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2화
"살성(殺星)!"
겨우 입을 통해 나온 섬정기의 말에 피식 웃는 소천악이었다.
"왜 나를 살인마로 만드시오? 내 경고했었소. 내 앞에서 검이나 무기를 꺼낸 자는 살려두지 않는다고 말이오."
"으으! 이럴 수가."
탄식을 토하는 섬정기였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다가서는 소천악을 보고 손을 저으며 다시 소리쳤다.
"멈춰라! 다가오지 마라."
공포에 질린 섬정기의 목소리였다. 소천악은 아예 무시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십여 장의 거리는 바로바로 좁혀져 왔다. 목을 조이는 사신의 손길이 점점 다가오는 느낌에 섬정기의 안색은 갈수록 사색이 되어갔다.
불과 오 장여로 소천악이 다가서자 섬정기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때였다.
"멈춰라!"
웅혼한 목소리가 들리며 맨 앞에 날아오는 검은 무복의 인영을 따라 수십 명의 고수들이 바싹 뒤쫓아왔다. 흑의무복인은 다름 아닌 흑사방주인 상호쾌검 조일비였다. 급보를 듣고 놀라 급히 찾아온 터였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쓰러진 무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격노한 표정으로 소천악을 노려보며 발끈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혼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느냐?"
흑사방주 조일비의 추궁에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어디긴 어디겠소? 겁 없이 설치시는 분들이 사시는 흑사방이라는 쓰레기 모임터겠지요."
"이런 무엄한 놈. 감히!"
"조용히 하시면 좋겠소이다. 어차피 여러분들이 날 부를 땐 선한 뜻으로 안 부른 거 잘 알고 있소. 어차피 공존이 어렵다면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무공으로 결정하는 게 강호의 율법이 아니겠소?"
"저런 육시랄 놈이! 여봐라, 저놈을 당장 핏덩이로 만들어라."
조일비의 명이 떨어지자 이십 명의 흑사권대가 바로 허공으로 날아들었다. 구궁의 궤를 짚고 밀려오는 그들의 기세는 자못 살벌했다. 권각이 수도 없이 난무하며 소천악의 전신을 노리고 들어왔다.
소천악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새 검을 집어넣고 질풍광마권을 시전했다. 폭풍을 기초로 창안한 권법은 회전하는 소천악을 따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흑사권대를 맞이했다. 고작해야 광동성 땅에서 설치던 무인들이 서장무림을 호령하던 질풍광마의 절기를 감당할 리가 없었다. 보법에 따라 신출귀몰하며 흑사권대의 무인들을 난타하는 소천악이었다.
평소 신조대로 사혈을 피해 두들겼지만 담겨진 내력은 맞은 흑사권대의 무인들을 고통으로 밀어넣었다.
"커억, 왼쪽이다!"
대혈을 얻어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무인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더니만 얼마 안 가 흑사권대 무인들은 모조리 땅을 침대 삼아 퍼져 버렸다. 바라보던 흑사방주 조일비의 눈이 더욱 좁혀졌다.
"저런 괘씸한 놈! 흑사혈검대는 뭐 하는가? 어서 저놈을 도륙내 버려라."
격노한 조일비의 말에 늘어서 있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존명! 흑사혈검대는 모두 저놈을 포위하라!"
수십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소천악을 향해 덤벼들었다.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천악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내 분명히 경고했었소. 검을 든 분은 결코 한 분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살벌한 말과 함께 어느새 손에 든 검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풍혼검법이 펼쳐졌다. 이에 뒤질세라 삼재진을 구성하고 덤벼오는 흑사혈검대의 검날이 번뜩였다. 검과 검이 충돌하며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풍혼검법은 강하게 때론 유하게 상대의 검을 자유자재로 농락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보법을 따라 은색의 검광으로 가득했다. 다가올 때는 느렸으나 목표를 잡은 검은 쾌검으로 돌변했다. 다변에 쾌가 섞이자 번뜩이는 신형만이 간신히 보일 뿐 흑사혈검대 그 누구도 소천악을 잡을 수 없었다.
스치듯 흑사혈검대원 하나를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일말의 인정도 없는 살검은 여지없이 숨통을 끊어놓았다. 양떼에 뛰어든 거친 늑대의 폭풍우였다. 아무도 피할 수 없었고 아무도 살 수가 없었다.
일각여가 지난 후 이미 이십 명의 흑사혈검대는 아무도 서 있지 못하였다. 오직 소천악만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흑사방주 조일비를 노려봤다.
"이럴 수가! 흑사혈검대가……."
경악에 겨워 조일비가 넋이 반쯤 나가고 있었다. 그토록 어렵게 키워낸 흑사혈검대가 고깃덩어리로 변한 걸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이젠 높으신 분 차례인 듯하오이다. 어서 검을 드시고 오시구려. 편하게 일검으로 저승길로 보내드리지요."
소천악이 말에 흠칫한 조일비가 검을 뽑아 들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놈은 절대 검을 들고 덤비는 자는 살려두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잠시 갈등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자존심보다는 생명이 더 귀중했다. 검을 휙 집어던진 조일비가 호기를 부렸다.
"발칙한 놈! 너 같은 녀석에겐 검이 아깝다. 권으로 상대해 주마."
주먹을 굳게 쥐고 다가서는 조일비를 보며 어이가 없는 소천악이었다. 얼핏 봐도 검도의 고수이지 절대 권법의 달인은 아닌 걸로 보였다. 이내 조일비의 얄팍한 속셈을 짐작한 소천악이 내심 배꼽을 잡았다.
"후후, 역시 방주라 이건가요? 현명하긴 하네요!"
조일비는 자신의 의도를 간파한 듯한 소천악의 말을 들으며 수치심에 이를 갈았다.
"보여주마. 흑사방주의 진면모를."
가볍게 허공으로 일 장을 날아 쏘아오는 그의 손은 응조수(鷹爪手)을 펼쳐내고 있었다. 마치 손가락을 매의 발톱처럼 구부려 상대를 공격하는 조법이었다. 날카로움과 강맹함을 겸비한 위력이 허공을 격하고 소천악을 노리고 거리를 좁혀왔다. 가만히 지켜보던 소천악의 몸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질풍광마권이 여지없이 펼쳐지며 갈고리로 구부러진 조일비의 손을 강타했다.
빡! 퍼퍼퍽!
"크윽, 이렇게 빠른 권법이."
눈 깜짝할 시간에 이미 응조수가 모두 막히고 역으로 전신대혈을 십여 차례 강타당한 조일비가 신음을 토했다. 이미 그의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흘러내렸다. 내장이 가볍게 흔들려 이미 저항할 힘을 잃어갔다.
당연한 결과였다. 검을 주 무기로 한 조일비가 검을 포기할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다. 조일비의 예상대로 소천악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조일비였다. 검으로 지지 않았으니 명예도 보존하고 목숨도 살아난 탁월한 선택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나 그가 모르는 건 소천악이 애초에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편법을 쓸 리가 없었다.
흑사권대와 흑사혈검대가 쑥밭이 되고 흑사방주마저 패하자 이미 장내의 분위기는 소천악에게 넘어왔다. 뒤늦게 달려온 일반 무사들은 감히 소천악에게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흑사방의 일류고수들도 모조리 죽거나 다치게 한 절정고수였다.
자기들 같은 일반 무사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주춤대는 무사들을 외면한 소천악은 바로 누워서 신음하는 조일비의 목덜미를 잡아 들었다. 바로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섬정기 총관에게 말했다.
"방주 집무실로 안내하시지요. 싫으시면 말씀하시오. 바로 목 위의 성가신 걸 잘라주지요."
말하면 실천하는 소천악을 본 섬정기는 기겁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오, 그래 주시겠소? 서로 존대하니 얼마나 분위기가 좋소이까. 안 그렇소?"
"맞습니다. 제가 잠시 경솔해서."
목숨 앞에서 호기를 부릴 만큼 강심장이 아닌 섬정기는 나름대로 접대하느라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걸어가는 소천악을 감히 막아서는 흑사방도는 없었다. 죽고 싶지 않은 건 인지상정이었다.
게다가 흑사방주가 포로로 잡혀 있어 더욱 핑곗거리가 훌륭한 방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길을 환히 터주었다. 잠시 후 방주 집무실에 들어선 소천악은 급한 대로 방주의 대혈을 찍어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치료를 벌벌 떨면서 보고 있던 섬정기 총관은 살 길이 보이는 것 같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죽이려면 굳이 치료할 이유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섬정기였다. 흑사방주 조일비는 정신이 들자마자 보이는 소천악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정신이 드시나요? 이제부터 서로 존중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잔잔한 소천악의 말이 바로 들리자 공포에 질린 눈이 차츰 정상을 찾아갔다. 죽이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나름대로 다시 위엄을 차린 그가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거요?"
눈치 빠르게 대응하는 조일비를 보며 만족한 미소를 보이던 소천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움직이면 당연히 보상이 따라야 하는 게요. 더구나 목숨을 빼앗으려 한 경우는 좀더 많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제야 소천악의 속셈을 간파한 조일비가 더욱 마음을 놓았다. 협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신이었다.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우리가 눈이 있어도 고수를 못 알아보았으니 당연히 그 보답을 해드려야지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일단 방주께서 말씀해 보시오."
곰곰이 생각하던 흑사방주가 기분이라는 듯이 말했다.
"좋소. 보상으로 은자 천 냥을 드리겠소!"
소천악의 눈빛이 바로 살광을 번쩍 뿜었다. 그 눈빛을 정통으로 받은 조일비의 가슴이 서늘해질 무렵 귓전을 울리는 말이 있었다.
"방주께서는 농담도 잘하시는구려!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겨우 천 냥으로 때우려 하시는 게요?"
"아니, 그럼 소협께서는 얼마를 바라시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오천 냥 내시오. 더 받으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죽인 자들이 흑사방의 고수들이고 해서 특별히 할인해 준 금액이오."
거금을 부르는 소천악의 말에 깜짝 놀란 조일비가 생각에 잠겼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그를 소천악은 싱글싱글거리며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심사숙고하던 조일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 큰돈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거부하는 조일비를 보자 소천악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없소이까? 그럼 몸으로 때워야지요."
소천악은 바로 얼굴색을 싹 바꾸고 말했다. 아차 하는 느낌이 든 조일비가 미처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압한 그의 손가락을 하나 잡고 바로 힘을 주었다.
뿌드득!
"크아악! 이런 잔인한."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방주실에 메아리쳤다.
"잔인하긴 뭐가 잔인하오이까? 내가 귀하신 당신을 죽였나요? 잔인 타령하게. 아직도 돈 없소이까?"
소천악의 말은 이제 아주 시비조로 굳어졌다.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바뀐 태도였다. 내심 이를 가는 흑사방주 조일비가 역시 반말로 소리쳤다.
"없어! 아무리 뒤져봐라 있나!"
"없어요? 정 그렇게 나오면 할 수 없지요. 일단 몸으로 때우시지요."
천천히 다시 손을 뻗어오는 소천악의 몸짓에 기겁하는 흑사방주 조일비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