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8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81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의 강호행에 엄청난 장애가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희한하게 왕자가 꼭 자신이 고생길에 접어든 나이와 똑같은 나이라는 게 영 안 내켰다. 그렇다고 함부로 거절했다간 건성제의 불호령이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한동안 고심하던 그가 절충책을 찾아 건성제에게 말했다.
"황공하오나 황제 폐하, 첫 번째 천축호위는 가능하오나 두 번째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사옵니다. 어찌 강호에 협객의 이름을 둔 자로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일에 끼어들겠사옵니까? 황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단칼에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뜻을 비치는 소천악을 보고 건성제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악관필 대장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다음 벌어질 일을 안 봐도 뻔히 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격노한 건성제의 외침이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네 이놈! 감히 황제인 내 명을 어기려 하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네놈을 당장 능지처참하리라."
"폐하! 차라리 그 나라 국왕을 죽이라면 몰래 숨어들어 가 죽이겠습니다. 하나 사내대장부가 창피도 모르고 어린아이를 납치하라니 그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합니다."
받아치는 소천악의 말투에는 당당함이 배어나왔다. 그의 성격상 싫은 건 싫은 거다.
"네놈이 지금 감히 황제의 뜻을 어기려는 것이냐? 정녕 죽고 싶으냐?"
노기충천한 건성제의 일갈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소천악이다.
"죽이라는 황명을 내리시려면 내리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데 동의하겠나이까? 만약 그런 황명을 진정으로 내리시면 저도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강단을 보이는 소천악이다. 사실 황궁에 들어오면서 수신호위의 무공 수준을 가늠해 본 결과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발현된 오기였다. 이미 그의 내심은 배알이 뒤틀려도 한참 뒤틀려 있었다.
"이런 무엄한 놈!"
"무엄은 무슨 무엄입니까? 내가 죽으면 세상도 없는 법입니다. 죽는 판에 뭐가 두렵고 무슨 예법이 필요합니까?
막말로 황제 폐하가 절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면 저기 있는 은잠자들이 절 죽이려 하겠지요.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저들이 비록 절정고수라 하지만 저들로는 절 죽이지 못합니다. 그 다음은 제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이런 황당한 일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건성제를 보며 한술 더 뜨는 소천악의 기세는 살기등등했다.
"거짓말 같으시면 명을 내리시지요. 그 다음은 밀위무사가 모조리 죽는 꼴을 보실 겁니다. 세상에는 많이 가진 자가 더 두려운 게 많은 법입니다. 왜냐하면 지켜야 할 게 너무나 많아 늘 불안한 법입니다. 하나 저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지킬 것도 없는데 뭐가 불안하고 뭐가 두렵겠습니까?"
말하는 소천악의 눈가에 시퍼런 안광이 줄지어 뿜어졌다. 그 기세에 방 안의 모든 사물이 얼어붙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가공할 기세였다. 옆에서 바라보던 대장군마저 흠칫한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검에 손이 갈 정도였다.
하물며 무공을 전혀 모르는 황제는 전신에 심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제왕의 품격으로 겨우 이겨낸 그가 이를 악물고 씹어뱉었다.
"네놈이 그리 무공과 입담에 자신이 있단 말이냐?"
"최소한 저기 숨어 있는 분들의 목을 가져다 바칠 경지는 넘어섰다고 판단되옵니다."
"어허, 감히 황제의 밀위를 이리 평가하는 하룻강아지가 있을 줄이야. 좋다, 어디 네놈이 자부하는 무공을 보자꾸나."
"황상께서 원하신다면 어찌 거부하겠사옵니까? 명을 내리십시오."
잔뜩 도전적인 말투를 구사하며 소천악은 건성제의 비위를 사정없이 건드렸다. 어차피 이 대목에서 한번 보여줘야 나중에 생길 후환을 조금이나마 막으리란 판단이다. 확신을 더한 건 혈사부의 조언도 같은 말이란 것이다.
"밀위는 들어라! 저놈에게 황궁의 위엄과 뜨거운 맛을 보여주어라."
"존명! 밀위 사호는 저놈의 방자한 입을 찢어버려라."
외침과 함께 천장에서 한 명의 복면인이 마치 제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소천악의 면전에 섰다. 얼핏 봐도 절정의 반열에 들어선 듯 태양혈이 불쑥 솟아나 그 기세를 대변했다.
소천악이 일견해 본 결과 그 무공수위는 흑마전주와 비슷한 경지로 보였다. 아직 일 갑자가 채 안 되는 내공을 지닌 절정 초입 정도의 무사였다. 그의 손에는 시퍼런 광망을 뿜어대는 검이 피를 그리워하듯 들려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한 얼굴로 바라보던 소천악은 건성제에게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저는 강호에 나온 이래 제게 검을 들이댄 분들을 살려둔 적이 없습니다. 죽여도 되겠습니까?"
"허, 저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오냐, 네놈 실력이 된다면 마음대로 해보거라."
어이없다는 듯 쏘아대는 건성제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인 소천악이 복면인에게 스산하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시구려. 아무리 황천길이 멀다 하나 재수 없으면 바로 지척임을 보여드리지요."
"이런 미친놈이!"
비아냥거림에 잔뜩 화가 난 복면을 쓴 밀위가 바로 초식을 전개했다. 일 장여를 슬쩍 떠올라 검을 휘두르는 그의 검세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검은 수직으로 찔러오는 듯하더니만 어느새 변초되어 사방으로 차가운 검광을 뿜어내며 소천악의 전신을 짓이길 듯 밀려왔다.
"그 정도론 아직 아니 되오이다. 자, 이제 갈 시간이오."
차갑게 외친 소천악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런 연기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쏜살같이 다가오는 시퍼런 검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금의 미동도 일지 않았다.
막 검이 그의 몸을 도륙내려는 순간 이미 그는 연환구구탈백보로 좌측으로 일 장여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손을 섬전처럼 찔러댔다. 쾌수식(快手式)이었다.
단조로운 듯하지만 직선으로 뻗어가는 손에는 주위의 공기조차 숨을 죽일 만큼의 기세가 서려 있었다.
"헉, 이런 권이!"
놀란 밀위가 급히 경공술로 몸을 날려 회피하려 했으나 권은 한 치의 사정도 보이지 않고 심장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커헉! 이런 무례한."
숨이 지기 직전에 그는 황제 앞에서 거침없이 살인하는 소천악의 오만방자함을 지적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디차가웠다.
"이미 허락을 구했소이다. 잘 가시구려."
방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적막이 감돌았다. 건성제와 악관필 대장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에 심히 놀랐고 천장에 은잠한 채 바라보던 밀위들도 경악했다. 밀위 중 아무도 방금 죽은 밀위를 저리 손쉽게 해치운다고 장담할 이는 없었다. 게다가 검도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절정을 넘어선 고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복수심과 놀라움이 동시에 나타났다.
악관필조차 절정을 훌쩍 넘어선 듯한 소천악과 자웅을 결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자신한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내의 경악을 뒤로하고 창졸간에 한 사람의 밀위를 해치운 소천악이 건성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더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더 해봐야 밀위를 새로 구해야 하는 번거로움만 있을 듯하옵니다만!"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건성제는 불같이 노기가 치밀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욕심이 났다. 저런 무위를 가진 자를 자기 측근을 만든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듯한 마음이다.
정신을 차린 건성제의 눈에는 군림하는 자의 탐욕이 그득했다. 하나 군주의 위엄으로 마음을 다스린 건성제가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놀랍구나. 그 무공이면 내 명을 별 문제 없이 충실히 수행할 듯하구나. 이제부터 여러 소리 하지 말고 짐의 말을 따르라. 그러면 밀위를 죽인 건 없던 일로 해주고 부귀영화를 자손 대대로 누리게 해주마."
건성제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 소천악이다. 막말로 제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내일을 모르는 게 인간사인데 자손의 부귀영화 운운하는 말이 가소로웠다. 물론 대답하는 그의 말투에는 이런 마음은 쏙 빠진 채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린아이 납치 같은 명은 받들 수가 없사옵니다. 그리고 밀위와는 정당한 대결 끝에 일어난 일이옵고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네놈이 정녕 황명을 업신여기겠다는 것이냐?"
"사내대장부로 합당한 일이라야 황명도 받들지요. 전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합니다만 이건 아닙니다. 사내대장부로서 명예를 지키게 해주십시오."
당당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보며 건성제는 같은 남자로서 사내대장부의 기상을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공은 공, 사는 사였다. 이 자리는 어쩌면 황제의 위엄을 세워야 하는 막중한 시간이다. 호감 하나만으로는 절대 넘어가기 힘든 일이다.
"짐의 명은 하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잔소리 말고 명을 따르라."
"아니, 이런……."
거듭되는 명에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소천악에게 얼른 말을 돌리는 건성제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대장군에게 듣거라. 내 하루의 시간을 특별히 주겠노라. 과연 그 후에도 감히 짐의 제안을 거부하는지 보겠노라. 가봐라."
"네, 황은이 망극하여이다. 신이 잘 말해서 명을 따르게 하겠나이다. 황제 폐하!"
"알겠소. 대장군만 믿겠소."
엉겁결에 인사를 한 악관필이 소천악을 거의 끌다시피 황궁을 나와 대장군가로 함께 갔다.
대장군 집무실로 들어선 악관필이 다짜고짜 험악한 얼굴로 다그쳤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감히 황제를 능멸할 발칙한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이. 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네."
"네, 그게 무슨 말인지? 저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만……."
찔끔한 소천악이 필사적으로 비장의 무기인 오리발을 내밀며 이 위기상황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으나 악관필은 코웃음을 쳤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더구먼. 내 저번에 자네를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네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감히 황제 폐하께서 내린 명을 거역하려 하다니. 내 옆에서 보니 격노한 황제 폐하가 금방이라도 쳐 죽일 기세였다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어떻게 어린아이를 잡아 올 수 있습니까? 전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제 말은 똑같이 나왔을 겁니다."
죽어도 굽히지 않겠다는 기상을 철철 풍기는 소천악을 한동안 바라보던 악관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어쩐지. 악천소 놈이 자기 형 살려야 한다고 울고불고 난리치며 단식투쟁까지 하더니만 역시 우리 아들놈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구먼. 말이야 맞는 말이지. 어찌 대장부가 되어서 어린아이를 납치한단 말인가!"
"……."
소천악은 할 말을 잊었다. 악천소 그놈이 그렇게까지 자기를 생각해 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자신의 이기심이 약간은 걸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생 하나는 잘 구했다는 흐뭇함도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일단 이건 알게. 황제는 자신의 말을 거역한 자네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내가 아는 황제는 지극히 비정하고 독심을 가진 분이야. 한마디만 충고해 주지. 일단 황제의 명을 승낙하게나. 일이란 게 하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이리 융통성이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