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13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5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13화
“나쁠 것도 없어. 그놈이 우리 대신 싸워줄 테니까.”
최소한 저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효용가치는 충분했다.
“그보다…… 장천운이 조금 전에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유가 머뭇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가 정확히 봤습니다. 저 역시 의문을 품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런 말을 안했느냐?”
“확실한 것을 알고 난 후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정유.”
“예, 총사.”
“네가 군사로서 소성주를 따라가라.”
정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가요?”
“너는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군사다. 내가 믿고 모든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지. 그런데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어.”
“…….”
“경험. 실전의 경험이 부족해. 이번 기회에 그 부족한 부분을 메워봐라.”
***
사밀령 사령주 초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래 전에 다친 눈두덩에서 열이 나는 듯했다.
눈앞에 장천운이 서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한 획을 그어준 놈이.
물론 눈두덩에도 저놈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뭐가 그리 좋은지 놈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꼭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다.
“칠 년만인가?”
장천운이 강련곡에서 나온 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남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이 먼저 피했다.
마주쳐봐야 열만 날 테니까.
그런데 이제는 자주 봐야 한다.
“벌써 그렇게 됐군요.”
“질긴 인연이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죠.”
“과거 동료들을 죽인 우리를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군.”
“사실 그 일은 가슴이 많이 아프죠. 그래도 제가 제일 싫어하는 놈에게 복수를 해주셨지 않습니까?”
담담히 말하는 놈의 눈빛이 차갑다. 아직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서 잊지 못한 듯하다.
하긴 자신이라 해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군.”
“다만…… 저에게 잘해주었던 분들이 돌아가신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그럼 그렇지. 저 자식이 그때 일을 잊을 리 없다.
얼마나 독한 놈인데!
힘도 없는 어린놈이 자신의 이마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자국을 남기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 그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군요.”
‘이 개자식이!’
한순간 이성을 잃고 눈을 치켜떴다.
옆에 서 있던 이령주 전이산이 슬쩍 눈짓을 보내고, 삼령주 백오가 소맷자락을 잡지 않았다면 죽든 살든 한판 벌였을 텐데…….
장천운은 초광에게서 시선을 떼고 일령주 위곤을 바라보았다.
초광과 농담처럼 이야기 나눌 때와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깊고 깊어서 무심하게 느껴지는 눈빛.
“총사께 들으셨을 겁니다. 이제부터 소성주의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따라주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그렇게 하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도 오늘 이전까지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나도 약속을 지키지.”
“고맙습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장천운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자신도 얼마 전 우문각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결과가 좋진 않았지만.
그나마 자신은 그런 질문을 받아도 할 말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물론 그런 질문도 아니겠지만.
“그러시죠.”
“공손백을 이길 자신이 있나?”
천은방이 아니라 공손백과의 승부를 묻는다.
이번 전쟁의 내면에 도사린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
장천운으로선 차라리 그게 편했다.
“마음만 일치한다면 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 역시 그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네.”
개인이 아닌 ‘우리’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하다.
“이유를 알아도 되겠습니까?”
“간단하네. 사밀령의 무사들은 구천성의 다른 무사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오랜 세월 형제처럼 지냈네. 그런데 지난 일 년 사이에 그가 우리 형제 열둘을 잡아 죽였네. 아주 은밀하고, 처참하게. 그 바람에 저쪽 감시선이 거의 다 끊어졌지.”
“거의 다라…… 전멸한 것은 아니란 말이군요.”
“항상 최후의 선은 남겨놓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싸움이지.”
“아무리 피해가 커도 말이죠?”
“이해가 빠르군.”
문득 왕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위곤과 무척 잘 어울릴 듯했다.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왜 연락이 없지?’
48장: 귀독마종(鬼毒魔宗)
막부산 동쪽 줄기, 호남과 강서 사이에 있는 깊은 산중.
아직 봄이라 하기에 이른 어느 날, 망태기를 둘러맨 약초꾼 하나가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어 산중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줄근한 옷차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각형의 기다란 얼굴, 각진 턱. 그 턱에 매달린 염소수염이 바람에 흔들린다.
얼굴 가득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표정의 약초꾼. 그는 특명을 받고 구천성을 떠나온 왕규였다.
‘지미, 이게 무슨 꼴이야? 미친놈 찾는데 벌써 한 달이나 지났잖아?’
보름이면 찾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지금쯤 자신의 연락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좀 더 가까이 가볼까?’
귀독마종이 거처를 세 번이나 옮겨서 찾는데 애를 먹었다. 겨우겨우 찾아낸 곳에 그가 없다면 헛고생만 한 셈이 된다.
‘그래, 그 미친놈은 내가 누군지도 모를 거다.’
왕규는 자신감을 북돋고 나무 뒤에서 나왔다.
장천운은 귀독마종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 정도에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귀독마종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한 곳에서 석 달 이상 머물지 않았다. 구천성에 연락을 한다 해도 사람이 오는 동안 또 거처를 옮길지 모를 일이다.
‘일단 제압해놓고 기다리는 거야.’
그가 아는 귀독마종은 무공 수준이 잘해야 일류에 턱걸이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는 자신을 당할 수 없다.
자신이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문제는 독인데…… 자신에게는 독왕의 천하제일해독제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뭐가 무서워?
아무리 무서운 독쟁이도 독만 빼면 별 것 없다.
‘독을 쓸 시간도 주지 않고 혈도를 점해서 꼼짝 못하게 하면 돼!’
산골 마을은 모두 삼십여 호쯤 되었다.
집은 산자락을 따라 지어져 있었다. 개중에는 통나무로 지은 집이 가장 많았고, 돌과 흙을 쌓아서 지은 토가도 대여섯 채 정도 되었다.
마을은 대낮인데도 한산했다. 어른들은 일하러 나간 듯 간간이 아이들만 두엇 보였다.
마을 전체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왕규는 바위 뒤에 앉아서 집을 한 채 한 채 살펴보았다.
‘귀독마종이 사는 집이라면 다른 식구가 없을 거야.’
게다가 그는 집이 밀집해 있는 곳보다 구석진 곳에 있는 집을 선호할 것이다.
귀독마종이 살만 한 집이 빠르게 좁혀졌다.
반 시진쯤 지나자 의심 가는 집이 다섯 채로 줄어들었다.
모두 산자락 끝에 있는 집이다. 낡은 통나무집이 세 채, 토가가 두 채다.
왕규는 그 다섯 채의 집을 한참 더 바라보았다.
들락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도 한 채 뿐이었다.
‘빈집인가?’
그 사이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중은 밤이 빨리 찾아온다. 아무리 남쪽이라 해도 산중의 겨울밤은 무척 춥다. 따뜻하다 추워지니 더 춥게 느껴진다. 사추리가 얼어붙어서 부서질까 겁날 정도다.
왕규는 쪼그리고 앉아서 추위에 떨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석양이 질 무렵,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서던 왕규는 흠칫하며 좌측을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장작더미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열두어 살쯤 될 듯했다. 햇살에 탄 갈색피부, 얼굴에 땟물 흐른 자국이 선명한 전형적인 산촌의 아이였다.
그는 소년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다.
“이 마을에 사느냐?”
“예.”
“여기가 풍촌이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얼버무리던 왕규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소년에게 물었다.
“꼬맹아, 혹시 말이다, 저쪽에 있는 집들, 빈집이냐? 곧 어두워질 것 같아서 하룻밤 지내고 갈 생각이다만.”
소년이 왕규를 빤히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응?”
왕규가 눈을 껌벅이자, 소년이 손바닥을 보이며 흔들었다.
공짜는 없다는 뜻.
생긴 모습은 산촌 소년이지만, 하는 짓은 합비의 닳고 닳은 여우새끼들과 다를 게 없다.
‘세상 말세군. 어쩌다 이런 촌구석 꼬맹이들까지 돈맛을 알게 되어서…… 쯔쯔쯔.’
어쨌든 아쉬운 사람은 그였다.
품속을 뒤적거린 그는 동전을 하나 꺼내서 소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귀여워서 주는 거니라. 큰 마을에 나가면 이걸로 전병이라도 사 먹어라.”
동전을 챙긴 소년은 해맑은 웃음을 짓고는, 손가락으로 다섯 채의 집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통나무집들은 천장이 썩어서 비어 있고요, 저 집은 노망난 뻐드렁니 할머니가 살아요. 그리고 큰 나무 뒤에 큰 토가 보이죠? 그 집에는 저번 달에 들어온 당 할아버지가 살고 있어요.”
동전의 효과는 확실했다.
왕규는 더 이상 세상 탓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세상은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다. 얼마나 정겨운 거래인가.
‘성이 당씨면 귀독마종이 분명해.’
아니라면 땅에 떨어진 금덩이 줍다가 길 가던 마차에서 튄 돌에 맞아 뒈진 것만큼 재수 없는 일이다.
“허허허, 고맙다.”
“근데 조금 이상한 할아버지에요,”
“뭐가 말이냐?”
“다른 사람들은 약초나 먹을 수 있는 걸 가져와야 좋아하는데, 그 할아버지는 사람이 절대 먹을 수 없는 걸 더 좋아해요. 그리고 그런 걸 가져오면 돈을 주죠.”
아무래도 이 순박한 산골 꼬맹이에게 돈맛을 가르친 사람이 귀독마종인 듯하다.
“한번 만나보실래요? 괴팍하긴 해도 하룻밤 정도는 재워주실 거예요.”
화들짝 놀라서 ‘안 돼!’라고 하려던 왕규가 멈칫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데?’
귀독마종은 자신을 모르잖아? 무공도 자신이 더 세고.
함께 지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창평과 뇌혈산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만나볼까?”
“제가 가서 말씀드릴게요. 저와 친하거든요.”
소년이 활짝 웃으며 손을 척 내밀었다. 계산이 확실한 놈이었다.
***
토가는 진흙과 갈대조각을 버무려서 벽을 쌓았다.
한 자 이상 두께로 쌓아서 완성된 토벽은 겨울에는 추위를, 여름에는 열기를 막아주었다.
별다른 도구가 없어도 노력만 하면 만들 수 있고, 통나무집처럼 썩지도 않았다.
내구성도 보기보다 튼튼해서 어떤 곳에는 수백 년이나 된 토가도 있었다.
때문에 산골 사람들은 근처에 좋은 흙만 있으면 토가 짓는 걸 선호했다.
그런데 귀독마종으로 의심되는 자가 기거하는 토가는 일반 토가보다도 커서 벽의 두께가 두 자나 되었다.
‘저 늙은이인가 보군.’
왕규는 입구의 문틈 사이로 안쪽을 슬쩍 살펴보았다.
소년이 등을 돌린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카락, 헐렁한 장포. 등을 돌리고 있어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벽에 걸쳐진 나무에는 말라비틀어진 온갖 물체들이 걸려 있었다. 구석진 곳의 화덕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뭔가를 달이는 듯 화덕 위에 올려놓은 단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 때문인지 문틈으로 매캐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흠칫한 왕규는 숨을 멈추었다.
다행히 독은 아닌 듯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깜짝 놀랐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 귀독마종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상한 냄새면 무조건 독처럼 느껴졌다.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소년이 밖으로 나왔다.
“들어오세요. 하룻밤 재워주신데요.”
“허허허, 고마운 분이구나.”
왕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미지의 독구덩이 속으로 발을 디뎠다.
그런데 왜 이리 등에 땀이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