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89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89화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바라보던 마적단의 부두목이 말했다.
"두목, 그냥 보냅니까?"
"그럼 네가 가서 덤빌래? 가는 즉시 모두 관 속에 들어갈 판인데 뭘 어쩌라고?"
신경질적인 두목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모든 마적단이 비슷한 일을 겪었으나 도발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저 군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편안한 여행길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리 만만할 리가 없다. 중원을 떠나 천축을 향해 가는 길에 하오문에서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
"대주님! 이거 보십시오. 앞으로 하루 정도 가면 포달랍궁에서 나온 고수들이 매복한다는 하오문의 정보입니다."
안색이 변한 채 서찰 내용을 전하는 심자앙 수석책사의 말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꾸하는 소천악이다.
"음, 벌써! 그런데 하오문은 어떻게 중원 밖의 정보도 이리 신속하게 알 수 있지요?"
"허허! 원래 하오문이란 기녀와 도둑 등 밑바닥 인생이 모인 문파다 보니 세외에까지 그들의 촉수가 뻗어 있지요."
"음. 대단하군요. 제가 본 하오문은 영 비실비실거리는 게 힘이 없어 보이던데 정보 하나만큼은 정말 놀랍습니다."
소천악은 새삼 하오문의 정보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온 정보에 따라 심자앙 수석책사와 책사들이 부지런히 머리를 짜내 움직였다. 세 군데서 모여든 상단과 이 기회에 한몫 잡으려던 중소상단 여러 군데에 미리 암시를 주었다.
물론 흑마전과 혈살막 그리고 집마부와 사존맹 고수들에게도 남김없이 주의를 남겨 이미 행렬은 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당연히 앞에서 가고 있는 정파 무림인들에게는 정보를 제공할 이유가 없었다. 소리 소문 없이 준비만 할 뿐 정보는 거의 독점한 소천악 일행이다.
긴장감 속에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행렬은 조심스레 움직였다. 일단 중원 땅을 벗어나자 그동안 숨어서 몰래 따라오던 사존맹과 집마부의 고수들이 속속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한 안광만 봐도 모두 일류를 넘어서는 고수들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라보던 상인들은 그 위용에 어깨가 절로 펴졌다. 소천악이 장담하던 대로 이번 상행은 별 위험 없이 끝날 것 같은 예감에 절로 기분이 고조됐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소천악이 얼른 소개에 나섰다.
"다들 들으십시오. 이분들은 중원에 명성이 자자한 사존맹과 집마부의 정예고수 분들입니다. 모두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니 불편하신 점이 없게 배려해 주시길 당부합니다."
"그러지요. 하하! 우리 상인들이야 높으신 무림의 고수 분들이 도와주신다는데 고마움을 어찌 표현할지 모릅니다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역시 눈치 빠른 온 대인이 얼른 소천악의 편을 들어주니 다른 상인들도 동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마도의 거파가 데려온 상단은 자신들의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광활한 천축 시장을 생각할 때 바닷가에 모래알 같은 정도의 상단이 늘어난 정도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
자신들도 없어서 팔지 못할 처지인데 더 파는 거야 별 상관 없다는 판단에 따스하게 새로운 상단을 맞이하는 상인들이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며 팔 생각에 벌써부터 친분을 다지는 모습이 노련한 상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파의 고수들은 일행 모두가 자신들을 진심으로 반기는 모습에 기분 나쁠 리 없었다. 평소대로 성질을 마구 부리기는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뿌듯함을 가지고 인사치레에 여념이 없었다.
화목한 행렬은 계속 천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포달랍궁의 공격 소식에 잠시 두려움을 느꼈던 상인들도 이내 안정을 찾았다. 바라보는 각파의 고수들도 상인들을 볼 때 마치 금덩이가 움직이는 듯해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순간 맨 앞에서 길을 트고 있던 혈살막 살수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대주님! 앞에서 지금 막 정파 무림인들과 포달랍궁 고수 간에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무엇이? 어쩌다가 그리된 거요?"
"행렬을 갑자기 나타난 포달랍궁의 고수들이 자신의 영역을 우회할 것을 요구하자 정파 무림인들이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서로 감정이 상한 게 촉발제 역할을 한 거로 보입니다."
"그래요? 쯧쯧! 쓸데없는 자존심이 여러 사람 피 보게 하는군요. 그래 상황은 어떤가요?"
혀를 차며 말하는 소천악의 물음에 살수는 바로 대답했다.
"아직은 정파 무림인들의 방어를 뚫지 못해 포달랍궁 고수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점점 더 적의 고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음, 어려운 지경이겠군요. 심 책사님, 어떻게 할까요?"
일부러 크게 말하는 소천악이다. 이 같은 상황을 대비해 이미 각본을 짜둔 대로 움직이는 걸 보고 심자앙 수석책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단 우리도 적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으니 여기서 진을 펼치고 대비하심이 옳은 줄 압니다."
"음! 심 수석책사님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자, 모두 사전에 준비한 대로 방어진을 펼치시오."
죽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의 말에 따라 행렬은 일단 전진을 멈추고 방어대형으로 급속히 전환했다.
최외곽에 최강고수들인 집마부와 사존맹의 고수들이 맡고 그 뒤를 흑마전이 맡았다. 이천 명의 병사들은 섬전탈명침을 들고 팔괘진을 형성한 채 상단을 엄밀히 호위하는 금성철벽 같은 방어진을 일각도 되기 전에 만들었다.
특히 병사들의 움직임이 기민했다. 목숨이 걸리자 그들의 걸음은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움직여 훈련 성과를 여실히 드러냈다.
잠잠하다가 급속히 움직이며 방어벽을 만드는 모습은 상인들을 매료시켰다. 더욱더 신뢰가 간 상인들의 안색은 평온 그 자체였다.
사신단의 상황은 혈살막 살수들에 의해 시시각각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대주님! 정말 피 튀기는 혈전입니다. 벌써 정파 고수들 백여 명이 죽거나 심한 부상을 입었고 포달랍궁도 이백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온 걸로 보입니다."
"열심히 싸우시나 보군요. 뭐 본인들이 잘났다고 공을 가져가려 했으니 고생도 함께 가져가야지요."
태연한 대꾸에 살수들은 비정한 면모를 보이는 소천악의 철담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런 자와 적이 된다는 건 피 말리는 고생길이라는 게 더욱더 확신이 드는 그들이다.
십여 리 앞에서 벌어지는 혈전장이 사뭇 궁금했던 소천악은 심자앙 책사에게 전하고 슬쩍 자리를 비웠다.
경공술과 은잠술을 함께 시전해 앞으로 치고 가는 그의 신형은 안개처럼 모호하게 보였다. 주변의 풍광과 동화되어 인기척을 느끼기도 힘들게 지나가는 그를 발견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혈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은 그는 숲속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수백여 명이 뭉쳐서 싸우는 건 당사자들은 피가 말라도 구경꾼이 보기엔 실로 장관이었다. 홍의가사를 입은 포달랍궁 고수들의 손에서 밀수인 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이에 맞선 정파 무림인들은 각자 자파의 절기로 맞서나갔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진행될수록 양대세력의 희생자가 속출했다.
양대세력의 고수들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신 들리며 허무하게 오랫동안 키워온 정예고수들이 덧없이 스러져갔다.
멀리 진을 짜고 지켜보는 진여해 장로의 수심에 찬 얼굴도 보여 고소함이 더해 갔다. 관무평사신과 일행은 눈앞에서 전개되는 피보라에 몸을 움찔거리며 두려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게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대충 전세를 보아하니 이 정도로는 정파 무림인들이 무너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섰다. 아직 진 장로 등 최절정 고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아도 뻔했다.
볼 거 다 본 소천악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심 책사님! 아주 신명나게 한판 벌이고 있습니다."
"허허! 공에 눈이 어두운 이들의 말로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이번 접전이 끝나면 대주님을 불러 앞장서라 말할 겁니다."
"미쳤습니까? 앞장을 서게! 잘난 분들이나 가라 하시지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보나마나 사신단에서 요청할 게 뻔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황제에게 좋은 보고가 아니 갑니다."
우려 섞인 심자앙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는 소천악의 말이 이어졌다.
"애초부터 안 좋은 관계니 신경도 안 씁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돌아와서 명성에 크나큰 누가 될 게 확실합니다."
"명성은 무슨!"
"안 됩니다. 이제 대주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책사는 물론 흑마전 그리고 사마도의 거파와 함께 지내야 할 처지입니다."
"원래 인생은 혼자 가는 고독한 여정입니다."
코웃음을 치며 거부하려는 소천악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뺀 심자앙 수석책사였다. 그 화려한 말발에 넘어간 소천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걸로 토닥거리는 동안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흘러 낮부터 시작된 경계태세가 슬슬 무뎌질 즈음이다.
"대주님! 방금 포달랍궁과 정파인들의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래요? 결과는 어찌되었나요?"
"말도 마십시오. 정파나 포달랍궁이나 막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양측 모두 삼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혈투 중에 혈투입니다."
진저리를 치며 말하는 살수였다.
"흠. 많이 죽고 다쳤구려. 거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걱정된다는 듯 말하는 소천악의 말은 진심이 아니다. 내심 고소해 죽을 지경인 걸 애써 감추며 연기를 보였다. 그 마음을 짐작하는 이는 오로지 심자앙 수석책사 외에 딱 한 명이 더 있을 뿐이다. 어느 정도 소천악의 마음을 짐작하는 종천리 혈살막주였다.
안색 하나 안 변한 소천악을 보며 두 사람은 내심 섬뜩함을 수시로 느꼈다.
살수의 보고에 사존맹의 요문탁 당주와 집마부의 지공타 대주도 절로 몸이 떨려왔다. 사실 정파의 고수들이 약하지 않다는 건 그들이 더 잘 알았다.
자신들과 붙는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평가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불리할 확률이 높다는 걸 머리는 부인해도 가슴에서 어느 정도 공감하는 처지였다.
그런 그들이 고전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포달랍궁의 전력이 강하다는 말이었다.
"일단 싸움은 정파의 미세한 승기를 바탕으로 밀어붙여 포달랍궁이 오늘은 일단 물러간 거로 일단락되었습니다만……."
"그래서요?"
겉으로는 걱정스럽게 내심으론 더 싸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묻는 소천악이다.
"내일이나 모레 다시 한 번 공격할 낌새가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이번에 공격한다면 더욱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습니다. 정파의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정파인들이 엄청 고생하는군요.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연출하는 그를 보며 심자앙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올 지경이지만 겨우 입을 열었다.
"대주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제 곧 보나마나 정파 무림인들과 사신단에서 우리에게 선봉에 서라고 이야기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