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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77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0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77화

 

  가시 돋친 현비량의 말에 빙긋 웃음지은 소천악이 대답했다.

 

  "그건 당신 생각이시고 난 다르오. 어떤 살수집단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겠소? 다 청부자가 있어서 하는 거 아니겠소?"

 

  "후후, 그건 절대 말하지 못할 비밀이오."

 

  "그거야 차차 겪어보면 될 일이지요. 그나저나 천장에 계신 분이 당신보다 더 화후가 높은 듯하니 이건 또 무슨 경우요?"

 

  소천악의 말에 현비량은 물론 천장에 숨어 있던 진정한 혈살막주인 종천리(鍾天理)가 화들짝 놀랐다.

 

  절정고수라고 자부하던 자신의 흔적을 찾아낸 것도 놀라운데 자신의 무공 수위마저 한눈에 알아보는 소천악의 안목에 절로 식은땀이 나왔다. 더 이상 숨어 있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종천리가 웃음을 내보이며 사뿐하게 탁자 위에 내려섰다.

 

  "하하, 놀랍구려. 소협의 진신무공이 이리 놀라우니 오늘 우리 혈살막은 길보다 흉이 더 많은 듯하오이다."

 

  "후후, 그거야 대화를 해가다 보면 결정이 나겠지요. 아시는지 모르지만 전 적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 위인이 아니오. 부디 좋은 관계로 남길 바라오."

 

  갑자기 차가워진 소천악의 말투에 절로 긴장감이 올라가는 종천리였다.

 

  "만약 내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후후! 제발 그 선택을 안 하시길 바라오. 정 그렇다면 얼마 후엔 혈살막의 개미 새끼분 한 마리께서도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울 거요."

 

  신의괴협이란 위명을 익히 알고 있는 종천리로서는 살 떨리는 협박을 들어야 했다. 물론 그 말이 실천되리라는 건 알았다. 거절하면 소천악을 죽이든지 아니면 혈살막이 멸문을 당하든지 그 이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쉽게 청부자를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비밀엄수는 살수계가 암암리에 인정한 불문율이다. 잠시 고민하던 종천리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소협과 우리는 공존하기 어려울 듯싶소. 다른 거라면 몰라도 그건 밝힐 수 없소이다."

 

  거절의 말을 전하자 소천악의 눈가가 사납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정녕 벌주를 마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말해도 내 대답은 하나이오. 청부자는 말할 수 없소."

 

  단호한 종천리의 말에 막 발작하려던 소천악이 잠시 멈칫했다. 멀리서 느껴지는 인영들의 움직임이 귀에 잡혔다. 그들의 목적을 짐작한 채 피식 미소를 짓던 소천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후! 그렇소이까? 그나저나 오늘 혈살막에 손님이 많이 오실 모양입니다. 멀리서 한가락 하시는 고수님 수십여 분이 이리로 급하게 달려오시는데요."

 

  딴 세상 이야기하듯 말하는 소천악의 말에 안색이 급변한 종천리 막주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적에게 친절하게 말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좌우간 이 한밤중에 호의를 가지고 이리로 오는 건 아닌 거 같으니 전 이만 멀리 떨어져서 구경이나 해야겠소이다."

 

  "아니, 그게!"

 

  황당한 말에 어리벙벙한 종천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소천악이 조용히 말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면 부르시죠. 그럼 이만."

 

  말과 동시에 번뜩인 소천악의 신형은 어느새 자취 없이 사라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황당한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소란스런 소리가 정문 쪽에서 들려왔다.

 

  "적이다! 막아라!"

 

  "모두 쓸어버려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우렁찬 고함에 이어 비명이 밤하늘을 온통 뒤덮어갔다. 종천리의 안색이 급변하며 빠르게 검을 빼 들고 방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장원 안은 아수라장이다. 검은 복면을 한 수많은 무인들이 거침없이 밀려 들어왔다. 한밤의 기습에 혈살막의 살수들도 손 놓고 기다리진 않았다. 신속하게 검 등 자신의 애병을 들고 복면인과 맞서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고함치며 밀려가는 혈살막의 살수들의 기세도 보통은 아니었다. 검끝에 일렁이는 살기가 밤하늘을 가르며 섬뜩하며 복면인들의 목숨을 노려갔다.

 

  일검필살의 살수검법이었다. 생사를 도외시한 동귀어진 수법은 악랄하게 복면인의 목숨을 노리고 빛살같이 뻗어갔다.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하나 복면인들은 결코 종이호랑이가 아니었다.

 

  일류고수 중에서도 그 성취가 남다른 고수들로 구성된 그들은 방어를 무시한 살수검을 맞아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검을 유연한 보법으로 슬쩍 피하며 번뜩이는 검으로 심장을 노려왔다.

 

  "크악! 빌어먹을."

 

  복면인들도 전부 무사하지는 못했다. 간헐적으로 비명이 터져나오며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벌써 세 명이 악랄한 살수검에 찔려 즉사했다.

 

  하지만 살수들의 피해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불과 세 명의 적을 죽이는 사이에 십여 명의 살수가 검에 베여 입으로 피분수를 뿜으며 죽어갔다. 오랜 살수 수업 탓에 비명 없이 죽어가는 그들의 최후는 침묵이 오히려 섬뜩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백여 명의 살수 중 찰나에 십여 명이 죽어나가자 살수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아무리 봐도 길보단 흉이 많은 날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한 그들이다.

 

  "멈춰라!"

 

  고함이 갑자기 들리며 종천리 막주가 싸움판 한가운데로 내려섰다. 소리에 주춤한 살수들이 얼른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었다.

 

  "후후! 드디어 막주가 친히 나선 것인가?"

 

  한 복면인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종천리는 분노에 이글거리는 안광을 뿌리며 물었다.

 

  "도대체 왜 우리를 공격하는가? 청부에 실패한 것이 죽을 만큼 중한 죄인가?"

 

  이미 복면인들의 정체를 파악한 종천리 막주는 분노의 일성을 날렸다. 하지만 억장이 무너지는 아픈 소리를 들어야 만했다.

 

  "몰라서 묻는가? 삭초제근이지. 후환이 될 일은 아예 싹수부터 잘라야 하는 법! 여러 소리 하지 마라. 오늘부로 혈살막은 강호에서 영원히 지워진다."

 

  "감히 네놈들이 우리 혈살막을 지워?"

 

  "혈살막이 그리 대단한가? 웃기지 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북망산이 바로 코앞에 있음을 왜 모르는가?"

 

  복면인은 자신만만했다. 혈살막이 비록 무서운 살수막이지만 정체를 드러낸 상태에서는 별로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감히!"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종천리 혈살막주를 보며 복면인이 차갑게 지시했다.

 

  "뭐 하느냐? 어서 혈살막을 멸문시켜라."

 

  "존명. 모조리 죽여라."

 

  복면인들은 잠시 멈췄던 검을 다시 움직이며 혈살막 살수들을 압박해 갔다. 살수들도 상황이 어려움을 알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당장 찾을 수 없어 오로지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검을 마주쳐 갔다.

 

 

 

  복면인들의 검은 처음부터 살려둘 의도는 아예 없이 지독한 살수를 전개했다. 직선으로 뻗어오는 검끝에 서늘한 살기가 느껴지는 광폭한 검초였다. 혈살막 살수들은 이를 악물고 살수 특유의 동귀어진 수법으로 대응해 갔다.

 

  의지가 같으면 다음은 무공실력이다. 아무래도 살수 교육만 받은 살수들은 정면대결이 되자 이내 약세를 드러내며 피를 토했다.

 

  "크아악!"

 

  드디어 살수들의 입에서 연이어 비명이 터져나왔다. 평소 교육받은 대로라면 비명 없이 죽어야 하지만 절박한 상황이 이어지자 교육보다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우선이었다.

 

  바라보는 종천리 막주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아무리 봐도 살아 가기는 어려울 성싶었다. 복면인들의 기세를 보니 자신조차 감당할 자신이 점점 사라져갔다.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마침내 한 복면인의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모두 죽여라! 후환을 남기면 안 된다."

 

  익숙한 음성에 귀가 번쩍 뜨이는 종천리 막주였다. 순간 전에 청부하던 한 남자가 생각나자 그의 이가 세차게 갈렸다.

 

  "이런 살인멸구를 노리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사방이 울리는 쩌렁쩌렁한 고함에 살짝 고개를 돌린 복면인은 피식 웃었다.

 

  "내 살다 살다 살수 놈들이 하늘 타령하는 꼴도 다 보는구나. 네놈들이나 하늘을 무서워하거라."

 

  서늘한 비아냥을 던져주던 복면인은 앞에서 달려오던 살수 한 명을 대각선으로 그었다. 몸을 파고드는 검날에 순간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살수 한 명의 생이 꺼져갔다. 바라보던 종천리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극도로 분노한 그가 막 발작하려는 순간 귓가로 작지만 힘이 실린 전음이 들렸다.

 

  [쯧쯧. 아주 박살이 나는구려. 어떻게 생각이 바뀌지 않았소이까?]

 

  흠칫한 종천리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상대는 신의괴협이란 게 떠오르자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는 정이 들어 혈육 같은 수하들이 짚단처럼 쓰러져 숨을 거두는 모습에 이미 그의 눈은 뒤집혔다.

 

  [좋소이다. 도와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겠소이다.]

 

  [후후! 진작 이랬으면 수하들의 희생은 없었을 것이외다.]

 

  전음이 들리는가 싶더니만 귀청을 진동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멈추어라!"

 

  얼마나 소리가 큰지 검을 든 복면인과 살수들의 손이 진동할 지경이다. 깜짝 놀란 양측이 고개를 돌려보는 순간 눈가에 놀라움이 잔뜩 피어났다.

 

  이십여 장이 넘는 나무 위에서 한 인영이 마치 평지를 걷듯 부드럽게 경공술을 발휘하여 접전장으로 느릿느릿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야말로 착시현상이라는 듯 느려 보이지만 삽시간에 이미 싸움판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바쁘게 싸우시는데 방해해서 미안하오. 난 남들이 신의괴협이라 부르는 소천악이라 하외다."

 

  "헉! 검사권생!"

 

  놀란 복면인들의 경악성이 흘러나오며 긴장감을 감추지 않았다.

 

  놀라운 명호였다. 강호무림에 어느새 대명이 자자한 인물이 자기들 눈앞에 서 있자 약간의 당혹감마저 드러냈다.

 

  특히 놀란 건 복면인들을 이끄는 조장이다. 복면에 가려진 그의 안면 근육이 정신없이 꿈틀거렸다.

 

  "자자! 아시다시피 검사권생이 내 신조이외다. 이제부터 셋을 센 후 검을 들고 덤비는 분들은 모조리 황천길로 보내드리지요. 남아일언 중천금이니 저도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지켜야지요."

 

  "이런 괘씸한 놈! 감히 우리를 뭐로 보고!"

 

  조장이 분기에 차 소리치자 소천악은 힐끗 보며 냉소를 흩뿌렸다.

 

  "꼭 보면 귀하 같은 분들이 가끔 있소이다. 죽기 전에 한 소리 하시는 걸로 인정하고, 자, 시작합니다. 셋을 센 후 무기를 드신 분은 삶이 귀찮은 분이라 생각하고 바로 보내드리죠. 하나, 둘, 셋."

 

  빠르게 숫자를 센 소천악은 성큼성큼 복면인들에게 다가섰다. 어느새 싸움판은 양쪽으로 갈려 복면인들은 동료끼리 모여 있었다. 그쪽을 향해 걷는 소천악의 걸음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쭉쭉 다가섰다.

 

  그 안하무인적인 행동에 슬슬 분기가 치민 조장이 소리쳤다.

 

  "다들 뭐 하느냐? 어서 저놈의 목을 베어라!"

 

  "존명!"

 

  명이 떨어지자 복면인 중 비교적 강해 보이는 이십여 명이 사방에서 날아올라 소천악에게 검을 들이댔다. 합격술을 익힌 듯 사방의 모든 방위를 점하고 밀려오는 검의 물결은 다가서는 거리만큼 천변만화하며 어지럽게 소천악의 시야를 흔들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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