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33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33화
"오오! 역시 신의이시구먼. 저걸 봐라."
"역시 소자가 사람은 잘 구해 온 듯합니다."
멀리 떨어진 두 모자의 대화는 혹시 진맥에 방해가 될세라 소곤거렸다. 귀로 다 듣고 있던 소천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통하는군.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약한 법!'
진기를 넌지시 그녀의 내부에 밀어 넣는 순간 소천악은 기겁했다. 혈도 자리를 지날 때마다 덜컹덜컹 걸리는 전신혈도였다. 오죽하면 진기가 제대로 지나가는 혈도가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제길! 아주 온몸이 병 덩어리네."
보통 사람이라면 일각이면 끝날 일이 무려 반시진이나 걸린 엄청난 신체였다. 이미 탁기가 눈에 이르러 전혀 눈을 뜨지도 못하는 담수란이 가냘픈 몸짓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아아악!"
"참으시오, 소저."
딱 한마디로 담수란의 고통을 일축한 채 겨우 대주천 한 번을 끝냈다. 소천악이 손목을 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의술에 문외한인 그도 아주 고약한 환자란 걸 바로 알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유소운 대부인이 초조하게 물었다.
"아, 잠시 기다려보시오. 생각할 게 있어서."
말문을 막은 소천악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명을 알 리가 없었고 고칠 방법도 몰랐다. 자포자기에 빠진 채로 생각에 잠겼던 눈이 번뜩 떠오른 묘안에 번쩍 뜨였다. 뭔가 알아낸 듯한 소천악의 눈빛에 유소운이 다급히 물었다.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셨는지요?"
기대에 찬 눈망울로 애절하게 쳐다보는 유소운에게 서슴없이 대답하는 소천악이었다.
"음… 거참, 희귀한 병인데 따님이 걸리시다니. 이 병은 혈도가 점차 막혀가는 질병이오."
"아아, 신의는 신의이시군요. 천하의 명의들도 일주일 내내 진맥해서 알아낸 걸 단번에 알아내다니."
유소운의 감탄에 귀가 번쩍한 소천악이 얼른 물었다. 소가 뒷걸음질치다 개구리 잡은 격이었다.
"다른 명의들이 혹시 병명을 말하던가요?"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모른다 하더군요."
실망스런 목소리로 힘없이 말하는 유소운을 보고 내심 쾌재를 부른 소천악이었다. 머릿속으로 바로 무공수련 때 배운 혈도를 응용하기 시작했다. 잠깐 표정 관리를 한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전신혈도 석화증이란 병입니다. 살면서 점차 온몸의 혈이 막혀 점차 돌처럼 굳어지면서 죽는 오백 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하는 희귀병입니다."
아주 그럴듯한 병명이 소천악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의서에도 없는 신종 병명 하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아, 드디어 병명이!"
감개무량한 대부인이었다. 급히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일렁거렸다.
"병을 아시니 치료법도 아시겠지요?"
"음… 그게!"
짐짓 곤란하다는 눈치를 팍팍 내뿜는 소천악의 말에 가슴이 철렁한 유소운 대부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칠 수 없는 병인가요?"
"이 병은 참으로 어려운 병이오. 고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못 고친다고 말할 수도 없소. 치료를 하려 하면 먼저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무슨 동의를 말씀하시는지요?"
"이 희귀병은 초기에 내가 봤다면 구 할 이상 치료가 가능했소. 물론 생명의 위험도 없소. 그러나 병을 모른 채 각종 영약을 수시로 먹였지요?"
부잣집이 안 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대답은 뜻대로 나왔다.
"네, 안타까운 마음에 각종 산삼이나 하수오 등을 천금을 들여 구해 먹였지요."
"그게 치명적이오. 영약의 기운이 막힌 혈도에 차곡차곡 쌓여 더욱 병을 키운 것이지요."
"아니, 그럼 우리가 준영 약이 오히려 독이 된 건가요?"
"음… 유감스럽지만 현재로서는 그렇소."
"이럴 수가! 어찌 어미가 돼서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다니. 이런 통한이! 흑흑!"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살리려고 애쓴 것이 오히려 딸의 생명을 갉아먹었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메여왔다. 오열하는 대부인을 보며 약간 양심의 가책이 올라왔지만 바로 눌러버리고 다시 궤변을 늘어놓는 소천악이었다.
"딱 오 할입니다. 치료 확률이 반은 살고 반은 죽는 치료법이지요. 그래도 한다 하면 내 시술할 생각이 있습니다만 어려운 결정입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시는 게 현명할 듯합니다."
소천악은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알아놓고 말했다. 반 이상이 죽는다는데 치료하라 할 부모가 없다는 신념에서 나온 말이었다. 결국 그냥 빠져나가겠다는 속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보답에 혹해 이 자리에 온 자신이 바보스럽기가 한량없었다. 슬슬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한 소천악이었다. 그 말에 이젠 거꾸로 유소운 대부인이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아미를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던 대부인이 참담한 심정으로 마음을 토했다.
"아무래도 저 혼자 결정하기는 어렵군요. 장주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판단해야 할 거 같아요. 죄송스럽지만 하루만 더 유하시면 안 될까요?"
"어렵지 않소이다. 그럼 현명한 판단 내리시길 바랍니다. 아무래도 어려운 시술이라 별로 권하고 싶진 않습니다. 실패하면 다시는 따님의 얼굴을 보기 어렵다는 걸 항상 기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 문단속마저 철저하게 하는 소천악이었다. 행여나 하는 유소운의 기대마저 산산이 짓밟아 놓았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은하전장의 총관인 마광진이었다.
"대부인 마님! 지금 장주님께서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약을 못 구했다고 하시면서 내일 오전 일찍이 장으로 오신다 합니다."
"아아, 이럴 수가!"
털썩 주저앉은 유소운이었다. 혹시나 했던 희망 하나가 바로 꺼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멍했던 그녀가 벼락같이 소천악을 돌아봤다. 이미 소천악은 일이 꼬여간다는 예감이 서서히 고개를 든 상태였다.
유소운이 결심한 듯 소천악에게 다부지게 말했다.
"아무래도 최후의 희망은 신의님밖에는 없는 거 같네요. 장주님이 돌아오시면 바로 연락드리지요."
심각해지는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린 소천악이었다.
"제길! 이젠 전서구 새끼도 안 도와주네."
"네? 전서구가 뭐라고요?"
의아한 듯이 유소운이 묻자 얼른 말을 돌리는 소천악이었다.
"아니요. 전서구가 역시 훌륭하게 자기 몫을 한다고 했습니다."
담명후의 안내로 은하전장 내 귀빈객실에 머문 소천악은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담수란의 치료는 포기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젠 앞으로 자신의 일을 걱정할 처지였다. 아무래도 색마를 먼저 잡아야 자신의 목적이 수월할 듯했다. 하오문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던졌다.
"자식들, 지금쯤 똥줄이 타겠지.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리니 얼마나 좋은 일이야. 오비이락(烏飛梨落)이 딱 이 말이구나. 원래 까마귀 날면 배가 떨어지는 거야. 흐흐!"
소천악은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도끼질에 미쳐 기루 순방을 못한 아쉬움을 채우기로 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대비하는 마음으로 여심에 대해 조금 더 지식을 쌓을 생각이었다.
멧돼지의 비애를 느낀 그는 만리장성은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아무리 설쳐봐야 별 효용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낀 터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귀빈용 침대에 누웠다. 최고급 침대답게 눕자 포근한 기운이 살며시 올라와 고민거리는 머리 귀퉁이에 처박은 채 아주 편한 밤을 보냈다.
이튿날 모처럼 단잠을 자느라 해가 높이 걸려도 침대에서 꼼짝도 안 하는 소천악을 깨우는 손길이 있었다.
"신의님! 지금 장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살며시 흔드는 손에 부스스 일어난 소천악이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알았다. 채비하고 간다고 전해라."
소천악은 투덜거리며 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장주에게로 갔다.
"신의님, 어서 오시오. 제가 은하전장의 장주를 맡고 있는 담대추광(澹臺追光)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포권으로 맞이하는 담대추광이었다. 얼떨결에 소천악도 포권을 갖추며 답례하였다.
"반갑소이다. 담 장주님, 전 불초말학 소천악이라고 합니다."
"어제 부인에게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밤새 고민하다 결론을 내려 이렇게 신의를 모시게 된 점 양해 바랍니다."
"어려운 결정이지요. 부디 현명한 결정 내린 걸로 알고 이만 물러갑니다."
"신의님, 가시긴 어딜 가신다고? 잠시만요."
"아니, 시술을 포기하는 거 아닌가요?"
천장을 바라보는 담대추광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서리서리 새겨져 갔다.
"휴우, 어차피 다른 의원들도 이제 불과 한 달여밖에 못 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디다. 어차피 가야 할 녀석이라면 후회 없이 시술이나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소이다."
뜻밖의 말에 당혹감을 지우지 못한 소천악이 급히 만류했다.
"헉!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시술을 안 하면 그나마 한 달이라도 따님을 볼 수 있지만 시술한다면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상봉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오. 그렇게 말하는 신의님을 보니 더욱 신뢰감이 갑니다. 과장된 말보다 진솔한 말씀을 해주시는 게 비록 마음은 아프지만 용기를 주게 만드네요."
말하는 담대추광 장주의 눈빛엔 굳은 신뢰가 흘러나왔다.
"이런… 허!"
어이가 없는 소천악이었다. 피하려 한 말이 오히려 더 큰 화로 변해 다가왔다. 담대추광 장주는 남의 속도 모르고 다시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절대 신의님을 원망하지 않겠소이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그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리다. 부디 최선을 다해주시길 아비로서 부탁드립니다."
"아, 네, 최선을 다해야지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엉겁결에 대답하면서도 소천악은 일이 점점 꼬여간다는 느낌이 진해졌다. 담대추광 장주의 안내를 받아 다시 담수란의 처소로 가는 발길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아닌 돼지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후 담수란의 침대 앞에는 담대추광 장주를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는 소천악의 전신에는 위엄이 주르르 흘렀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바엔 즐기기로 작정한 터였다. 최선을 다해 근엄한 표정을 짓는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신의님! 이제 치료를 시작하시지요."
골치가 아파오는 소천악이었다.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려 마지막 안간힘을 써보았다.
"장주님, 이 치료는 사실 남녀가 유별한데 어려운 점이 많아요! 비록 내가 의원이라 하지만 명색이 사내대장부인데……."
"아무 염려 마시오, 신의님. 이미 모든 걸 다 수용하기로 결심한 터입니다. 어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려운 치료인 만큼 낯을 붉힐 일도 있다는 각오를 다진 터입니다. 어찌 사람의 목숨을 체면 따위로 말할 수 있겠소이까? 아무 걱정 마십시오."
"어험, 그렇다면야……."
마지막 희망마저도 물거품이 된 소천악이었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니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
"수란아, 아무쪼록 잘 견디도록 해라. 신의께서 너를 꼭 고쳐주실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