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7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74화
내심 통쾌함에 웃음보를 겨우 막은 소천악은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대장군가에서 멀어져갔다. 악천수를 향한 흉수를 시원하게 단칼에 제거한 그는 기분이 날아갈 듯 개운했다. 의동생에게 나름대로 호의를 베푼 흐뭇함이 가슴에 가득했다.
이제 혈살막을 향한 증오가 다시 밀려오며 얼핏얼핏 눈가에 살기를 드러냈다. 자신을 노린 적을 용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편 아침이 되어서야 간밤에 크나큰 변괴가 있었음을 들은 악천수는 자세한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바로 뇌리에 소천악 형님을 떠올렸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용수철처럼 대장군가를 나와 객잔으로 향했다.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그는 세상모르고 자는 듯한 소천악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형님! 일어나시지요."
"왔냐?"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는 소천악을 보니 어이없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을 저지른 사람치고는 너무도 태연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형님, 너무 일을 크게 저지르신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냐?"
시치미를 뚝 떼는 소천악을 보며 다 안다는 듯이 악천수가 다그쳤다.
"형님이 벌이신 일이라는 거 다 압니다. 오늘 새벽 대장군가에서 이부인이신 금사란께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치 속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부르르 떨며 말하는 악천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소천악이 대꾸했다.
"영문을 모르겠구나. 금사란이라면 너를 괴롭히던 여인 아니냐? 음, 누군지는 몰라도 시원하게 일 처리했구나."
"형님!"
참다못해 고함을 치는 악천수를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응수하는 소천악의 말이 이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와 놓고 왜 소리는 치고 난리냐?"
"형님이 하신 거 다 압니다."
"난 모른다."
창문 밖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소천악이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건 누가 봐도 형님 이외에는 저지를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증거도 없이 이리 추궁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그를 보며 악천수는 할 말을 잊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이리 부인하시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이번 일은 제게 뭐랄까……."
말꼬리를 흐리는 악천수를 보며 소천악이 말했다.
"더 말해 봐라."
"증오와 고마움이 공존합니다. 이러는 걸 보니 저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어린놈이 골치 아픈 말을 다 하네. 한마디만 하마.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 이제 용건 끝났으면 가봐라."
"오늘은 이만 갑니다. 다음에 할 말이 많을 듯싶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방을 떠나가는 악천수를 보며 소천악이 중얼거렸다.
"그 녀석 참! 인생 힘들게 살려 하네."
잠을 완전히 깬 소천악은 천천히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서서히 여장을 꾸리고 황도를 떠나는 걸 바라본 밀위는 소리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는 만리추적향으로 소천악의 행적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대장군가의 일을 살짝이나마 볼 수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밀위는 바로 주청령 황녀를 찾아갔다.
"황녀 마마! 명하신 것에 대한 모든 걸 알아왔습니다."
"그래, 수고했구나. 어서 말하거라."
밀위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소천악의 신상내력을 남김없이 이실직고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청령의 안색이 시간이 갈수록 환해졌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경우였다. 여색만 밝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협객이라니 귀로 들으면서도 쉽사리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지금 네가 한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렷다?"
"물론이옵니다. 정보수집에 만전을 기한 일이라 틀릴 이유가 없사옵니다."
"좋다, 물러가도 좋다. 여기 이건 이 일에 대한 포상이니라.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해야 할 것이니라. 실수하면 너와 네 가족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야."
발치에 던져준 건 새끼 손가락 만한 묘안석이다.
"황녀 마마의 마음에 속하 진심으로 감복하옵니다. 소인의 입은 이미 굳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사옵니다."
다시 한 번 바닥에 고개를 깊이 숙인 후 밀위는 소리 없이 묘안석을 들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든 주청령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협객이라! 호호, 이건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경우네. 오냐, 이놈! 아주 고통스럽게 인생을 보내게 만들어주마."
즐거운 듯 말하던 그녀는 때맞춰 밖에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황녀 마마! 지금 황제 폐하께서 이리로 오신다는 기별이 왔사옵니다."
"폐하께서?"
"네, 그러하옵니다. 곧 도착하리란 전갈이 방금 도착했사옵니다."
"알겠노라!"
일이 생각보다 빨리 풀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서둘러 화장을 고치는 주청령이다. 일각이 채 안 지날 무렵 황제의 행렬은 어느새 황녀궁에 도착했다.
당제국의 건성제!
어려서부터 총명한 데다가 타고난 부동지심을 가진 철혈의 황제였다. 기라성 같은 노신들도 그 앞에 서면 오금이 저려온다는 무서운 군주였다. 그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주청령에게 다가왔다.
"잘 있었느냐?"
"네, 폐하의 성은 아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들으며 건성제와 주청령은 몇 번의 겉도는 이야기를 의미 없이 주고받았다. 그 후 바로 건성제의 용건이 나왔다. 사실 건성제는 어릴 때부터 누이인 주청령의 지혜에 탄복을 거듭해 온 터라 오늘도 어려운 국정을 의논하러 온 길이다.
"청령아! 이제 조금 편하게 이야기하자꾸나. 실은 고민이 있어 너와 의견을 나누고자 왔느니라."
"무엇인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지요."
"그래, 그렇게 말하니 고맙구나. 고민은 다름이 아니라 이제 얼마 안 지나 천축으로 사신단을 파견하기로 했느니라. 나라끼리 친교도 다지고 천축 각 나라와 교역을 통해서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는 원대한 꿈이 실린 사신행이니라. 이에 따라 특별히 황문시랑(黃門侍郎) 관무평(關武平)이 사신으로 임명되었느니라. 어차피 가는 길에 대형상단도 함께 보내 재정에 도움을 주려 하는데 그 길이 워낙 멀고 험한 문제점이 있구나. 마땅히 호위행렬을 구성해야 하는데 과연 어떤 규모로 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실로 어렵구나. 현재로선 무당파 등 정파 무림인들이 도와주기로 했다만 확실히 믿을 만한 내 사람이 없어 걱정이야."
"믿을 만한 인재라뇨?"
의아한 듯 반문하는 주청령의 질문에 황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절대적으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해. 그래야 사신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리 정파 무림인들이 도와준다 해도 조정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약간은 우려되는구나."
가만히 오라버니인 건성제의 말을 듣던 주청령의 눈이 반짝 빛나며 입이 서서히 미소로 물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건성제는 혹시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인가 하여 말문을 닫고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폐하! 제가 마침 폐하의 수심을 덜어줄 마땅한 인물을 알고 있사옵니다. 상당한 무공과 명성을 지닌 자이옵니다."
"오호, 그게 사실이냐? 도대체 그자가 누구냐?"
반색을 하고 반문하는 건성제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했다. 어려서부터 그 총명함이 비범한 동생의 말이라니 더욱 신뢰감과 기대감이 들었다.
"신의괴협이라 불리는 자이옵니다. 강호상에 이미 소문이 자자하옵고 무공과 협기가 충천하다 하옵니다. 게다가 소녀와 약간의 친분(?)도 있사와 잘만 설득하면 폐하의 고민이 일시에 걷힐 거라고 사료되옵니다."
"그런 인물이? 하하! 역시 청령 네 녀석은 꾀주머니구나."
앓던 이가 빠진 듯 호탕하게 웃음을 짓는 건성제였다. 하지만 매사는 불여튼튼이라 다시 한 번 묻는 치밀함을 보였다.
"과연 그 인물이 믿을 만한 자인가? 네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이냐?"
세밀하게 물어보는 건성제의 말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주청령이다. 하지만 복수의 일념이 곧 그녀의 입을 열리게 만들었다.
"황제 폐하! 소녀의 말을 믿으시옵소서. 절대 누가 될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제가 아는 한 그자는 신뢰할 만한 자이옵니다. 다만 성정이 급해 살살 달래야 하는 점이……."
"성정이 급하다… 원래 급한 자가 그나마 믿을 만하느니라."
건성제는 말하는 동생을 보니 왠지 안쓰런 마음도 지우기 힘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만리타향 몽고에 시집보낸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하나 그는 만인지상의 군주인 황제였다.
목적을 위해선 혈육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게 군주의 첫 번째 덕목이다. 차가운 눈으로 주청령을 바라보던 건성제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일단 알겠노라. 내 깊이 생각해 보겠노라. 명을 기다려라."
"네, 황제 폐하!"
살포시 고개를 숙이는 주청령의 마음이 금방 어두워졌다.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게 안타까운 여심이다. 주청령과 이야기를 마친 후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온 건성제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말하라!"
"네, 폐하! 황녀 마마께서 말하신 자는 소신도 조금은 알고 있사옵니다. 나름대로 협기를 지닌 데다가 무공 또한 걸출하다는 소문이옵니다. 나이는 아직 어리나 무림에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인재라고 평가되옵니다."
아무도 없는 듯한 천장에서 굵직한 남자의 저음이 들리자 고개를 끄덕이던 건성제가 차갑게 말했다.
"음, 역시 황녀의 눈은! 알았다. 물러가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거라."
"존명!"
결정을 쉽사리 내리지 못해 턱에 손을 대고 고민하던 건성제는 갑자기 한 인물이 생각났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충심으로 자신에게 조언해 주는 악관필 대장군과 상의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지금 속히 악관필 대장군을 입궁토록 하라."
"존명!"
무거운 건성제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 악관필 대장군은 얼마 안 되어 입궁해 황제와 독대 자리에 들었다. 건성제의 입이 열리고 소천악의 이름이 거론되자 악관필은 안색이 가볍게 변하는 충격을 받았다. 얼마 전에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인물임을 눈치챘다.
"대장군, 어쩌면 좋겠소? 이거 비밀스러운 이야기라 공론화하기도 뭐하고 해서 상의차 불렀소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악관필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신이 오늘 조용히 생각하고 내일 다시 와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가볍게 결정할 사안은 아니옵니다. 신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하시오."
건성제의 윤허가 떨어지자 악관필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대공자인 악천소를 불렀다. 악관필은 소천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고 침음성을 토하며 말했다.
"음, 아무래도 네 의형이 황궁과 연관이 될 것 같구나. 이미 황상이 마음을 거의 정하신 듯하니 신하로서 거짓을 아뢸 수도 없는 노릇이구나."
부친의 말을 듣던 악천소는 신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이 그리되었으면 해야지요. 다만 걱정되는 건 형님의 성정이 불같으셔서 황상 앞에서도 함부로 입을 놀릴까 봐 심히 우려되옵니다. 그 점을 아버님께서 잘 조절하셔야 할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