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14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3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14화
당 노인의 모습은 평범했다.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카락만 단정히 쓸어 올리면 여느 시골노인과 다를 게 없었다.
저 노인이 진짜 귀독마종일까?
왕규가 아는 귀독마종 당초당은 지옥의 나찰악귀 같은 자였다. 저렇게 평범한 시골노인처럼 생길 리가 없었다.
아마 집안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와 한쪽에 매달려서 바짝 말라 있는 섬뜩한 물체들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사람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을 것이다.
“왕가라 합니다.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걱정이었는데, 이 안은 따뜻하군요.”
왕규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 노인은 왕규를 빤히 쳐다보고는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 방에 가서 쉬게. 함부로 집안을 오가지 말고. 밥은 줄 수 없으니 그렇게 알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약을 만드시나 보군요.”
“신경 쓸 것 없어.”
귀찮다는 투로 한마디 툭 던진 당 노인은 작은 돌절구에 뭔가를 넣고 역시 돌로 된 절굿공이로 절구질을 했다.
절구 안에 있는 물체는 말라비틀어진 두꺼비처럼 보였는데, 절구로 내려칠 때마다 입이 비틀어지고 앞다리가 쳐들려서 마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지금 제압할까?’
당 노인은 아무런 경각심도 갖지 않고 등을 돌린 상태다.
절호의 기회!
손가락 하나만 뻗으면 마혈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냐, 지금이 아니어도 기회는 언제든 있어. 서두르지 말자.’
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른 왕규는 다시 말을 붙여보았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조용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냉랭히 말한 당 노인은 지렁이 말린 것처럼 보이는 검은 물체를 절구에 추가로 넣고 찧었다.
절구에서 역겨울 정도로 비릿한 냄새가 피어났다.
왕규는 행여나 그 께름칙한 물체를 찧어달라고 할까봐 걱정되어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몸을 돌렸다.
‘계속 대화를 거부하면 그냥 제압해야겠어.’
대화를 통해서 목적을 이루려 했는데,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때 당 노인이 고개를 돌려서 왕규의 등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꺼풀 속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들거렸다.
토가의 한쪽에는 칸막이로 나누어진 방이 있었다. 모두 두 개였는데 하나는 귀독마종의 침실이고, 하나는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였다.
왕규는 온갖 물건이 구석에 쌓여있는 방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방은 생각보다 넓어서 한 사람 자기에는 비좁지 않았다.
아쉬운 것은 불빛이 없다는 건데, 노인이 있는 곳에 켜진 등잔불 덕분에 주위를 분간 못할 정도로 어둡진 않았다.
등을 벽에 기댄 그는 밖을 슬쩍슬쩍 살펴보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저 늙은이도 잠은 자겠지?’
잠 잘 때 제압해서 고문을 해볼까? 아니면 아침에 대화를 나누어 본 뒤 제압해? 혹시 모르니 해독제를 미리 복용할까?
‘아니야, 해독제의 약효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복용하고 바로 운공조식을 해야 돼.’
하지만 귀독마종이 있는 곳에서 운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이 무인이라는 게 들통 날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지났을까, 지난 며칠 동안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지 눈꺼풀이 만근 무게로 내리눌렀다.
귀독마종의 거처에서 졸다니!
흠칫한 왕규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러나 한 번 몰려들기 시작한 졸음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악착 같이 그의 눈꺼풀을 눌러댔다.
운공조식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졸음을 몰아내기가 더욱 힘들었다.
밖으로 나가서 바람 좀 쐴까?
그러면 귀독마종이 수상하게 여길지 모른다. 추위 때문에 따뜻한 곳을 찾아온 사람이 졸음을 쫓겠다고 밖으로 나가면 누가 의심하지 않겠는가.
‘제기랄! 미치겠군!’
왕규가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있는데 당 노인이 찾아왔다.
한손에는 등잔을, 한손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안 자면 차 한 잔 하게나.”
당 노인은 대답도 듣지 않고 차를 따랐다.
등잔불빛 때문인지 차 색깔이 붉게 느껴졌다.
찻잔 속의 차를 바라보는 왕규의 입안이 바짝 말랐다.
저 차에 독을 타진 않았을까?
마시고 죽는 것 아냐?
상대는 귀독마종이다. 숨 쉬는 것조차 주의해야할 독의 대가.
하물며 차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주는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의 의도를 눈치 챌지도 모를 일.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마시면 속이 따뜻해질 거네.”
더구나 그리 말하는데 어찌 마시지 않겠다고 한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고맙다고 하며 마시는 수밖에.
한편으로는 이렇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싶으면 해독제를 복용하지 뭐.’
차는 약간 시큼하면서도 구수했다. 입술만 적셨는데도 구수한 향기가 났다.
‘응?’
왕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당 노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실 만하지?”
“예, 괜찮군요.”
왕규는 한 모금 마셔보았다.
당 노인의 말대로 뱃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왔나?”
“구강에서 왔습니다.”
파양호 입구에 있는 구강은 왕규의 고향이다. 이어질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려면 자신이 잘 아는 곳을 말해야 했다.
“멀리서 왔군.”
“약초 캐는 사람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그래, 이 근처에는 괜찮은 약초들이 많지.”
대화가 훈훈하게 이어지자, 왕규도 긴장감이 조금 느슨해졌다.
“노인장께선 원래 이곳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당 노인이 입술을 비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서 다시 푸르스름한 기가 돌았다.
눈뿐이 아니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도 푸르스름했다.
-조심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때 당 노인이 말했다.
“맞아. 아마 자네도 알 걸?”
“예?”
“내가 누군지 알고 찾아온 거 아닌가?”
왕규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는 상대가 모르게 공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곧 움찔하며 눈빛이 흔들렸다.
단전의 공력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뱃속에 마치 달궈진 바윗덩이가 들어앉아 있는 듯했다.
당 노인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 내 미처 말하지 않았네만, 자네가 마신 차에 귀한 약을 좀 넣었다네.”
약이 아니라 독을 넣었겠지!
왕규는 당 노인, 당초당의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을 뒤로 뺐다.
그런데 몸이 무거워서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당초당이 푸르스름한 이를 드러내며 사이한 미소를 지었다.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두 눈에서도 시퍼런 귀기가 번뜩였다.
“그 약이 들어가면 뱃속이 따뜻해지지. 그리고 공력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네. 그래도 당장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말게.”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왕규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하지만 당초당은 확고한 증거를 잡은 즙포사신처럼 그를 몰아붙였다.
“발걸음이 무척 가볍더군. 무공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히지 않으면 절대 그런 걸음을 걸을 수 없지.”
최대한 조심했다. 그게 악수가 되었나보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다.
“약초꾼 중에 자네처럼 무공을 지닌 놈이 몇이나 되겠는가?”
“무공을 익힌 사람은 약초를 캐러 다니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물론 안 된다는 법은 없지. 하지만 무공이 자네처럼 고강한 약초꾼은 많지 않아. 그리고 그런 놈 중 나를 찾아와서 내 뒤통수를 갈기려고 노려보는 놈은 더더군다나 없지.”
지미, 순간적으로 드러낸 살기를 눈치 챘나보다.
“저는 노인장을 찾아온 게 아니라…….”
“나는 거짓말하는 놈을 무척 싫어한다네. 나를 속이는 놈은 서서히 녹여서 죽였지. 현상금을 노리고 나를 찾아왔던 놈들 중 다섯이 그렇게 죽어갔다네. 클클클클. 팔다리와 몸통이 녹으면서 달라붙었는데,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니까 살이 쩍쩍 갈라지면서 뼈가 드러나더군.”
‘빌어먹을!’
왕규는 소름이 끼쳐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귀독마종을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얼굴을 알든 모르든 자신을 찾아오는 자는 무조건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런 자 뒤에서 공격할 건지 말 건지 고민하며 노려보았으니 정말 멍청했던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그때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살기든 뭐든 자신의 공격의지가 드러났을 테니까.
‘차라리 그때 제압했어야 했어.’
이제 와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랴.
왕규는 이제 녹아서 죽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굴려야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죠. 예, 맞습니다. 저는 당 노인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지? 현상금이 탐나서?”
“아닙니다. 저도 돈은 충분히 벌어 놓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겁니다.”
“그럼 왜 나를 찾아온 거지?”
“독을 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독을 사?”
“반드시 죽이고 싶은 놈이 있습니다. 제 마누라와 자식들을 처참하게 죽인 놈이죠. 그런데…….”
왕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소설을 썼다.
“……그런데 독에 당했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병에 걸려서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죽은 것처럼 죽여야 하죠. 만에 하나 독에 당했다는 걸 알면, 그나마 살아남은 어린 손자들마저 죽습니다. 제발 좀 도와주십쇼, 당 어르신!”
말투와 표정이 어찌나 절절한지, 수십 명을 독살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당초당조차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가족도 몇 년 전 독왕에게 몰살당했지 않은가.
동병상련이랄까?
“도대체 어떤 놈인데 그렇게 악랄하단 말이냐?”
왕규는 최대한 절실한 표정으로 울먹거리며 말했다.
“제 동생입니다. 왕규라고, 합비에서 정보장사 하는 놈인데…… 제 재산을 뺏으려고…… 크흑,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놈 같군. 하긴 정보장사 하는 놈들이 독하긴 하지. 독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테니까.”
“제발 도와주십쇼, 어르신! 도와주신다면 은자 일천 냥을 드리겠습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지라 혼을 담아서 말했다. 덕분에 일생일대 최고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자신의 이름을 판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나중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이름을 댔다가 거짓말이 들통 나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정말로 몸을 녹여서 서서히 죽일 것이다.
당초당은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악독한 자였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야 하고?”
“예, 어르신!”
“그런 것이 있긴 있지.”
“오오오, 정말입니까? 과연 천하제일 독의 종주이십니다! 독왕 남사명 따위는 어르신의 위명 앞에서 고개도 못들 겁니다!”
어차피 이판사판, 독왕 남사명까지 팔아먹었다.
남사명의 이름을 들은 당초당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크크크크, 독왕 남사명이라고? 흥! 그 늙은이 따위는 감히 내 상대가 아니니라!”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이한 목소리. 눈에서 번들거리던 시퍼런 귀기가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왕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안간힘을 다해서 참으며 절절히 외쳤다.
어찌나 절절한지 눈물 콧물이 침과 섞여서 튀었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그 독을 파십시오,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