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59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59화
"하하, 관심사라! 거 골치 아픈 소리요. 그저 평화롭게 강호를 떠돌다 부인감이나 구해 사라질 사람이오."
"호호! 그게 어디 뜻대로 된답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하하! 두고 보면 알 거요. 그나저나 서찰로 부탁한 청탁이 무엇이오? 얼른 처리하고 난 볼일이 많아 가야 할 몸이오."
문주는 벌써 소천악의 성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다소 급한 듯한 말에 전혀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그러셔야지요. 그럼 제가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지요."
"끙! 자세하게보다 간략하게 해주시오. 너무 어려우면 일이 잘못될 수도 있소."
"알겠어요. 그럼 시작해도 되나요?"
"준비되었소. 설명해 보시오."
무뚝뚝한 소천악의 말이었다. 문주는 영문을 몰랐지만 대충 넘기고 위기에 대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 하오문은 사실 고수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정보를 다루는 문파지요. 그 정보력에 대해서는 강호동도들이 인정합니다. 가히 개방과 더불어 양대 정보망이라고 하지요."
"그거야 잘 알지요. 내가 받아봐서요."
"네, 그러시겠죠. 자, 그럼 부탁할 이야기를 하죠. 우리 하오문은 대대로 장로회의 만장일치로 문주가 추대되었어요. 저도 그 경우로 문주가 되었죠. 그런데 이번에 무서운 일이 생겼어요. 알 수 없는 자들로부터 문주 직을 자기에게 달라는 제안이 왔어요. 평생이 아니고 단 오 년만 주면 다시 돌려주겠다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당연히 거절했지요. 그러자 이번엔 장로들의 자식들을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어요. 장로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버텼지요. 다음은 하오문도의 가차 없는 살육이었어요. 그들은 딱 하루에 열 명씩 우리 문도를 죽이겠다고 통보하고 삼 일 전부터 죽이기 시작했어요."
"거참, 몹쓸 놈들이네."
소천악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무래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하오문이 무력이 약한 문파라지만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게 만만한 상대는 아닐 성싶었다. 평온한 강호행보에 별로 유익한 일이 아니란 판단이 섰다.
"도와주세요. 저희 하오문은 비록 약한 문파지만 정말 가여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파랍니다. 기녀 등 하류층을 대변하는 문파지요."
"기녀가 하류층이란 말이오? 아니던데. 은자 버는 거 보니 장난이 아니던데."
의아한 소천악의 반문이었다. 조난향은 기가 막혔지만 꾹 참고 설명했다.
"소 소협, 기녀란 여러 부류가 있지요. 그중에 가장 가여운 여인은 일명 노류장화라 하는 창녀들이지요. 하룻밤 봉사에 겨우 은자 한 냥도 감지덕지하는 신세지요. 거기다 소매치기, 도둑 등 정말 어려운 이가 많아요."
"소매치기가 어려워?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소리 다 듣소이다. 게다가 도둑이 어렵다니, 나참!"
소천악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마침내 조난향은 열이 하늘 끝까지 올랐다.
"소 소협! 소매치기나 도둑은 돈이 궁한 게 아니라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요. 건달패가 그들을 항상 노리고 있는데 우리 하오문이 그나마 막아주는 겁니다."
들을수록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소천악이었다. 골치가 아파진 그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만둡시다. 그런 건 관심 없소이다. 내가 장 지부장에게 말한 조건 들어주겠소?"
"당연히 들어드리지요."
"그럼 됐소. 구질구질하게 여러 말 하지 맙시다. 수락하겠소."
간단명료한 소천악의 말에 일이 어려워질 것으로 봤던 조난향 하오문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마워요, 소협."
"그럼 어서 일을 진행합시다. 얼른 처리하고 난 쉬어야겠소."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른 분도 오시기로 했어요."
소천악은 조난향의 말에 다른 조력자도 초청한 일을 알았다. 전혀 불쾌할 일이 아니었다. 한 손보다 두 손이 나은 건 당연한 사실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소천악은 앞일에 대해 판단하기 시작했다. 골치가 아파왔다. 빌어먹을 정보의 유혹에 넘어가 어려운 길을 자처한 셈이다. 돌이키기는 틀렸다는 마음이 들자 차가운 안광을 발했다.
스르릉.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돌파뿐이다. 차가운 광채를 보이는 검날에 살짝 손을 대자 섬뜩한 한기가 몰려왔다. 느낌이 좋았다. 검을 잡은 그의 차가운 한기를 토해내는 안광이 검에 반사되었다. 한 번의 고생이 남은 생을 편하게 만든다는 마음을 먹자 곧 고요한 평정심이 들었다. 수련기간 내내 훈련했던 차가운 이성이 차차 고개를 들었다.
다가오는 싸움에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며 온몸에서 살기가 뻗쳐올랐다. 소천악은 그렇게 점차 마음을 조이고 온몸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방심은 곧 죽음이라는 냉엄한 강호의 법을 잊지 않도록 깊이 새겼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방을 나서서 조난향 문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긴장한 채 초대한 무림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오기로 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애타는 그녀의 마음은 갈수록 숯덩이가 돼갔다. 무심히 바라보던 소천악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문주, 언제 가실 거요?"
"아, 소 소협! 잠시만요. 초대한 다른 무림고수께서 아직 도착하지를 않으셨네요."
"올 사람이면 벌써 왔을 게요. 멀리 호남성에서도 왔는데 아직 안 올 리가 없잖소?"
담담한 소천악의 말에 왈칵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조난향 하오문주였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다는 걸!
하오문은 버려졌다.
초청 서찰에 애절한 호소를 담아 보냈건만 돌아온 건 싸늘한 밤바람뿐이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그녀의 하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몇 번이고 쥐었다 놓는 가냘픈 손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휴우, 소 소협!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듯싶네요. 최소한 반 이상은 오실 줄 알았는데."
"원래 세상인심이라는 게 그렇소. 좋을 땐 간이라도 빼줄 듯이 알랑거리지만 어려우면 외면하는 게 대부분의 사람 마음이라오."
소천악은 자신의 말이 적절한 위로가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다.
"호호! 아무리 그래도 소 소협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상대가 불쾌한 법이에요."
씁쓰레한 조난향의 말에 소천악은 내키는 대로 말을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하고픈 말 하고 살겠소."
퉁명스레 말하는 소천악을 바라보는 조난향 하오문주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서찰대로 참 괴이한 성격의 소유자임에 분명했다.
"소 소협, 이제 그냥 떠나셔도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려워도 진 싸움에 애매한 목숨을 죽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체념한 조난향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버럭 소리치는 소천악이었다.
"거, 무슨 소리요! 남자가 결심하면 가야 하는 법이오. 상대가 강하다고 물러서면 바로 물건 떼고 살아야지요."
"아니, 소 소협!"
당혹한 조난향이었다. 보내주면 주춤거리는 척하고 갈 줄 안 그녀였다.
"뭘 망설이는 것이오? 갑시다. 가서 그 인간성 더러운 놈들의 면상이나 봅시다. 말로 해보다 안 되면 까짓것 누가 죽나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소 소협! 저들은 많은 고수가 버티고 있는 단체입니다. 아무리 소 소협이 절정고수라 해도 무리입니다."
"난 그런 거 모르오. 내가 아는 건 인간성이 뭔지 모르는 놈들은 검으로 찔러 죽이든가 패 죽이든가 둘 중에 하나란 것만 아오."
"아니,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렇게 나쁜 놈들이 설치는 거야? 이래 가지고야 나같이 선량한 사람들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욕먹게 되잖아."
버럭 소리치는 소천악은 격분에 떨었다. 정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놈들에 대한 분노였다. 자신만 해도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다. 이놈들은 아무런 일도 안 하고 날째로 하오문을 먹으려 하다니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졌다.
"휴우, 어떡해요? 강호란 곳이 약육강식의 거친 들판인걸."
"그러니까 오늘 내가 토끼도 힘내면 늑대 새끼를 토막 친다는 교훈을 보여주겠소. 따라올 거요? 말 거요?"
주객이 전도된 대화였다. 남들이 들으면 소천악이 하오문주인 줄 착각하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조난향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저들의 뜻에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아요, 가요. 대신 오늘 같이 저승에 가도 원망하지 않깁니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는 것이오? 가보면 알 거요. 아, 이제 십만 냥도 주슈.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거요. 거래는 항상 투명해야 서로 웃으며 다시 보는 거지요."
이 판국에도 은자 타령을 하는 소천악이었다. 아예 설득을 포기한 조난향이 탁자 아래서 전표를 하나 꺼내주었다. 그 옆에 있던 검은 주머니도 함께였다.
"받아요. 그리고 이건 전에 부탁했던 천리추적향이지요. 이건 덤으로 드리지요."
어김없이 십만 냥짜리 전표였다. 가만히 액수를 확인하던 소천악이 툭하니 입을 열었다.
"이거 엄밀히 따져서 전표 할인을 감안하면 구만팔천 냥인데 내가 특별히 이천 냥은 깎아주겠소. 천리추적향도 주는데 나도 인심을 썼소."
"아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네요. 호호!"
엉뚱한 대화에 빠져 조난향은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절망스런 상황에 나오는 웃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빼면 유쾌한 시간이었다.
"자, 이제 갑시다. 뭐 여러 명 갈 필요도 없네. 적어도 일류고수만 같이 갑시다. 아참! 그리고 꼭 쓸데가 있을 듯하니 괜찮은 비도 몇 개 챙겨주시오."
"그래요, 가요. 가서 우리 하오문의 기개를 보여주기라도 해야지요."
결정을 내린 조난향은 하오문에서 엄선한 일류고수 이상인 이십여 명을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하오문의 모든 고수는 이미 얼굴이 긴장으로 가득한 인상이었다. 다만 소천악만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따라갈 뿐이었다.
그들은 약속장소인 항주에서 십여 리 떨어진 폐허가 된 사찰에 도착했다. 긴장이 지나친 하오문의 고수들과는 달리 소천악은 여유만만했다. 사부인 혈검신마도 수백 명의 정파고수의 합공을 이겨냈다. 그 진전을 이어받은 자신이 질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물씬 풍겨 나왔다.
"여기요, 문주?"
"네,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왜 안 보이는 거죠?"
"오겠죠. 자기들이 약속한 건데요."
소천악은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시전했다. 내공을 모아 청각을 극도로 발달시키는 무공이다. 천리지청술을 시전하자 백 장 밖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혹시나 은신해 있다가 급습이라도 당하는 날엔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백장 내에선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감을 올린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일각이 채 안 지날 무렵 그의 귀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무숲을 가르며 다가오는 인영은 수십여 명에 이르렀다. 한 번에 십여 장씩 쭉쭉 뻗어오는 경공술이었다. 최소한 일류고수를 넘어서는 경지였다. 절정에 거의 다다른 고수들 수십여 명이 살기를 뿌리며 급격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소천악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상대의 전력을 아주 쉽게 판단하게 만든 적의 멍청함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