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4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44화
나름대로 강호를 굴러먹은 듯 전신에선 고수의 기운이 풍겨 나왔다. 뒤에 서 있는 산적들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철무진은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무사히 넘어가야 했다.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면 큰 피해는 고사하고 표행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하, 이게 누구신가? 유세기 채주가 아니신가!"
넉살을 피우며 말하는 철무진이었다. 유세기는 자신을 알아보는 그를 보고 더 이상 험한 말을 자제했다.
"험험!"
헛기침을 연신 토하는 유세기를 보며 희망을 찾아낸 철무진이 급히 말을 이었다.
"이거 죄송하오. 녹림호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구려. 여기 컬컬한 목이라도 축이시구려."
말과 동시에 건네주는 적지 않은 은자 주머니였다. 냉큼 받아 열어본 유세기는 맘족한 듯 짐짓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이리 체면을 보아주니 어찌 더 말을 하겠소. 즐거운 표행이 되시구려. 자, 그만 가자."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 사라지는 유세기를 따라 수십 명의 녹림인들도 사라져 갔다. 철무진 표국주는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네. 다음부터 이 산을 잘 표시해 놔라. 언제 유세기가 산을 옮긴 거냐?"
"네, 국주님. 저도 금시초문이네요."
표두 하나가 얼른 대답하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유심히 쳐다보던 소천악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길! 우당탕 한판 하지."
투덜거리는 소천악을 보며 사공척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일개 쟁자수로 보기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감히 무림고수인 표사를 대할 때의 태연함이 기억에 떠올랐다. 무언가 가진 비밀이 있는 청년이었다. 오랜 세상 경험은 그 의문을 묻지 않는 노련함을 가졌다.
표행은 산 정상을 지나 순조롭게 산 밑으로 향했다. 이미 짐은 다시 말과 마차에 실렸다. 빈손으로 걸어가던 소천악이 잠시 주춤했다.
아까 녹림인들과는 판이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방을 살펴보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보시오, 다시 뒤로 빠져요."
흠칫한 사공척은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아까 그런 모습을 본 다른 쟁자수 여러 명도 얼른 대열 후미로 처지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자는 모두 그리했다. 그들은 아무도 소천악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은연중에 소천악은 쟁자수의 우두머리로 인식되는 형편이었다.
저잣거리에서 건달 생활을 하다 나이 들어 온 자들도 물론 있었다. 그들조차 소천악이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를 느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쟁자수의 반 이상인 삼십여 명이 뒤로 처졌다.
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차츰 이상함을 느낀 쟁자수들이었다. 그때 철 표국주의 고함이 들렸다.
"거기 쟁자수들! 어서 걷지 못할까! 왜 이리 처지는 거야?"
놀란 쟁자수 중 반 이상이 얼른 걸음 속도를 올렸다. 사공척도 우왕좌왕하며 빨리 걸으려는 순간 소천악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가슈. 이제 다 왔어요."
"아! 그러지요."
이제는 차마 반말도 못 하고 어영부영 말을 높이는 사공척이었다. 주위에 건달 출신 쟁자수만 빼고는 거의 표행 대열에 다시 따라갔다. 그 순간이었다.
"크악! 적이다! 막아라!"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놀란 사공척 등이 앞을 바라본 순간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거기에는 수십 명의 복면 괴인들이 검을 들고 표행을 덮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라 소천악을 바라보는 사공척이었다. 물론 건달 출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 멈추고 내 주위에 다가오시오!"
차분하게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왠지 그 말이 신뢰가 가는 사공척 등 쟁자수들이다. 아무런 질문 없이 열다섯의 쟁자수가 소천악 주위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들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앞의 접전을 지켜봤다.
복면인의 수는 사십 명이 넘어 보였다. 철 표국주와 표사들의 수는 고작 이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기습으로 다섯 명이 벌써 시체로 변해 있었다. 머릿수도 밀리는 데다가 무공 수준도 많은 차이가 났다. 당연히 일방적인 열세에 몰려 위급지경이었다.
소천악은 바위 위에 앉아 유유하게 바라보았다.
"이보게, 위험하네! 어서 이리로 오게."
다급한 사공척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소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 중에 하나가 싸움 구경이라는 거 아닙니까!"
태연자약한 소천악의 반응에 안절부절못하는 사공척이었다. 그들과 상관없이 복면인들은 표사들을 무 베듯 검으로 갈라갔다.
"크아악! 살려줘!"
허리를 깊게 베인 표사 하나가 피를 철철 흘리며 절규했다. 하지만 곧이어 베어온 검에 목이 잘려 비명도 멈췄다.
"흐흐, 가소로운 놈들! 좋게 표물을 달랄 때 주지. 버티기는."
말도 하지 않고 기습한 사람의 말치곤 어이가 없었다. 철무진 표국주는 다급함이 역력했다. 그와 맞선 두 명의 복면인들의 합공에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이미 이십여 명의 표사 중 불과 열 명만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들도 곧 땅에 쓰러져 유명을 달리할 건 뻔해 보이는 형국이었다.
"멈추시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요? 은자를 달라면 드리겠소."
"필요 없다. 우리가 필요한 건 네놈들의 목숨과 표물뿐이야!"
차갑게 거절하는 복면인의 말에 절망하는 철무진 표국주였다. 아무래도 복보다는 화가 가까워 보였다.
"고얀 놈들! 그래, 해보자.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난 철무진 금성표국 표국주이니라."
"알아, 이놈아. 그래서 어쨌다고?"
합공하는 복면인들은 비웃음을 던지며 연신 철무진의 사혈을 노리고 검을 베어왔다. 형세를 바라보던 복면인의 두목은 저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인들과 쟁자수들을 바라봤다.
"저기 쓰레기 같은 쟁자수와 상인의 목을 모조리 베어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차가운 사형선고였다. 그 말을 들은 상인들과 쟁자수의 발은 꽁꽁 얼어붙었다. 복면인 다섯 명이 얼른 복명했다.
"네, 조장님!"
싸움판에서 빠져나온 다섯 명은 신법을 전개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쟁자수와 상인들은 공포에 질려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하지만 평범한 쟁자수와 상인들이 무림고수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으악! 살려줘요!"
"안 돼! 제발 크헉!"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며 여기저기 피보라가 물결쳤다. 겁에 질려 도망치던 쟁자수와 상인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검에 베여 죽어갔다.
"쯧쯧! 잔인한 분들.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을 저리 죽이시다니 좌우간 힘없는 게 죄야, 죄."
그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옆에서 두려움에 떨던 사공척과 쟁자수 그리고 상인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공포스런 형국에서 저런 여유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망치던 사람들을 모두 베어 죽인 복면인들의 시선이 소천악에게 집중되었다. 천천히 다가오던 한 복면인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음산하게 말했다.
"흐흐! 아주 편하게 죽이라고 몰려 있구나. 기특한지고! 내 특별히 고통 없이 죽여주지."
가만히 그 말을 듣던 소천악이 냉소를 쳤다.
"까불지 마시고 저기 표사들이나 해치우시구려.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드리다 피 봅니다."
"이런 웃기는 쟁자수를 봤나? 네 이놈! 감히!"
격노한 복면인이었다. 감히 쟁자수 따위가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참아 넘길 그들이 아니었다.
"경고하지요. 검으로 오는 분은 단 한 분도 살아 가지 못합니다."
차가운 소천악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이미 그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말을 들은 복면인들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저놈이 두려움에 질려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어서 목을 따라!"
복면인 중 하나가 검을 들고 가볍게 베어왔다. 내력도 넣지 않은 채 그저 편안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소천악의 눈이 번쩍였다. 복면인의 검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섬전 같은 검광이 복면인을 쓸어 갔다.
"크아악! 이런!"
복면인은 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검에 깊이 베인 목에서는 붉은 선혈이 철철 쏟아졌다. 치명상을 입은 그는 잠시 숨을 헐떡이다 죽어갔다.
"이런 괘씸한 놈이, 감히!"
분노한 네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검을 쭉 뻗었다. 검끝이 가늘게 회전하며 들어오는 선풍검이었다. 전후좌우에서 빈틈없이 밀려오는 검에서는 바람 가르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들려왔다. 바라보던 소천악이 스륵 옆으로 미끄러지며 섬전같이 검을 수직으로 한 번, 수평으로 한 번 그었다. 그뿐이었다.
네 명의 복면인은 적의 검이 언제 자신의 가슴을 베고 갔는지도 몰랐다. 섬뜩한 느낌에 가슴을 내려다본 네 명의 복면인은 모두 경악했다. 이미 가슴이 길게 베여 피분수가 솟구쳤다.
"크윽! 이런 쾌검이!"
마지막 절규를 외치는 복면인을 보며 소천악이 주위가 꽁꽁 얼어붙는 살소를 날렸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했소? 까불지 마시라고 했지요?"
"으윽, 조장님, 여기 강적이 숨어 있습니다."
최후의 힘을 모아 소리친 복면인은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동료의 비명에 놀란 나머지 복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복면에 가려진 그들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도저히 믿기 힘든 장면이 그들의 시야에 펼쳐져 갔다.
"저놈을 죽여라! 감히 우리 동료를!"
악에 받친 조장의 목소리에 반 이상의 복면인들은 일제히 소천악을 덮쳐갔다.
"아주 단체로 북망산 나들이가 가고 싶은 모양이십니다. 기꺼이 보내드리지요. 으얍!"
밀려오는 복면인들을 향하는 그의 검에선 바람소리가 일었다. 풍혼검법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거센 소리가 일렁였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은 복면인들에게 다가서자 거센 폭풍우로 돌변했다. 사방을 포위한 채 바람의 칼날로 다가서는 소천악의 검은 어느새 수십 개의 환영을 달았다.
"으악! 피해라!"
"안 돼! 이런… 허억!"
비명과 피보라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바람의 검은 인정사정없이 연이어 복면인의 숨통을 여지없이 끊어놓았다. 발악 같은 저항이 이어졌으나 부질없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려 쓰러져 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날 무렵 이미 살아 있는 복면인들은 없었다. 땅에는 온통 피투성이로 변한 시체만 즐비했다.
서장을 피바다로 물들인 풍혼마의 풍혼검법은 잔인한 이빨을 오랜만에 드러냈다. 소천악이 들고 있는 검끝에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보였다. 고개를 돌린 그가 스산하게 말했다.
"검을 들고 오시는 분들을 살려둘 아량은 제게 없소이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던 조장이란 자는 소천악의 말을 들었다. 그의 말에 뇌리에 떠오르는 한 인물이 생각나 소리쳤다.
"신의괴협 소천악! 네가 바로 그자냐?"
"그렇소. 왜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입니까?"
무서운 이름이었다. 광동성을 주름잡던 흑마전을 단신으로 물리친 절정고수였다. 검사권생의 소문을 만들어낸 떠오르는 강호의 샛별이었다. 막상 그의 무위를 보자 소문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란 게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