 갔다.

 

 

 

  이튿날.

 

  조용히 지나가던 시간이 오시를 가리킬 무렵 긴장 속에 움직이던 행렬을 향해 혈살막 살수가 들이닥쳤다.

 

  "다시 포달랍궁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치열한 싸움이 선봉에선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어떤가요?"

 

  왠지 시큰둥한 음성 같지만 설마 한 살수는 바로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습니다. 포달랍궁에서도 오늘은 끝장을 볼 생각인가 봅니다. 수백 명의 일류고수들이 몰려왔습니다."

 

  "음! 혹시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낌새는 없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만 아마 선봉을 전멸시킨다면 다음 순서는 우리 차례일 건 분명합니다."

 

  "열심히 응원해야겠군요."

 

  심드렁하게 말하던 소천악은 옆에 있던 심자앙 수석책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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