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1화
그 피가 곧 소천악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무릎을 탁 쳤다.
"저거 봐라. 이게 바로 장인정신이야, 장인정신. 피가 나도 상처가 나도 연주하는 저 자세 저게 바로 멋이니라."
복장 뒤집는 소리를 연발하는 소천악에게 질린 기녀가 마침내 분을 못 참아 실신했다.
"햐, 저거 봐라. 최선을 다하는 자세. 멋지구나 멋져!"
감탄하는 소천악을 보며 기녀들은 어이가 없었다. 무식해도 저리 무식한 놈은 살다 살다 처음 보는 기녀들이었다.
비파 타던 기녀의 기절과 더불어 술자리는 파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이 지나자 여전히 상황은 맷돼지와 토끼 사이를 넘나드는 걸 가슴 아프게 느끼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른 묘책을 찾아야 할 시간인 걸 절실히 느낀 소천악은 한참 해가 동녘으로 뜬 후에야 일어난 아진 등을 만나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이제 마음대로 다니시지요. 전 한동안 생각할 게 많소이다."
아진은 내심 펄펄 뛰고픈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인들은 그저 따를 뿐이지요."
인사치레로 하는 아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홀로 사라져 갔다.
객잔에 방을 잡고 묵으면서 그는 나름대로 강호 행보에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사부의 전철을 되밟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 계획을 세워갔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처세를 위해 본성을 억제할 때와 마음대로 할 때를 명확히 구분해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이틀 동안 꼬박 생각해야만 했다. 마침내 어느 정도 행동방침이 정해지자 붓을 놓았다.
적어놓은 글을 보고 외우고 또 외웠다. 뇌리 깊숙이 박아놓지 않는다면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소천악은 자신의 성격이 결코 좋다고는 보지 않았다. 고치지 못할 바엔 위장이라도 하기로 작정했다.
새로 만든 자신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가자 아무 생각 없이도 술술 입에서 흘러나올 경지에 이르렀다.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지은 소천악이 서찰을 불에 태웠다. 혹시라도 누가 이 글을 본다면 곤란할 위험은 사전에 막고 보자는 꿍꿍이셈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소천악은 기루에 가고픈 유혹을 일단 억눌렀다. 멧돼지니 토끼니 하는 말을 듣기가 싫었다. 최소한 풍류공자로 손색이 없을 때까지 참기로 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는 글귀를 기억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간만에 객잔에 가 술 한잔을 마시고픈 생각이 들자 아무런 고민 없이 방을 나섰다. 삼 일 만에 나서는 그를 보고 점소이가 반색을 하며 다가섰다.
"공자님, 어인 일로 이리 행차를?"
"하하, 반갑군요. 좋은 경치가 보이는 곳에 술상 하나를 봐주시게나."
훈훈한 미소와 함께 소천악은 당연히 은자 몇 냥을 점소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그의 처세술이었다. 주위에 반기는 자를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다.
점소이는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며 이층 자리 중에 특석을 얼른 마련해 주었다. 술과 요리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탁자 위에 차려졌다. 그는 처음처럼 게걸스럽게 먹는 추태는 부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점잔을 빼며 품위 있게 술과 요리를 배에 집어넣었다. 다만 품위만 있을 뿐이지 결코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술과 요리는 보통 사람의 배가 넘는 속도로 비워져 갔고 술기운이 알싸하게 돈 소천악이었다.
제1-5장 무공 초현 - 대가 없는 고생은 없다
흥겨운 술자리가 익어갈 무렵 일층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취를 잃어버린 소천악이 이마를 찌푸릴 쯤 이층으로 올라오는 요란한 발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슬쩍 쳐다본 계단 위로 험상궂게 생긴 무인들이 십여 명 보였다. 그들은 올라오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그들과 소천악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안광이 번뜩거리는 무사들이었다. 아무런 거침 없이 성큼성큼 소천악에게로 다가섰다.
"네놈이 소천악이란 놈이야?"
대뜸 욕설이 들려오자 소천악은 바로 발작하며 일어설 뻔했다. 꾹 눌러 참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애써 품위를 지키며 말했다.
"그렇소만. 무슨 일이오?"
"허튼 수작 말고 조용히 우리를 따라와라. 우리 흑사방 총관님께서 널 보자고 하신다."
"아니, 무슨 일로?"
짐짓 당황스럽다는 듯 소천악이 말하자 무사들은 그가 겁을 먹었다는 걸로 인식했다. 곧 커다란 웃음이 객잔을 요란하게 울렸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 우리는 흑사방의 무사들이니라. 순순히 일어서지 않으면 사지가 잘려 끌려갈 것이야."
"거참, 무섭게도 말하시는구려. 알았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갑시다."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걸어가는 소천악의 사방을 포위하며 가는 무사들이었다. 혹시나 도망이라도 칠세라 잠시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흑사방의 악명은 광동성 내에서 유명하다는 티가 바로 났다. 객잔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점소이만이 안타깝다는 듯 발만 동동 굴렀다.
거리를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가자 커다란 장원이 눈앞에 들어왔다. 무사들의 인도로 가까이 접근하니 정문 앞에 검을 찬 네 명의 경비무사가 보였다. 그들 머리위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가 쓰여진 현판이 보였다.
흑사방(黑砂房)
광동성을 주름잡는 사파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사파였다. 해남도(海南島)를 거점으로 수적질을 하던 이들 중 이탈한 자들이 모여 만든 방파였다. 방주는 수적 무리의 부두령이었다가 흑사방주로 변신한 조일비(趙一飛)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상혼쾌검(傷魂快劍)으로 광동성 내에서 이름을 떨친 고수였다.
이런 사실을 소천악이 알 리가 없었다. 설령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을 보일 리 만무했다. 그저 자신의 계략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마음에 든 기분이었다.
무인들은 장원에 들어서서 부지런히 한 곳으로 소천악을 몰아갔다. 피식 실웃음을 지으며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소천악의 안광이 순간순간 번쩍거렸다. 하도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무사들 누구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이윽고 한 전각 앞에 다다르자 무사 한 명이 전각 안으로 소리쳤다.
"총관 나으리! 소천악이라는 놈을 잡아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얼마 되지 않아 전각의 문이 열렸다. 문을 통해 사십대의 남자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났다. 비각탈명(飛脚奪命) 섬정기였다. 흑사방의 총관 직을 맡고 있는 그는 사실상 제2인자였다.
무공실력은 별볼일없었으나 잔머리를 인정받아 조일비의 신임이 두터운 자였다. 가만히 서 있는 소천악을 바라보던 그의 입이 스산한 말을 토해냈다.
"네놈이 감히 우리가 돌보고 있는 도박장을 턴 괘씸한 놈이냐?"
대뜸 들려오는 반말에 기분이 상한 소천악이 곱게 응수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어차피 시비를 걸려고 한 일이니 더욱 거칠게 대답했다.
"그 새끼 참 입 거치시네요. 그렇게 떠드는 분은 뭐 하는 분이시오?"
"뭐라고?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어디긴 어디겠소! 보아하니 도박장이나 봐주면서 떡고물이나 챙겨 먹는 쓰레기 같은 분들이 모여 사시는 곳이네요."
거침없이 터져나오는 소천악의 독설에 섬정기 총관은 물론 무사들의 얼굴에도 깊은 살기가 떠올랐다. 이미 무사들의 손은 등 뒤에 찬 검에 올려져 있었다. 어이없어 가만히 바라보던 섬정기 총관이 씹어뱉듯 말했다.
"아주 겁이 없는 놈이군. 좋게 말해 들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했건만. 쯧쯧!"
"총관님이 안 살려주셔도 잘 살 거 같소. 웃기는 소리 마시고 싸우려면 싸우시고 아니면 돌아가겠소."
차갑게 응수하는 소천악을 보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 섬정기였다. 저런 행동을 하는 경우는 딱 두 부류밖에 없었다. 하나는 절기를 숨긴 고수이거나 다르면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다. 아무리 봐도 고수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혈도 튀어나오지 않아 더욱 생각에 확신을 가진 섬정기가 귀찮은 듯 지시했다.
"여봐라! 저놈 정신 번쩍 나게 팔 하나 잘라라.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제대로 귓구멍에 들어가겠다."
"존명! 총관 어른."
가볍게 읍을 한 무사들이 바로 검을 뽑아 들고 소천악을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소천악의 입이 열렸다.
"검을 든 분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검을 들었다는 건 곧 나를 죽이려는 마음을 가진 분이라 생각하고 가차 없이 벨 것이오."
지옥의 유부에서 들려오는 듯한 사나운 말이 들리자 무사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말에 담긴 살기가 은근히 그들의 마음을 핍박한 결과였다. 하지만 무사들이 아무리 살펴봐도 무림고수인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웃기는 놈. 입만 살아서 떠들긴 잘하는구나!"
주춤한 자신들이 모습이 수치스러워 무사 중 하나가 바로 검을 수평으로 들고 베어왔다. 팔방풍우(八方風雨)였다. 여덟 곳의 방위를 비바람이 몰아치듯 공격하는 검법초식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3류 무사도 시전할 수 있는 하류 무공이다.
달려드는 무사를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던 소천악의 검이 풍혼검법(風魂劍法)을 시전했다. 한때 강호를 누비던 풍혼검마의 절기를 하급무사가 막아낼 리가 없었다. 그의 검은 바람의 물결을 타고 느린 듯 빠르게 무사를 베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달려들던 무사는 가슴을 길게 베여 피를 철철 흘리며 바로 즉사했다. 장내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소천악은 첫 살인의 흥분감에 이미 살기로 뒤덮여 있었다. 검끝에 느껴진 살과 뼈의 감촉은 희한하게 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바라보던 섬정기의 안광이 뿜어져 나오며 소리쳤다.
"모두 저놈을 당장 죽여라!"
지시에 따라 잠시 멍했던 무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와아! 죽여라!"
그들은 일제히 검을 들고 소천악을 난도질할 기세로 덤벼들었다. 바라보던 소천악의 눈빛이 갈수록 깊어져 갔다.
"내 눈앞에서 검을 뽑아 든 분들을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소이다. 여러분들은 나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받아야 하오."
풍혼검법은 바람의 검이었다. 밀려오는 검들을 슬며시 비켜내며 무사들의 몸을 여지없이 갈라갔다. 비명이 터져나오고 피가 하늘을 향해 춤을 췄다. 검무는 쉬지 않고 이어졌고 피의 향연은 점점 짙게 물들어갔다.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장내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미 무사들은 모두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경악스런 모습에 섬정기는 절로 몸이 떨려왔다. 가공할 검술이었다.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조리 전멸하였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소천악은 검에 묻은 피를 죽은 자의 옷자락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그 광경에 더욱 가슴이 서늘해지는 섬정기였다. 얼어붙은 발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귀하는 뭐 하시오? 어서 덤비시오."
스산한 소천악의 말이 귓가로 들려왔다. 섬정기는 이를 악물고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소천악의 눈과 마주친 섬정기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십여 명을 도륙낸 자의 눈이라곤 믿기 힘들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