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47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47화
소천악은 저번 복면괴인들과의 접전으로 느낀 바가 컸다. 무공이란 아무리 고강해도 평소 수련을 게을리 하면 돌발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최선의 대응이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실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한 터였다.
한 번 곤혹을 치르고 나자 항상 시간 날 때마다 수련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강호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무공이었다.
세력도 동조자도 없는 그가 강호의 세파를 헤쳐 나가기 위해선 절대적인 무공이 필요했다. 장작 패기에서 얻은 깨달음도 잊기 전에 자기 것으로 만들 요량이었다. 혈사부 말대로 강호란 일단 살고 봐야지 죽으면 억울한 곳이었다.
그날부터 소천악은 낮에는 방에서 운기조식과 초식수련을 반복했다. 도끼질에서 얻은 심득을 대입해 수련에 매진했다. 하루가 다르게 운기는 정순하게 진기를 다스리며 내력을 높여갔다. 초식도 마냥 습관처럼 펼치던 단점이 눈에 확 보였다. 같은 초식이라도 상황에 따라 변초하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서서히 느껴갔다.
산에서 마냥 혼자 수련할 때와는 완전히 하늘과 땅이었다. 강호에 나와 몇 번의 싸움을 거치자 그의 눈은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깨달았다. 거기에 힘 안배를 알아채자 실력은 일취월장이었다. 비록 혈검구식은 사용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말이다.
팔 년간의 동굴 수련 기간 동안 의문스러웠던 혈검구식 각 초식의 연결도 자유스러워졌다. 한마디로 무공에 대해 새로 눈을 뜬 기분이었다. 이대로 산으로 돌아가 무공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싶은 유혹마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산으로 들어가? 말아?'
아차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순간적으로 평생 무공수련에 빠져 산에서 일생을 마친 조사 꼴이 날 뻔했다. 물론 이 기회로 조사님의 심정도 이해가 어느 정도 되었다. 그 양반도 날로 발전하는 경지에 취해 평생 수련했으리란 상상이 갔다.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하자 그의 눈은 전과는 달리 깊은 현광을 수시로 뿜어냈다.
거기서 다시 수련에 푹 빠질 소천악이 아니었다. 무공실력은 수단이지 절대 목표가 아니었다. 다른 생각이 바로 머리를 지배하며 기루 순방에 관한 깊은 고심에 잠겼다.
이제는 무차별로 맺는 기녀와의 인연이 도움이 될 이유가 없었다. 순간의 쾌락이 있다지만 하다 보니 갈수록 싱숭생숭해져만 갔다. 색마에게 배운 대로 이제는 품위를 지키며 문화생활을 즐길 시간이 온 걸 알았다.
자신의 이름 관리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간 좋게 말하면 풍류공자, 재수 없으면 여자에 미친 놈 소리 듣기 딱이었다. 사실 남이 타고 지나간 배를 탄다는 게 영 께름칙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먼저 개척하는 여인만 상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자발적인 경우는 인정상 눈감기로 결정하였다.
결정을 내리고 방에서 일어서니 어느덧 보름이란 시간이 흐른 후였다. 보람찬 나날을 보낸 기쁨에 흥이 절로 올라왔다.
어슴푸레한 저녁이었다. 탁자에 앉아 점소이에게 식사 주문을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막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한 떼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눈에 띄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소천악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사람들은 얼핏 봐도 무인이었다.
"민석주를 아시지요?"
나름대로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이야기하는 무인이었다. 이마에서 뺨까지 검상을 길게 보이는 자였다. 섬뜩한 인상을 무심히 쳐다보며 소천악이 대답했다.
"그렇소만! 무슨 일이오?"
"지금 민석주 지부장님이 급히 뵙자고 청합니다."
"아, 그래요? 알겠소! 일단 식사나 하고 갑시다."
"그러시지요! 우리는 저쪽에서 차나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겠소이다."
포권을 하며 물러나는 무인들이었다. 꽤나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했으나 소천악의 눈은 속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무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거기서 생각을 접은 소천악이었다. 무인이든 개망나니이든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온 식사를 천천히 즐기고 술 한 잔으로 입가를 가볍게 헹군 후 일어섰다.
그가 걸어가자 어느새 무인들이 다가와 그를 암암리에 포위한 채 걸어갔다. 내심 피식 웃음을 던진 소천악이었다.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남대출 건물로 들어갔다. 일단 안에 들어서자 무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대뜸 반말로 윽박질렀다.
"이봐! 저쪽으로 앉아!"
소천악은 돌아가는 낌새를 보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앉았다. 잠시 후 민석주 지부장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났다. 그는 소천악을 보자 픽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소천악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품안에 들어온 토끼였다. 비록 검은 차고 있었으나 태양혈이 밋밋한 게 무공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백면서생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검은 장식용이라는 판단이었다.
"어이구, 공자! 어서 오시오."
"안녕하시오, 민 지부장님. 그새 신수가 훤해지셨네!"
선수를 치고 나오는 소천악을 보며 민지부장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고맙소이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요?"
음흉한 미소가 이제는 완연히 드러나는 민석주가 탁자 맞은편에 앉아 말을 이었다.
"저번에 가져가신 삼천 냥 말입니다. 이거 벌써 보름 동안 단 한 푼도 이자가 들어오지 않아서 불렀소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에 소천악은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이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분명히 40일 후에 오천 냥 주기로 한 거 아니오?"
반문하는 소천악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민석주가 말했다.
"공자가 가지고 계신 차용증서를 줘보시지요?"
아무 생각 없이 소천악이 차용증서를 내밀자 민석주가 한 번 쓱 보고 비웃듯 다시 내밀었다.
"보시오! 분명히 공자가 수결한 내용이오!"
차용증서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어떤 의심나는 글귀도 찾을 수 없는 소천악이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막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민석주가 차용증서를 홱 뒤집어 들이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바라보던 소천악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으, 미치겠네!"
골 아픈 듯 머리를 부여잡는 소천악을 보며 민석주는 잔인하게 말했다.
"공자께서 약속을 안 지켰으니 자, 이제 황금패를 주시지요?"
아예 윽박지르며 말하는 민석주였다. 이미 대어는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고 있다는 그의 생각이었다. 이제 건져 올리기만 하면 수만 냥이 굴러들어 오는 일만 남았다.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민석주였다.
차용증서 뒷면에는 얼핏 보면 먹물이 번진 듯한 깨알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눈을 까뒤집고 봐야 겨우 찾아낼 수 있도록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채무자는 돈을 빌려 간 날로부터 소급해서 매일 은자 오십 냥을 갚아야 한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엔 담보 물건을 이유 없이 차압한다.〉
아주 지능적인 사기단이었다. 담보 물건을 날로 먹겠다는 열렬한 의지가 서려 있는 문구였다. 소천악은 어이가 없어 불쑥 쏘아붙였다.
"아주 칼만 안 드셨지, 강도들이시군요!"
"무엇이! 이런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아까와는 태도가 백팔십 도 바뀐 민석주가 거칠게 나왔다.
"말조심하시지요! 그러시다가 여럿 뒈지는 거 봤습니다."
여러 번 겪은 상황이라 여유를 부리는 소천악의 일갈이었다. 민석주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며 소리쳤다.
"뭐 하냐! 저 자식을 정신이 바싹 들도록 주물러줘라."
"네, 지부장 어른! 너 이 자식 좋게 말로 하려 했더니만 안 되겠어. 얍!"
짧은 기합성을 외치며 '얼굴흉터'는 스르르 미끄러지는 상승보법을 펼쳤다. 그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권을 쭉 뻗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소천악이 섬전같이 권을 내밀었다. 그의 권은 다가오는 얼굴흉터의 권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격돌했다.
빠지직.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얼굴흉터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내 손! 으아악!"
그의 손은 뼈가 부서져 제멋대로 뻗어 나왔다. 격통에 신음하며 얼굴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소천악이 슬쩍 다가가 수혈을 짚었다. 바로 잠에 빠져들자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소천악의 입이 열렸다.
"그분 목소리 더럽게 크시네. 자, 다음 분 오시지요. 내 오늘 하늘 높은 줄 알려주지요!"
"저런 괘씸한 놈! 얘들아, 뭐 하느냐! 어서 저놈을 죽여라!"
민석주의 지시가 떨어지자 남아 있던 네 명이 검을 일제히 뽑아 들고 소천악을 겨누었다. 검끝에는 이미 살기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삼류고수는 아닌 듯 뿌려지는 기세가 제법 삼엄했다. 검을 보자 소천악의 입매가 좁아졌다.
"오호, 검을 뽑았다 이거지요? 좋소이다. 나도 내 앞에서 검을 들이댄 분들을 살려준 적은 없지요. 어서 오시지요. 친절하게 황천길로 안내해 드리지요."
말을 끝낸 소천악의 전신에서 알지 못할 기세가 서서히 흘러나왔다. 네 명의 무사들은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백면서생인 줄 알았던 자가 의외로 한가락 하는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기세를 풍기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모두 정신 바싹 차려라. 만만한 놈이 아니다!"
"흐흐! 만만하지 않지요. 결코 아니지요."
차갑게 비아냥거리는 소천악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전혀 딴사람이었다. 눈빛에 풍기는 살기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무인들은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네 방위를 점한 채 노려만 보고 있었다. 바라보던 민석주가 버럭 소리쳤다.
"모두 뭐 하느냐! 겨우 한 놈에게 이러다니! 어서 죽여버리지 못할까?"
지부장의 음성이 들리자 무인들은 비로소 움직였다. 좌측으로 선회하며 소천악의 빈틈을 노렸다. 아니 노릴 필요도 없었다. 전신이 온통 허점이었다. 그냥 검만 찌르면 바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선뜻 들어가기 어려웠다.
"야얍! 죽어라!"
드디어 기합소리와 함께 네 자루의 검이 일제히 소천악을 노리고 밀려들었다. 검 두 개는 머리와 얼굴을 노렸다. 나머지 둘은 복부와 옆구리를 노리고 빠르게 베어왔다. 하루 이틀 연습한 기세가 아닌 게 첫눈에도 확연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티가 확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목숨을 앗아 갈 살기 어린 공격을 바라보는 소천악의 안색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 정도 속도는 그의 눈에는 거북이가 엉금엉금 다가서는 걸로 보였다. 십여 년 동안 섬전 같은 혈사부의 손속을 지겹도록 겪은 그였다. 막 검이 그의 몸을 갈기갈기 베어갈 무렵이었다.
소천악의 몸이 철판교(鐵板橋)를 시전하자 온몸을 꼿꼿이 한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등이 땅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급격한 움직임이었다. 몸 위로 네 개의 검이 스치듯 지나가자마자 벼락같이 몸을 튕겨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잡혀 있었다.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며 검이 섬전같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저 번쩍이는 검광만이 겨우 보일 뿐 아무도 검의 흐름을 알지 못했다.
"피해랏! 으아악!"
놀란 네 명의 무인들이 마치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듯 똑같이 소리쳤다. 이어지는 건 비명뿐이었다. 이미 검을 거둬들인 소천악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듯 서늘한 안광만 번뜩였다. 잠시 후 드러난 상황은 경악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