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4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42화
보나마나 양소아는 지나는 곳마다 눈물 공세로 텅 빈 주머니를 노릴 건 뻔했다. 그는 조용히 사라지기로 했다. 아무래도 현재로서는 그녀를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그는 바로 방을 나섰다. 폭우를 뚫고 길을 찾아 서서히 몸을 돌렸다.
다시 방랑의 시간이 찾아온 소천악이다.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는 그를 잡아채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는가?"
창노한 음성이다. 놀라 고개를 돌린 소천악은 백의의 한 노인네를 볼 수 있었다.
"일이 끝났으니 가야지요."
무심히 말하는 그를 보며 노인은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찾으러 갑니다."
소천악의 무심한 대답에 노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보기 드문 청년이다. 크나큰 일을 해놓고도 아무런 대가도 칭찬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협객을 보는 기분이다. 하나 소천악의 진심을 알았다면 결코 들지 못할 감정이기도 했다. 소천악은 단지 미녀를 찾으러 갈 뿐이다.
"대단한 청년이구먼. 노부는 강호동도들이 백의신의라 부르는 보잘것없는 노인네일세."
무심히 듣던 소천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토록 만나려고 애썼던 인물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일이다. 얼른 예의를 갖추어 깊이 읍을 하며 말했다.
"백의신의를 뵙게 되서 일생의 광영입니다."
"허허, 광영이라니. 노부가 소협을 부른 건 궁금한 게 있어서야."
"말씀하시지요."
"솔직히 자네의 눈을 보면 이런 행동을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아. 노부가 수십 년을 강호를 유람하며 처음으로 사람 잘못 본 게 자네라 궁금해서 불렀다네. 사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숨기기가 어려운데 자네는 내가 처음 보는 특이한 경우일세. 눈은 영 사악하기 그지없는데 하는 짓은 천하의 대협이 될 품성이니 도대체가!"
가슴이 뜨끔한 소천악이다. 역시 노강호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심은 깊숙이 감춘 채 태연하게 말하는 소천악이다.
"하하, 잘 보셨습니다. 사실 어려선 엉망으로 살았지요. 그 보상이란 기분으로 하는 일이지요. 부끄럽습니다."
"껄껄, 이런 이런. 노부가 실수했구려. 이런 진솔함이 있다니."
호쾌한 웃음을 짓는 백의신의였다. 진정 마음이 흡족한 그였다. 강호를 떠돌기 어언 오십여 년의 세월 동안 흔치 않은 협객을 본 기분이다.
"이러지 마시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제가 대접하지요."
"그럴까? 그럼 노부가 염치 불고하고 소협의 신세를 짐세."
죽이 착착 맞은 두 사람은 객잔을 골라 들어갔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이야기는 호의적으로 흘러갔다.
"이보게, 소협. 듣자하니 자네도 의술을 안다 하던데?"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가 뒷걸음치다 우연히 파리 잡은 꼴입니다."
손사래를 치며 얼른 부인하는 소천악이다. 의술 이야기가 깊어지면 정말 곤란할 터였다.
"허허, 겸손까지."
영문을 모르는 백의신의는 더욱 흔쾌히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소천악은 술보다 식은땀이 더 나올 지경이다.
"신의님!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라? 내가 가능한 일이라면 들어주지. 이번 협행의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다네."
호의적으로 나오는 백의신의를 보며 내심 쾌재를 부르는 소천악이었다.
"실은 제가 강호를 주유하다 보니 병자가 너무 많습니다. 변변한 환약 하나 없어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요. 혹시 상비약이 있다면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약값은 드리겠습니다."
"네 이놈! 감히 나를 무어로 보고 약값 타령인 게야?"
격노한 백의신의이 말에 가슴이 뜨끔한 소천악이다. 하지만 그가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던가! 바로 반격의 화살을 쏘아붙였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의원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고치는 성스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들이 약값이 없어 제대로 환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 흠!"
옳은 소리를 하는 소천악의 말에 답변할 거리가 궁색한 백의신의가 헛기침으로 응수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천악은 말을 이었다.
"그런 불상사를 막으려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백의신의는 또랑또랑 말하는 소천악의 말발에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행히 제게 약간의 돈이 있으니 어르신께서 약을 만들어주시면 제가 강호를 주유하면서 아픈 이에게 나눠 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래서 환약을 해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제가 강호를 다니면서 많은 병자들을 돌볼 것 같습니다."
혹하는 제안에 백의신의는 갈등에 빠졌다. 듣다 보면 맞는 말인데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 꺼려하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백의신의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좋네. 어차피 사람 구하자는 일인데 못 할 건 없지. 좋아, 해주지."
"감사합니다, 신의님. 역시 강호에 떠도는 소문대로 대단한 분이시군요"
얼른 치켜세우며 더욱 흥이 나는 술자리를 만드는 소천악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신의를 구워삶은 하루였다.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두 사람은 객방에서 함께 자고 다음 날 은하전장으로 찾아갔다.
"패를 찾으러 왔소이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분국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안내하는 총관을 따라 들어갔다. 은하전장 광동성 분국장 공리연(孔璃燕)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잠재우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어제 갑자기 나타난 양소아가 내민 패를 보고 기겁했다.
요구에 따라 오천 냥에 달하는 식량과 약재를 만드느라 밤새 죽을 고생을 한 터였다. 탈탈 털린 금고를 보고 허탈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 원흉인 소천악이 들어오자 이를 박박 갈았다.
"반갑소이다. 분국장님! 소천악이라고 하외다."
"어서 오십시오. 귀인이 오시니 영광입니다."
마음속 분노를 삭이고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지은 공리연이다.
"부탁 하나 드릴까 합니다. 그 패에 대한 다음 달분 오천 냥을 이분 백의신의에게 드릴 수 있소이까?"
가슴이 철렁한 공리연이다.
"귀인! 지금 하신 말씀은 혹시 다음 달분을 가불한다는 말씀입니까?"
"왜, 아니 되오이까?"
눈이 서서히 좁혀지는 소천악이다. 공리연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축객령을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그랬다면 바로 며칠 내로 분국장에서 잘려 실업자로 변하는 건 너무도 확실한 일이다.
전서구에 의하면 모든 편의를 봐주란 담대추광 은하전장주의 엄명이다. 그 지시를 어겼다간 평소 담대추광의 심성으로 보아 뻔한 결과였다. 마음을 정리한 공리연이 바로 대답했다.
"아니 되다니요? 해드려야지요. 걱정 마십시오."
"아, 역시 분국장님도 의를 아시는 분이군요. 그럼 그렇게 조치해 주시고 신의께서 여기 계시면서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살짝 읍을 하며 겸손을 보이는 소천악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공리연이다. 소천악은 그를 무시하고 백의신의에게 말했다.
"신의님, 여기서 약을 만드시고 그 환약을 하오문에게 전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환약마다 처방을 적어주셔야 혼란이 없을 듯합니다."
"오, 그러겠네. 그런데 환약을 만들어 다 주어야 하는가?"
오천 냥어치의 환약을 만든다 생각하니 일부를 가지고픈 게 의원의 기본 심리였다. 거기서 아무리 백의신의라 불리는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제게는 일부만 주시고 나머지는 신의께서 쓰셔야지요. 아무래도 저보다야 쓸데가 많지 않겠습니까?"
"껄껄, 이거 민망하네그려. 나도 의원이라 은자는 별로이지만 약에 대한 욕심은 크다네."
"하하! 역시 신의께서는 천상 의원이십니다."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공리연은 아니꼽기가 그지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즐겁고 한 사람은 지출되는 은자를 생각하며 쓰린 속을 부여잡는 시간이 지나갔다.
소천악은 일을 마무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백의신의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걸로 알고 물러갑니다. 부디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아무 염려 말게. 약재만 풍부하다면 필생의 환약을 만들어보겠네."
백의신의는 소천악의 손을 부여잡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이별을 마치고 은하전장 지국을 나선 소천악은 허기가 밀려오는 걸 느끼고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탁자에 앉자 점소이가 다가왔다. 막 주문하려던 소천악이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주머니에 은자가 달랑달랑한 것이 이제야 기억난 것이다. 그런 소천악의 내심을 모르고 점소이가 말했다.
"손님 무엇으로 드릴까요?"
"음… 뭐가 간단하고 소화가 잘되는가?"
"아무래도 간단한 건 먹기가 조금 그럴 겁니다. 기왕이면 우리 객잔 특선 요리로 한번 드셔보시지요?"
"됐네. 소면으로 주게. 속이 거북해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점소이가 아무 말 없이 걸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소면 하나! 다른 주문 없어요."
울컥 분노가 치밀었으나 마땅히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신경 끄기로 한 소천악이다. 소면 그릇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은 점소이가 뒤돌아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게 귀에 걸렸다.
"제길 소면 하나 먹는 주제에 자리는 우라지게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지랄이야. 구석에 처박혀 먹든가!"
막 젓가락을 들고 소면을 먹으려던 소천악이 마침내 울컥했다.
"이봐, 점소이. 이리로 와봐!"
차가운 소천악의 목소리에 잠시 흠칫했던 점소이였다. 하지만 그도 객잔 생활 삼 년에 알 것 다 아는 능구렁이였다.
"무슨 일이죠, 소면 손님?"
일부러 크게 말하며 다가서는 점소이였다. 보통 이러면 창피함을 느낀 손님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오늘 점소이의 일진은 최악이었다. 상대를 잘못 고른 탓이다. 점소이를 바라보던 소천악이 살벌하게 말했다. 목소리도 쩡쩡 식당 내를 울렸다.
"이 객잔에서는 소면에 양념으로 파리를 넣어 만드나?"
"파리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놀란 점소이가 소면 그릇을 바라보자 아닌 게 아니라 파리 한 마리가 조용히 빠져 헤엄치고 있었다.
"바꿔 드리죠."
얼른 소면 그릇을 들고 사라지는 점소이였다. 얼마 후 다시 소면을 들고 온 점소이가 그릇을 내려놓고 가려는 순간 소천악이 다시 불렀다.
"아주 놀고 있네. 이게 소면이야 파리국수야?"
놀라 다시 돌아선 점소이가 소면 그릇을 보자 다시 파리 한 마리가 유유히 둥둥 떠다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들고 오면서 볼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없었는데."
"없기는 뭐가 없어. 같은 눈인데 왜 그럼 내 눈에만 뜨이는 거냐? 이 파리 놈이 똥통에 붙어 있다가 온 놈 같은데. 이거 봐! 다리에 똥가루가 붙어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