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3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3화
잠깐 본가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일곱 살짜리 자신을 무도관에 처박은 부모에 대한 사무친 원한이 머릿속으로 실려 올라오자 정나미가 똑 떨어졌다. 어린 자신이 애걸복걸해도 막무가내로 집어 처넣은 일을 생각하니 영 돌아가고픈 마음이 안 들었다.
"제길! 분명히 난 주워 온 아들일 거야. 안 그러고야 어찌!"
중얼거리며 이내 기억을 지웠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았다. 세상천지를 모조리 둘러볼 생각이었다. 이미 그의 내심은 정해졌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한 강호무림을 우선적으로 파악할 예정이다. 한마디로 속 편하게 강호를 주유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시간이 되는 대로 혈사부가 무림공적이 된 사연을 알아볼 생각이다. 혈사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억울한 누명이 확실했다. 적어도 그런 걸 거짓말할 혈사부는 아니었다.
역시 최후의 목적은 강호제일인이 되는 게 당연했다. 생각을 정한 후 그저 일단은 발길 가는 데로 가기로 결정했다.
날이 저물자 하룻밤 유숙할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품안에 은자라곤 땡전 한 닢 없는 처지라 객잔은 꿈도 꾸지 못하고 노숙할 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코에 밀려오는 향긋한 내음에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걸어만 갔다.
관도에서 백여 장 벗어난 곳에 다가서자 이십여 명의 무복 차림의 사람들이 늦은 저녁을 먹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하북팽가의 일급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불쑥 나타난 소천악을 보며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혹시 허튼짓이라도 하면 바로 온몸을 도륙낼 기세가 암암리에 피어 나왔다. 그 점을 모르는 바가 아닌 소천악이었지만 향긋한 음식 내음이 약간의 불쾌감을 슬며시 무시하고 다가서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길 가는 과객입니다. 좋은 냄새에 끌려오는 줄 모르고 왔습니다. 사해가 동도인데 한 끼 식사를 함께했으면 합니다만……."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하려는 한 무사를 살며시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하북팽가의 금지옥엽인 팽소련이다. 첫눈에 보기에도 쉽게 찾기 힘든 미녀였다. 순간적으로 그녀를 바라본 소천악은 족자 속의 미인보다 한참 떨어지는 미모에 이내 관심을 거둬들였다.
"팽 대주님, 저 소협이 시장하신 모양인데 조금 나눠 드리죠?"
"네, 아가씨가 그리하신다면 뭐……."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말하는 이는 팽연수였다. 하북팽가의 일류고수로서 나름대로 명성을 쌓은 자였다. 그는 음식을 한 접시 떠 소천악에게 내밀었다.
"옜소. 저쪽으로 가서 드시오. 아가씨 쪽으로 다가서면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주의하시오."
눈에 신광을 번뜩이며 말하는 그를 보며 내심 비위가 뒤틀렸지만 공짜로 한 끼를 얻어먹는 신세를 생각하며 꾹 참는 소천악이었다. 나빴던 기분은 음식을 먹자마자 구만리장천으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십여 년 만에 음식다운 음식이 혀를 자극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으아! 이 맛이야!"
고함에 깜짝 놀라 먹다 말고 검을 잡아 가던 팽가 무사들은 이내 영문을 깨달고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촌놈의 새끼! 생전 처음 식사하는 놈 같네."
"그러게 말이야. 우리 아가씨가 인정이 많아서 별 거지 같은 놈에게 덕을 베푸시니 원."
두 무사의 대화가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음식 맛에 감격한 소천악은 모든 게 용서가 가능했다. 자존심을 상한 걸 이내 지워버리고 허겁지겁 음식을 뱃속에 털어 넣었다.
혀끝을 사르르 녹이며 감칠맛을 더하는 음식은 순식간에 빈 접시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텅 빈 접시를 바라보며 심한 갈등에 빠져드는 소천악이었다. 더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자존심이 억지로 막아댔다.
심한 갈등에 결국 음식 유혹에 빠져 사정하려는 순간이었다. 귀를 상쾌하게 만드는 상큼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팽 대주님! 저분 음식 더 가져다 드리세요. 상당히 시장하셨던 모양입니다."
말투에 안타까움이 그득한 팽소련의 말에 옆에서 눈을 번뜩이던 팽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게, 휴! 알겠습니다."
뭐라 말하려다 꾹 참은 기색이 확연한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가와 빈 접시를 들고 가 음식을 꽉 눌러 가져다주었다.
"얼른 드시게! 보아하니 노숙할 모양인데 멀리 떨어져 있게."
"후후, 고맙소이다. 잘 먹겠습니다."
입이 쫙 벌어진 소천악은 냉소 어린 팽연수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허겁지겁 음식을 털어 넣기에 바빴다.
만족스런 식사를 마친 그는 느긋한 얼굴을 한 채 뒤쪽으로 이십여 장을 벗어난 곳에 노숙 준비를 마쳤다. 배에서 향기가 올라오는 기분을 즐기며 막 잠에 취하려는 순간이다. 그의 귀에 멀리서 접근하는 인영들이 느껴졌다. 나름대로 무공을 수련한 고수란 걸 한눈에 알 정도였다. 그들은 빠르게 접근해 왔다.
자신과 하등 연관이 없다는 걸 이내 깨달은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재촉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두 사방을 경계하라! 정체 모를 고수들이 다가온다."
팽연수가 그제야 소리치며 도를 잡아 갔다. 그 말에 막 자려던 팽가의 무사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일제히 도를 잡고 일어섰다.
이십여 명의 팽씨 세가 무사들은 숙련된 자세로 얼른 진을 구성하며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숲 속 나무를 가로지르며 흑의 복면인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둘씩 나타난 복면인들은 어느새 사십여 명이 넘게 출몰해 팽가 무사들과 대치했다. 첫눈에 보기에도 호의를 가지고 나타난 건 아니었다.
"흐흐! 팽씨 세가의 고수를 만나니 반갑소이다."
"무슨 일이오? 이 밤중에?"
"선한 뜻이면 밤에 오지 않았소. 자, 이제 저승길로 가야 할 시간인 거 같소."
"무엇이라? 감히!"
노성을 터뜨리는 팽연수의 말에 아랑곳없이 복면인이 낮게 말했다.
"쳐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존명!"
이야기를 풀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검을 뽑아 든 복면인들이 거세게 덮쳐왔다. 한 명 한 명의 검에 풍기는 서늘한 예기는 예사 고수가 아니란 걸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무례한 놈들! 팽가 무사들은 모두 저놈들을 도륙내라!"
화가 치민 팽연수의 말이 떨어지자 팽씨 세가 무사들도 일제히 복면인들을 향해 도를 찔러갔다. 천성적인 신력을 자랑하는 하북팽가의 식솔들답게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팽가도법은 보는 이의 시선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챙! 챙! 챙!
팽가 무사의 강렬한 도세를 복면인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영활한 검법으로 흘려 막았다. 요란한 격돌음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모두 조심해라! 보통 놈들이 아니다."
안색이 급변한 팽연수의 말이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그가 보기에도 기습한 자들은 예사로운 무림인들이 아님을 바로 눈치챘다.
"흐흐, 늦었다. 네놈들은 단 한 놈도 살아서 여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 뭐 하느냐? 어서 저놈들을 쓸어버려라. 저기 팽가 계집은 죽이지 말아라. 생포해야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광폭한 외침이 들리자 복면인들의 검세가 삽시간에 살기를 뿜으며 변초하기 시작했다. 육중한 팽가도법은 결코 만만한 무공이 아니었지만 복면인들은 보법에 곁들인 변화무쌍한 검초로 팽가 무사의 시야를 현혹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무사 숫자가 반이 될까 말까 한 열세라는 게 팽가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크아악, 이놈들!"
"헉! 이 팽가의 쥐새끼들에게… 분하다!"
여러 곳에서 비명이 터지며 복면인과 팽가 무사들이 하나씩 치명상을 입고 죽어갔다. 유감스럽게도 쓰러지는 무사들은 아무래도 합공에 몰린 팽가 무사가 조금 더 많았다. 가뜩이나 수적인 열세에 밀려 죽어가는 팽가 무사들이었다.
팽연수는 안색을 굳히며 몸을 뽑으려 했으나 복면인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와 다른 한 명의 합공에 자신마저 위태한 장면을 점점 더 보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살아남을 팽가 무사는 한 명도 없을 위기상황이었다.
싸우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던 소천악은 그들의 무공을 자신과 열심히 비교 분석에 들어갔다. 짧은 시간 내에 분석은 끝났다. 오래 걸릴 일이 아닌 것이 수준 차이가 확 벌어질 정도였다. 자신의 무공을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저 정도라면 부담 없을 기분이다. 내심 자신만만한 자부심이 철철 흘러나왔다.
그의 속셈은 한 끼 얻어먹은 보답이라기보다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픈 욕망이 더 크게 솟구쳤다. 내심 올라오는 호승심을 천천히 달래며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더구나 누가 옳은 건지도 모른 채 덮어놓고 참견할 오지랖이 아니다.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에 어느새 팽가 무사들의 수는 처음의 이십여 명에서 불과 열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남은 팽가 무사들은 이를 악물고 팽소련을 보호하며 뒤로 뒤로 밀려왔다.
"아가씨를 보호하라! 모두 힘을 내라. 우리는 대팽가의 무사들이니라."
악을 쓰는 팽연수의 말에 팽가 무사들은 최선을 다해보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모두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로 전락했다.
"흐흐, 팽가의 쥐새끼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여봐라! 어서 잔당들을 도륙내라."
"염려 마십시오. 저것들은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승세를 굳힌 복면인들이 호기당당하게 대답하며 거듭 팽가 무사들을 핍박했다. 팽소련은 사실 무공을 전혀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으로 애지중지하는 팽가 장로들의 성화로 힘든 일이라곤 접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생전 처음 눈앞에서 팽가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고 죽어가는 걸 보는 건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었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도망가던 팽소련은 엉겁결에 앉아 있던 소천악을 덥석 껴안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이미 남녀유별이란 예의는 멀리 날아간 채 그저 벌벌 떠는 한 마리 작은 새에 불과했다.
"어어, 소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던 소천악은 코에 스며오는 향긋한 여인의 살내음에 정신이 순간적으로 몽롱해지고 말았다. 아주 그윽한 냄새에 알지 못할 열기가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이놈!"
갑자기 팽가 무사의 호위망을 뚫고 들어온 한 복면인의 검이 차가운 기세를 풍기며 소천악의 심장을 노리고 밀려들었다.
난생처음 여인과 포옹한 난감함에 당황하던 소천악은 소름 끼치는 살기가 다가서는 걸 느끼고 다급하게 신형을 날렸다.
찌이익.
무복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미처 못 돌린 어깨 쪽 옷과 살이 베어나갔다.
"으윽."
따끔한 충격에 잠시 비틀대던 소천악은 얼른 팽소련을 내려놓고 나무 지팡이 속에 감추어진 검을 쾌속하게 뽑아 들었다. 방심의 대가를 치른 그의 눈에서 활화산 같은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오호, 검을 드시고 날 죽이려 하신다는 말이죠? 이제 그 쓰라린 보답을 보여드리지요."
말함과 동시에 이미 그의 신형은 미처 시야로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복면인에게 접근하며 은빛 검광을 흩뿌렸다. 복면인은 미처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길게 가슴이 베이는 치명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