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6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6화
우여곡절 끝에 멀리 단목세가가 보였다. 단목기 향주는 마차 옆으로 말을 몰고 와 소천악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신의님, 이제 다 왔습니다. 그동안 여정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새 정문 앞에 도착한 일행은 단목기향주를 알아본 정문 경비무사의 인사를 시작으로 단목세가로 천천히 들어갔다. 말을 탄 무사들이 내려서 환자들을 들것에 실어 옮기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소천악은 한가로이 단목기 향주와 함께 단목세가로 들어섰다.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세가는 고풍스러운 저택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 오랜 역사를 새삼 느끼게 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세가 가운데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고 연못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캬, 좋네.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가라 뭐가 달라도 다르네."
감탄사를 연방 던지는 소천악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단목기 향주였다. 자신이 몸담은 곳을 칭찬하는 자를 미워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의님, 자, 여기가 세가의 중심이라는 본 저택입니다. 오신 김에 인사를 드리시지요."
"아, 그러시지요. 식객이 왔으면 당연히 주인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지요."
"역시 신의께서는 의술뿐만이 아니고 넓은 이해심도 겸비하신 분이군요."
더욱 감탄하는 단목기 향주는 시꺼먼 소천악의 속내는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다. 대청에 올라서는 그를 따라서 올라가는 소천악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굴렀다. 서찰에 적힌 단목산산(端木珊珊)을 찾아내려 찰나의 순간에도 눈은 쉬지 않고 대청 안의 사람들을 살폈다.
순간 그의 눈이 번쩍했다. 대청 안 태사의에 앉아 있는 노부인 옆에서 아리따운 한 여인을 발견했다. 서찰에 적힌 단목산산인 걸 한눈에 알 정도의 미인이었다.
백설같이 하얀 피부에 호수를 닮은 눈동자는 마치 그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적당히 균형 잡힌 몸매에까지 뭐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절세미인이었다.
소천악은 냉정한 시선으로 하나씩 뜯어 평가하기 시작했다. 족자 속의 미인 얼굴을 뇌리에 떠올리며 단목산산을 바라볼수록 어딘지 몰라도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제길! 딱 꼬집어 이 푼이 모자라네.'
내심 투덜거리는 소천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엔 전혀 변화가 없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단목기 향주가 들어서자 대청 안의 인물들이 모두 반가운 기색이 보였다. 서로 앞다투어 인사말을 건네주었다.
"향주, 고생했어. 적들의 계략에 속아 많은 고초를 겪게 해서 미안하이."
단목세가의 총관이자 지략가인 단목장청(端木長靑)이 미안한 듯이 말했다. 단목기 향주는 미소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게 어찌 총관님의 잘못이시겠습니까? 다 현장에서 판단을 잘못한 제 잘못이 더 큽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단목기 향주의 모습은 강인한 무인의 표상 그대로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소천악이 속으로 비웃었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편하게 '당신 머리가 나빠서 내가 고생했어. 어떻게 책임질래?' 이게 맞는 말이지. 아주 혓바닥에 죄다 꿀 바르고 말하네.'
단목기 향주는 뚜벅뚜벅 걸어서 태사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저 단목기 향주 외 10명의 삼향대 무사귀환을 보고드립니다. 네 명이 중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길에서 신의를 만나 목숨을 건지고 돌아왔습니다."
"오, 수고했소, 삼향주. 그런데 신의라니요?"
난데없는 말에 남취려 가주 부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저기 뒤에 서 계신 분이 놀라운 의술을 지니신 의원이십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건 본가의 어려움을 아시고 부상자를 치료하시겠다는 겁니다.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막무가내라 어쩔 수 없이 동행해 돌아왔습니다."
"오, 그런 정의로운 분이 아직 이 강호무림에 계시다니 흐뭇한 일입니다. 어서 인사를 시켜주세요."
가만히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소천악은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이건 아주 단목세가의 정의로움에 반한 신의가 스스로 달려온 걸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하도 같잖아서 대화를 듣는 걸 포기하고 상상에 빠져들었다.
'아주 놀고 있네. 마음대로 해봐라. 나는 기왕 온 김에 단목산산의 얼굴이나 실컷 봐야겠다. 아무리 봐도 예쁘긴 하네. 저 정도면 어디 가도 손색은 없는데 그냥 안주해 버려?'
고민하는 소천악의 머리에 비웃는 혈사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데려가면 '네놈 주제에…….' 이런 타령을 하면서 약 올릴 게 뻔했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저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혈사부의 콧대를 확 뭉개주리라는 결심은 더욱 굳어갔다.
"이보시게, 신의. 내 말이 안 들리는가?"
상념을 깨우는 소리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린 소천악의 앞에 아까 보았던 단목청휘 총관이 이상하단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허허, 그랬구려. 저기 우리 가주 대행이신 가주 부인께서 아까부터 부르셨다네. 가보시게."
"네, 그러지요."
소천악은 당당하게 걸어서 태사의 앞으로 갔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단목세가 인물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가주 대행을 대하는 예의가 약함이 못마땅했다.
단목세가 가주인 단목성의 부인인 남취려는 이를 개의치 않고 반가이 소천악을 맞았다.
"아, 반가워요. 전 임시 가주를 맡고 있는 남취려라고 해요. 우리 단목세가 무사들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사해가 동도라고 했습니다. 강호인으로서 어려움을 겪는 동도를 외면할 수는 없지요."
"오! 역시 정의로운 신의시군요. 음, 죄송한 말씀이나 현재 우리 세가에 부상자가 많습니다. 조금 도와주시면 후히 사례하지요."
소천악은 시큰둥한 마음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듣자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호쾌한 소천악의 답변에 얼굴 가득 미소가 감돈 남취려가 옆에 앉아 있던 단목산산에게 말했다.
"산산아! 어서 저 신의님을 부상자가 있는 전각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제가요? 다른 사람을 시키시지요."
"이런, 우리 세가를 도와주러 오신 분이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엄하게 꾸짖는 어머니를 보며 입술을 삐죽거리던 단목산산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니 그 몸매가 더욱 도드라져 대청이 환히 빛나는 느낌이었다.
"이리 절 따라오세요."
퉁명스럽게 말하며 앞서 가는 단목산산을 어이없이 쳐다보는 소천악이었다. 그이 입이 묘하게 비틀리더니만 예상 밖의 말이 나왔다.
"싫소. 혼자 가슈. 난 이 길로 다시 세가를 나가 길을 떠나겠소."
"아니, 뭐라고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귀가 막힌 모양이시구려. 난 떠난다고 했소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소천악은 성큼 신형을 돌려 대청 밖으로 나갈 태세였다. 뜻밖의 사태에 대청 안의 모든 이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놀란 남취려가 급히 물었다.
"아니, 신의,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신 거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이리 선의로 도와주러 온 사람이외다. 그런데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다급한 남취려가 다시 물었다.
"누가 푸대접을 했다는 겁니까?"
"사람이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겁니다. 저기 계신 낭자가 나에게 한 말은 마치 하인 부리듯 하니 심히 불쾌하오이다."
단목산산은 정확히 자기를 집어 말하는 소천악을 보고 창피함과 분함이 동시에 마음에 떠올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요?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지요?"
버럭 소리치는 단목산산이었다. 소천악은 한심스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지금 하시는 태도가 과연 손님을 대하는 세가의 자녀분의 태도입니까? 스스로 반성하시오."
준엄하게 꾸짖는 소천악의 일갈에 단목산산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제야 사태를 완전히 파악한 남취려 등 단목세가의 수뇌진들도 겸면쩍은 마음에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노기를 숨기지 않은 남취려의 노성이 대청을 울렸다.
"산산아, 당장 사죄드리고 용서를 받지 못할까?"
평소와 달리 엄하게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 산산은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분함에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이 소천악에게 사죄를 드렸다.
"신의님, 소녀의 실수를 용서해 주세요."
"알았소. 다시는 이런 일이 있다면 아니 될 것이오."
심정을 감추고 엄숙히 말하는 소천악은 일대신의로 손색없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분위기는 바로 풀어지고 산산은 할 수 없이 예의를 다해 소천악을 모시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대청 안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감히 세가의 금지옥엽을 욕보인 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시선이 길게 소천악의 꼬리를 따라갔다. 편협한 세가의 시야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냉전을 거듭하면서 걸어가던 두 사람이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전각 안에 들어서니 부상자가 수도 없이 많이 누워 있었다.
'제길! 더럽게도 많네. 뭐 이리 다친 놈들이 많아!'
소천악은 내심 투덜대며 맨 앞의 부상자 앞에 섰다. 그의 양옆에는 치료를 도와주러 삼향대 무인들이 여섯 명이 서 있었다.
"댁들은 부상자가 못 움직이게 꽉 잡으시오."
한번 경험한 일이라 삼향대 무인들은 자연적으로 다리를 심하게 검으로 베인 부상자의 나머지 팔과 다리를 꽉 잡았다. 소천악은 서슴없이 다친 다리에 감긴 천조각을 거칠게 떼어냈다.
"크으악!"
처참한 비명이 들리며 부상자는 뇌를 찢는 듯한 고통에 사지를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꽉 누르고 있는 삼향대 무인 덕분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천악은 전과 같이 우악스럽게 상처를 치료해 갔다. 상처 부위를 마구 헤집으며 고쳐가는 그의 손길에 참다못한 부상 무인이 악을 썼다.
"으아악! 이 새끼야! 차라리 죽여라!"
욕을 먹은 소천악의 안색이 음산해지며 스산하게 말했다.
"조용히 하시오. 그리고 더 욕하면 아주 골로 보내겠소. 뒈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시오. 병신 면하게 해주는데 욕하고 지랄이세요?"
두려움을 주는 말에 욕하던 부상 무인이 입을 다물려 했으나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너무 아프단 말이야."
"닥치세요! 이 고통 십 년 동안 견딘 놈도 있어요. 확 아가리 찢기 전에 다무시오."
도무지 의원 같지 않은 말투에 부상 무인이 서서히 질려갔다. 옆에서 잡아주던 삼향대 무인들도 죽어도 안 다치겠다는 결심을 더욱 다져갔다. 물론 어떻게 하나 지켜보던 단목산산도 소천악의 거친 말투와 욕설에 안색이 하얗게 변해갔다.
어이가 없는 단목산산이 단목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 저런가요?"
"음, 본래 신의란 자들은 상식 밖의 행동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요. 일단 지켜보십시오."
"제가 보긴 신의가 아니라 괴의 같네요.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