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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7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3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71화

 

  때로는 진실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걸 미처 느끼지 못한 소천악의 명백한 실수였다. 말을 하면서도 변해가는 주청령을 바라보던 그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생각에 태연하게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잠시 침묵이 감돌던 방 안이다. 이윽고 무거운 공기를 가르는 주청령의 말이 들렸다.

 

  "네 말을 듣다 보니 참으로 나를 하찮게 여기는구나. 이 천하의 막돼 먹는 놈!"

 

  황녀답지 않은 거친 말이 들렸다. 다시 일이 꼬여가자 골치가 지끈거리는 소천악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세상의 수많은 여자 중에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말이 그리 모욕적이십니까? 그럼 나머지 여인들은 어찌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다 제멋에 사는 게 인생이라고 봅니다."

 

  "이런……."

 

  노기가 치민 주청령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소천악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황녀님! 이제 전 가야 합니다."

 

  주청령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어 애증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소천악을 쏘아보았다.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은 갈수록 붉어만 갔다. 역시나 그녀의 입에서는 조금 전과 확실히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천하의 흉악무도한 놈! 감히 나를 능멸하고 곱게 살아남을 것 같으냐?"

 

  살기등등한 주청령의 말에 소천악은 내심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태연하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미 주청령의 내심을 어느 정도 짐작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툭하니 튀어나온 경솔한 말투를 후회하고 후회했다.

 

  "황녀님, 제가 드릴 말은 한 가지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여인을 제외하면 황녀님은 제가 본 여인 중에 감히 비교할 이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시고 현숙한 분이십니다."

 

  "그런 놈이 나를 이렇게 능멸하느냐? 흑흑!"

 

  서러움에 눈물을 보이는 주청령이다. 그녀로서는 오늘 일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얻어맞은 느낌이다. 순간 소천악의 눈빛이 번뜩였다.

 

  "황녀님! 제 죄가 큽니다. 그리 노여우시면 저를 단칼에 목을 베어 피분수를 온 방 안에 뿌리고 죽여주십시오."

 

  말과 동시에 거침없이 검을 주청령의 손에 건네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얼떨결에 검을 잡은 그녀는 소천악의 말에 기가 질려갔다. 손가락에 맺힌 피만 봐도 비위가 상해 식사를 못 하는 그녀에게 피분수니 목을 베라니 하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이 모든 것이 색마들에게 배운 수법이다. 고이 자란 처녀들의 특징을 족집게처럼 짚어준 색마들이다. 그들과 오랫동안 말하면서 들은 경험담이었다. 섬뜩한 단어를 마구 내뱉으며 아예 질리게 만드는 색마 고유의 수법을 써먹었다.

 

  의도적으로 거칠게 말한 후 이런 상황이 주어지면 통상 여인네들은 아무리 저주스러워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충고였다. 색마들의 공통적인 의견에 모험을 건 소천악이다.

 

  물론 정작 내리치면 가만히 고개 숙이고 고이 목을 내놓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예상대로 주청령은 검을 들고 몇 번이나 내리치려다 멈추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검을 내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소천악은 얼른 마무리에 들어갔다.

 

  "황녀님, 이리 관대하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실 피맺힌 원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놈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 일을 망각하고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르게 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 원한을 갚고 다시 황녀님 앞에 와 죗값을 청하겠습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표독스러운 말투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된 듯한 주청령을 보며 내심 쾌재를 부르던 소천악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가문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 가족의 원수가 대로를 활보하는데 그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어찌 대장부라 하오리까?"

 

  처절한 소천악의 말에 별다른 말을 꺼낼 수 없는 주청령의 입장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네놈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주었다. 이를 어떻게 할 건가?"

 

  "황녀님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죽으라면 자결할 겁니다. 하나 복수는 마치고 처분을 받게 해주십시오."

 

  전혀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소천악이었다. 그 연기가 얼마나 생생한지 천하에 재녀라 이름난 주청령도 깜박 속아 넘어갔다. 역시 색마들의 고절한 처녀 마음 훔치기 비법은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소천악이다.

 

  시꺼먼 소천악의 마음을 까마득히 모르는 주청령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가 죽으면 그 소문을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저 날도둑놈을 생각하니 또다시 분통이 터졌다. 감히 황녀인 자신을 희롱한 놈이었다. 하지만 자꾸 죽이지 말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헷갈리던 그녀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그럼 네놈 말을 믿고 보내주마.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월담은 하지 말아라. 내가 일러주는 길을 따라가면 무사히 황궁을 벗어날 수 있느니라."

 

  말과 동시에 그녀는 손가락으로 길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꼼꼼히 길을 숙지한 소천악이 길게 읍하며 사의를 표했다.

 

  "황녀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무례한 놈을 이리 배려해 주시니 제가 복수가 끝나면 꼭 돌아와 목을 길게 늘이겠습니다."

 

  "알았느니라. 어서 가거라. 날이 밝으면 여기를 빠져나가기가 어려우니라. 창문을 통해 좌측으로 가면 된다. 그쪽이 경계가 아무래도 허술하니라."

 

  이젠 아예 잘 도망가라고 길까지 안내해 주는 주청령 황녀였다. 소천악은 다시 한 번 색마에게 깊은 감사를 드렸다. 지금 마음이라면 다른 색마를 죽이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알겠습니다, 황녀님. 그럼 다시 뵈올 날까지 건강하시길."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얼른 창문을 통해 신형을 날리는 소천악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청령의 얼굴은 독기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왔다. 희롱당한 것보다 자신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저놈의 입을 확 찢어버리고픈 충동을 참아내느라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강호출도 이래 최대 위기를 넘긴 소천악은 엄밀한 황궁수비를 비웃으며 유유히 황궁을 빠져나왔다. 생각해 보면 아찔한 기억이었다. 밤새 콩알만 하게 졸아든 간을 다시 늘리는 소천악이었다. 기루에 돌아와 얼마 안 지나니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물론 이미 소천악은 잠에 취해 아무것도 몰랐다.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비로소 잠을 깬 그는 바로 장안성 하오문 지부를 소리 없이 찾아갔다. 이미 소천악의 존재는 적어도 하오문에서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이었다. 아무리 조난향 하오문주가 화가 났더라도 함부로 그를 내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곡 지부장! 대장군가의 족보를 말해 주시오. 특히 이공자와 그의 어미에 대해 엉덩이의 점까지 낱낱이 알아봐 주시오."

 

  하오문 북경지부장 곡소량은 잔뜩 긴장한 채 소천악의 요구를 경청하였다. 본문에서 내려온 서찰에 의하면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요구를 들어주라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대장군가의 동향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왔습니다. 바로 어제까지의 정보에 대해 전해드리지요."

 

  "역시 하오문이오. 내가 이래서 개방하고는 거래를 안 한다는 거 아닙니까? 뭐 아직까지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군요."

 

  촌철살인(寸鐵殺人)이었다. 소천악은 은근히 하오문을 압박하는 고단위 수법을 구사했다. 여차하면 개방에 정보를 의뢰한다는 말을 꺼내 곡소량을 핍박했다. 실로 강호초출치고는 대단한 잔머리를 썼다.

 

  물론 거기에는 혈사부의 독행강호주유기(獨行江湖周遊記)를 숙지한 공이 컸다. 이런 내막을 까마득히 모른 채 곡소량은 내심 크게 흔들리는 자신을 감추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암중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하오문의 형편상 소천악의 존재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가 하오문을 버린다면 암중세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격을 시작할 거라는 정보가 이미 각 지부에 들려왔다.

 

  안색이 흔들리는 곡소량이 난감함을 웃음으로 피하며 말을 꺼냈다.

 

  "하하! 거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이미 우리 하오문의 은인이신 소협을 어찌 소홀하게 대하겠소이까. 이미 모든 일에 최우선해서 편의를 제공하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오, 그래요? 조난향 문주님이 대범하시기는 하나 봅니다. 하하."

 

  소천악은 내심 약간의 감탄이 들었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그녀가 이런 지시를 내린 걸 보니 과연 일문의 문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잠시 환담을 나누는 사이에 이미 소천악이 필요한 정보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자, 소협! 여기 대장군가에 대한 정보가 있소이다. 특히 이부인 금사란(金賜蘭)에 대한 모든 정보가 중점적으로 담겨 있소이다."

 

  정보를 다루는 이답게 곡소량은 소천악의 목적을 예리하게 간파한 후 듣기 좋은 소리를 내뱉었다.

 

  "고맙소."

 

  짧게 말한 소천악은 바로 서찰을 안광을 빛내며 읽어 내려갔다. 순간순간 그의 입가가 실룩거리는 게 별로 유쾌한 내용은 아닌 모양이다. 이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모두 읽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자세한 정보요. 역시 하오문은 정보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파라는 걸 또다시 알게 됩니다.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요."

 

  "하하! 과찬의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소이다."

 

  몇 가닥 없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 곡소량이다.

 

  "내 개방과는 거래를 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다 해도 거지랑 거래하는 건 영 위생상 안 좋다는 생각이오."

 

  "아, 그게? 그렇죠. 아무래도 위생상 불결하긴 하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곡소량은 기가 막혔다. 천하의 개방을 위생 타령하며 구박하는 자는 저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 공사(公私) 구분이 분명해야 거래가 활기찬 법이오. 여기 정보비를 받으시오."

 

  주섬주섬 전낭을 뒤지는 소천악을 보며 곡소량은 과연 얼마를 줄 건지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의 기대는?

 

  한마디로 개꿈이었다. 소천악은 달랑 전표 하나를 꺼내주었다. 받아보니 일금 오십 냥짜리 전표였다. 한마디로 기가 막힌 곡소량이었다. 대장군가의 모든 정보를 준 대가가 겨우 오십 냥이란 사실에 확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짐짓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소협!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오! 말씀해 보시구려. 곡 지부장님."

 

  "소협께서는 정보비를 책정할 때 어떤 기준으로 채택하시는지요?"

 

  정말 궁금한 듯한 곡소량의 눈빛에 피식 웃음과 더불어 입을 열었다

 

  "간단하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위에 따라 정해지오."

 

  "아니, 그럼 대장군가의 일은 소협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가 아닌지요? 제가 듣기엔 악천수 대공자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걸로 압니다만,"

 

  곡소량의 말에 펄펄 뛰는 소천악이었다

 

  "의형제는 무슨!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이야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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