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4화
"크아악! 보통 놈이 아니… 컥."
비명을 지르다 말고 숨이 덜컥 끊어졌다. 첫 살인의 묘한 기분이 전신에 감겨왔다.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려 후들거릴 그가 아니다. 이미 소천악의 시선은 그를 보지도 않고 팽소련을 바라봤다.
"괜찮소이까? 소저."
팽소련은 처음엔 소천악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혼란 상태였다.
"소저, 정신 차리시오."
버럭 소리치는 또 한 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제정신이 든 팽소련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네, 소협! 전 괜찮아요."
"그럼 여기에 잘 숨어 있으시오. 난 저분들에게 제대로 계산을 치러야 할 것 같소이다."
말을 하면서 바라본 전방에는 이미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시퍼런 살기를 드러내며 다가서고 있었다.
"저놈이 18호를 죽였다. 아주 요절을 내버리자."
거친 살기를 토하며 검끝을 겨누는 복면인들을 본 소천악의 얼굴도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사돈 남 말 하시네. 나를 죽이려는 분들을 살려드릴 용의는 추호도 없소이다."
서릿발 같은 기세를 뿜으며 연환구구탈백보를 밟으며 움직이는 소천악의 신형은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이 복면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복면인들은 기겁을 하며 그의 전신을 난도질할 기세로 검세를 뿌렸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단 한 치의 간격을 두고 검을 피하며 번뜩이는 소천악의 검광은 밤하늘을 찬연하게 수놓았다. 아름다움이 지나자 처참한 풍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크아악! 이런 쾌검이!"
"아악! 절정고수다!"
거듭되는 비명이 이어지며 복면인들은 단 일 초를 감당하지 못하고 입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차례차례 저승길에 올랐다.
불과 차 한 모금 마실까 말까 한 순간에 십여 명의 복면인들은 피바다 속에 묻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복면인들은 물론 팽가 무사마저 모두 얼어붙었다. 가공할 무공에 넋이 반쯤은 나간 모습으로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다가선 복면인을 모두 해치운 소천악이 검에 묻은 피를 슥 닦아낸 후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더 하실 건가요? 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소이다만."
"으음."
신음을 토하던 복면인 지휘자는 이내 현실을 직시했다. 저자의 무공수위를 볼 때 더 이상의 싸움은 한마디로 개죽음뿐이었다. 불타는 시선으로 소천악을 노려보던 그는 힘없이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가자!"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복면인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나 장내를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잠깐! 그냥 가면 어쩌시나? 손해배상을 해야지요. 애써 몸을 놀리게 하고 말없이 가면 이 사람이 섭섭하지요."
소천악의 유들거리는 말투에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힘없는 게 죄였다.
"그래, 뭐를 원하오?"
"당연히 이 판국에 뭘로 받겠소? 그 알량하신 목보다야 은자가 좋을 듯하오만."
뿌드득!
이를 갈며 복면인은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 주었다.
"갑자기 오느라 얼마 없소."
주머니 안의 은자를 세어보던 소천악이 나지막이 말했다.
"모자라긴 하는구려. 다음에 또 보면 꼭 나머지를 주시겠소?"
"그러겠소."
"말로만 하지 마시고 어디 소속인지 알아야 다음에 청구할 거 아니겠소?"
비아냥거리는 듯한 소천악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다른 복면인이 격분했다.
"이런 무례한 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냐? 귀 후비고 잘 들어라. 우리는… 커헉."
뒷말을 미처 잇지도 못하고 복면인은 지휘자에게 가슴을 베여 즉사하고 말았다.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이 어이없다는 듯 툭 말을 던졌다.
"쯧쯧, 비밀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아주 동료끼리 꼴값을 떠시는구려."
"좌우간 염려 마시오. 언젠가 꼭 이 은혜를 갚겠소."
의미심장한 말에도 소천악의 안색은 추호의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좋소. 가보시오."
살아남은 복면인 수십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경신법을 써 나무를 치며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난생처음 은자를 손에 넣은 소천악은 이 은자로 맛난 음식을 시켜 먹을 생각에 부풀었다.
"소협! 고맙소."
팽연수가 다가와 어색한 표정으로 사의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에 냉대한 게 못내 가슴에 걸려왔다.
"별말씀을요. 한 끼 식사의 보답이라 생각하시지요. 아, 그리고 약간의 검상에 바를 약이 있습니까?"
"물론이오. 여기 금창약이 있소."
"뭐, 별거 아닙니다만 날씨가 더워 곪을까 봐 우려되네요."
"허! 여름에 검상은 위험하지요. 어서 보십시다."
서둘러 어깨에 난 검상을 바라본 팽연수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별거 아니군요. 자, 잠시만요."
그저 검이 살짝 스친 듯 가볍게 살을 베어 피도 나오다 만 상처였다. 금창약을 슬슬 뿌리고나니 치료가 끝날 정도였다.
"고맙소이다. 그런데 왜 저들이 공격한 거지요?"
밀려오는 호기심에 소천악이 묻자 팽연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도 팽소련 아가씨를 납치할 의도 같은데 더 이상은 모르겠소이다."
"좌우간 조심하시지요. 이제 전 길을 재촉해야 하니 다음에 뵙지요."
더 깊은 사연을 듣고 싶지 않은 소천악은 서둘러 이별을 고하고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더 옆에 있어 봐야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이었다.
"아, 이런. 그러시군요. 할 수 없지요. 그럼 나중에 혹시 하북팽가 쪽에 오실 일이 있다면 꼭 들러주시오. 그때 후히 사례하도록 하지요."
"하하, 인연이 되면 들르겠습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돌리고 떠나려는 소천악에게 팽소련의 말이 들렸다.
"소협! 이 생명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별 신경 쓰지 마시오. 저에겐 그 한 끼가 더 소중했답니다."
팽소련과 헤어진 소천악은 이내 다른 자리를 골라 노숙에 들어갔다. 나름대로 결심을 굳혔다. 검의 무서움을 절감한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검 같은 병기를 들이대는 이를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깊이 다짐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잠에서 깬 소천악은 다시 발길을 이어갔다. 며칠을 걸어 광동성에 들어섰다. 그동안 다니다 보니 일단은 은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복면인에게 받은 은자를 펑펑 쓰다 보니 이내 거지 신세가 되어 식당에서 침만 꼴딱꼴딱 삼킨 아픔이 기억났다. 일단 훔쳐 온 산삼을 팔아 여비로 쓸 생각으로 성내 의원 문을 두드렸다. 커다란 현판에 순사기의원(脣仕記醫院)이란 글씨가 멋지게 쓰인 곳이었다.
"어떻소?"
초조한 소천악의 질문에 사십대의 의원은 내심 놀라면서도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순사기 의원이 얼핏 봐도 삼백 년은 족히 넘은 탐나는 산삼이었다. 근래 보기 힘든 영물을 들고 온 놈을 가만히 보았다. 아무리 봐도 세상물정이라곤 전혀 모르는 산 무지렁이가 분명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산삼이군. 이거 요새 흔하게 나와서 별로 값이 안 돼. 보아하니 멀리서 온 듯하니 내 특별히 인심을 쓰지. 이십 냥 주지."
소천악은 말하는 의원의 눈을 유심히 봤다. 괴팍한 사부 밑에서 살아온 세월의 흔적은 장난이 아니었다. 척 보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짐작할 정도의 가공할 눈썰미가 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입이 열렸다.
"이십 냥? 관둡시다. 그냥 가겠소."
거두절미하고 딱 잘라 말했다. 지체 없이 늘어놓은 산삼을 주섬주섬 행낭에 집어넣었다. 순사기 의원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촌무지렁이가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분위기였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여전히 덤덤하게 나왔다.
"맘대로 하게. 다른 데 가봐야 그 이상은 받기 힘들 거야."
"그야 내 마음이오이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요."
차갑게 말하고 일어서려 하는 순간이었다. 트집거리를 잡은 순사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버럭 성질을 냈다.
"이런 어린놈이 감히 어른에게 함부로 말을 하다니. 괘씸한 놈!"
초면에 욕을 먹고 가만있을 소천악이 아니었다. 비위가 확 뒤틀린 입에서 대뜸 험악한 말이 나왔다.
"자꾸 놈이라 하면 골로 가는 수가 있어요. 말 예쁘게 하심이 바람직하게 여겨집니다."
"이런 불학무식한 놈! 여봐라, 누구 없느냐?"
순사기 의원이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네 명의 장정이 바로 방에 들어왔다. 모두 한덩치하는 게 힘깨나 쓰게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의원님."
"그래. 저기 저놈이 감히 나에게 욕을 하는구나. 혼쭐을 내주어라."
그들이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소천악은 돌아가는 낌새를 바로 눈치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의원이 산삼을 날로 먹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어이가 없는 소천악은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의원의 말을 들은 장정들은 늘 하던 대로 움직였다. 손에 몽둥이를 든 채로 서서히 소천악에게 다가왔다.
"네 이놈! 이제라도 잘못했다 빌면 내 특별히 용서해 주마. 게다가 산삼도 아까 말한 적당한 값에 사주마."
뒤에서 의원이 큰 인심이나 쓰듯이 큰소리를 쳤다. 어이가 없는 소천악이 대답했다.
"의원 맞소이까? 아무리 봐도 의원이 아니오. 하는 게 꼭 어디 뒷골목 건달 같으시오. 안 그렇소?"
싸늘하게 비웃는 소천악을 보며 순사기 의원은 분노에 몸을 떨며 외쳤다.
"저런 패 죽일 놈! 여봐라, 뭐 하느냐! 당장 저놈을 흠씬 두들겨 혼쭐을 내주어라."
"네, 의원님."
네 명의 장정은 지체 없이 소천악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피식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은 소천악은 머리통을 내리치는 몽둥이세례를 슬쩍 몸을 틀어 피했다. 좁혀진 거리를 이용해 네 명 사이를 파고들며 섬전같이 양발을 사방으로 움직였다. 장정들의 몸에 발이 여지없이 틀어박혔다.
"크억! 아이고!"
비명이 요란하게 들리며 장정들은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이미 그들의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숨쉬기도 힘든 듯 거침 숨소리를 내며 쩔쩔맸다.
"이분들이 아주 조직적으로 노시네요. 좋소이다! 오늘 완전히 날 잡아보자고요."
소천악은 비명을 지르는 장정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잘근잘근 짓이겼다. 순식간에 네 명의 장정들은 온몸이 시퍼렇게 변한 채 고통에 겨워 기절하고 말았다.
순사기 의원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촌뜨기로 본 자신의 안목이 화를 부른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잠자는 호랑이 코털을 뽑았다는 기분이었다. 무림인인 줄 몰랐던 실수에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소천악은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바라보며 스산하게 입을 놀렸다.
"의원 같지 않은 의원님! 좋은 말씀 드릴 때 무릎 꿇으심이 어떨지요?"
"네 그게 무슨 소리……?"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한 그의 눈에 뭔가 번쩍하더니 소천악의 주먹이 복부를 가격했다. 일순간에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이 배에서 올라왔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온 그가 소리쳤다.
"크악! 아이고 배야."
고통에 겨워 순사기 의원이 떼굴떼굴 방을 굴렀다. 아무리 숨을 쉬려 해도 거친 호흡만 힘겹게 깔딱였다. 질식사할 것 같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