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화
마침내 반시진이 지나자 독기 어린 표정으로 악을 쓰던 소천악이 서서히 탈진해 갔다. 아직 어린 그가 버텨내기엔 너무도 참혹한 고통이었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버틴 것이 차라리 기적에 가까웠다.
"난놈이네. 합격이다, 합격!"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혈검신마는 벼락같이 소천악의 몇 개 대혈을 찍었다. 바로 고통은 멈추고 지친 소천악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옆을 지키며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기해혈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따스한 진기가 몸 안에 흘러들어 오자 뒤집혔던 오장육부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윽고 소천악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투는 처음과는 천지 차이로 달랐다. 이미 무서움을 겪은 탓인지 영악한 탓인지 다소 공손한 어조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수백 번도 더 혈검신마를 난도질쳤다.
"할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세요?"
"누구라고 말하면 네놈이 아냐?"
냉큼 대답한 혈검신마는 소천악이 다시 시퍼런 독기를 품고 쏘아보는 걸 봤다. 눈에서 풍기는 독기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야, 이 녀석아! 눈에 힘 풀어. 너 해치려 하는 거 아니니까."
"도대체 누구세요? 왜 여기에 와 죄 없는 날 괴롭히는 거죠?"
처음보다 약간 풀어진 소천악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랬다. 그리고 육포 훔친 건 죽을죄지만 특별히 봐주마."
"……."
소천악은 나무 밑에 앉아서 노려만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육포 몇 개 먹었다고 죽는다면 다른 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장휘경은 피식 웃으며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자식아! 척 보니 너와 집하곤 영 인연이 아닌 듯하네. 그럼 혼자 살아야 하는데 홀로 세상의 거친 숲을 헤쳐가려면 강해야 하느니라. 내가 너에게 강함을 주겠다. 나랑 가자. 내가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갈 비법을 알려주마."
그는 나름대로 무게를 실어 엄숙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소천악은 툭 말을 꺼냈다.
"영감탱이는 누구슈? 그냥 좋게 서로 갈 길이나 가요."
퍽!
"으아악! 왜 때려요?"
소천악은 전신에 엄습해 오는 극통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장휘경은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는 소천악을 보고도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그만 놈이 까불고 있어. 자식아, 잔말 말고 따라와. 좋게 말할 때 들을 것이지 말대꾸는 무슨."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어둠을 밝히는 붉은 혈광이 순간적으로 번뜩이며 새어나왔다. 일부러 내력을 불어넣어 내뿜는 섬뜩한 눈빛에 소천악은 가슴이 오그라드는 두려움이 새록새록 일어났다. 절로 가슴이 떨려오는 소천악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애써 용기를 내어 물었다.
"할아버지 혹시 무림인이세요?"
"당연하지 인마! 무림인이니 이 나이에 이렇게 힘이 팔팔하지."
자랑하며 옷을 어깨까지 걷어든 그의 팔뚝은 근육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청년들은 저리 가라였다. 그 모습에 반한 소천악이 탄성을 질렀다. 역시 독종이라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아까의 고통은 금세 잊은 모양이다.
"우와! 무림인이 되면 다 그렇게 되요?"
"물론이지. 인마, 이건 기본이야. 수련하면 너는 더 멋지게 몸이 변할 게다."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살살 뿌려대는 혈검신마였다. 그 덫을 아직 어린 소천악이 피해 갈 리가 없었다. 소천악은 대뜸 미끼를 물어왔다.
"그런데 할아버지, 얼마나 세요? 무림에서 한가락 해요?"
"그건 왜 묻는 거야?"
황당한 질문에 뚱한 혈검신마에게 소천악은 톡톡 쏘아붙였다.
"혹시 삼류무사 아닌가요? 삼류면 그냥 가세요. 애써 배워서 이리저리 눈치나 보며 고생하느니 속 편하게 그냥 살래요."
어이없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듣던 혈검신마가 일어서며 옷을 툭툭 털었다. 쫓기느라 한동안 얼마나 목욕을 못 했는지 그의 몸이나 옷도 소천악 못지않았다.
"일단은 너보다는 세, 인마! 잔소리 말고 따라와. 혹시 중간에 도망치려면 꼭 기억해라. 한번 그럴 때마다 손가락 뼈 하나씩 부러질 줄 알아라."
살기를 가득 담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뿐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면 바로 실천할 인간이란 게 바로 느낌이 왔다. 아무리 독종인 소천악이었지만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알았어요. 대신 잡아먹지는 마세요. 저 맛없어요. 봐요. 온몸이 피부병이잖아요."
팔을 쭉 내미는 소천악의 옷에서 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인상을 찌푸린 혈검신마가 버럭 소리쳤다.
"피부병 좋아하네! 자식아, 그게 어디 병이냐? 때지. 얼마나 안 씻었으면 아예 피부에 때가 진을 치고 사냐? 더러운 놈 얼른 따라와.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살벌한 기세와는 달리 목소리에 알지 못할 포근한 기운도 느껴진 소천악은 적잖이 안심했다. 악동 짓을 하다 보니 눈치 하나는 남부럽지 않은 터였다. 도망치려는 잔머리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두 노소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직까지 마음을 놓지 않은 소천악이었다. 살살 눈치를 보며 장휘경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십 년간 강호를 누볐던 장휘경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발랑 까진 놈을 보며 기막혀할 뿐 내색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장휘경의 걸음이 멈췄다. 귓가로 사방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하였다.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잠시 형세를 판단하던 그의 입이 열렸다.
"옷 벗어!"
"왜요?"
"벗으라면 벗어. 지금 안 벗으면 네놈은 죽어!"
진지한 장휘경의 말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소천악이었다. 아무 소리 없이 윗옷을 벗었다. 받아 든 장휘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크으, 냄새하고는."
옷에서는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날 정도의 악취가 솔솔 흘러나왔다. 어딜 헤매고 다녔는지 퀴퀴한 냄새가 폴폴 풍겨 나왔다. 가늘게 투덜거리며 빠르게 옷을 북북 찢어 끈을 만들었다. 워낙 작은 옷이라 길이가 조금 모자랐다.
"아래도 벗어!"
그제야 상황을 판단한 소천악이 울상을 지었다.
"안 돼요. 속에 고추밖에 없단 말이야."
화가 난 소천악이 외쳤다.
"그럼 입고 뒈지든지."
차갑게 잘라 말하는 장휘경이었다. 이를 꼭 문 소천악이 얼마간 망설이다 할 수 없이 아래도 벗었다. 벌거숭이로 변한 채 다리 사이를 손으로 가렸다.
"새끼! 어린놈이 부끄럼은 무슨."
피식 웃은 장휘경은 다시 옷을 찢어 단단한 끈을 만들었다. 벌거숭이가 된 소천악을 거칠게 등 뒤에 올린 후 끈으로 칭칭 감았다. 단단히 고정시키자마자 사방에서 수많은 무림고수들이 튀어나왔다. 무인들은 모두 눈가에 정기가 형형한 일류고수들뿐이었다.
"혈검신마! 네놈이 뛰어야 벼룩이다. 이 무림공적!"
한 무인이 외치는 소리에 소천악은 기겁을 했다. 아무리 어리지만 무림공적이 무언지는 알았다. 동네에서 무사놀이를 하며 지겹도록 외쳤던 말이었다.
"아니, 무림공적이세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무덤덤한 대답에 소천악은 하늘이 노래졌다.
"내려줘요. 나 안 갈래요."
절규하는 소천악을 흘낏 바라본 장휘경이 입을 열었다.
"마차 떠났다. 이미 늦었어. 이미 넌 내 제자로 인정된 이상 저들이 살려줄 리가 없다. 이젠 갈 데까지 간 거야, 네놈은. 흐흐흐."
아찔한 소리에 소천악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가선 무인들이 소리쳤다.
"대마두가 제자와 함께 있다! 함께 죽여야 후환이 없다."
말과 동시에 수십 명이 검을 들고 분분히 신형을 날렸다. 갑자기 조용하던 산이 들썩이면서 폭음과 비명이 연달아 들렸다. 무림고수로 보이는 수많은 무복 차림의 검사들이 외치는 소리에 산은 몸살을 앓았다.
"혈검신마, 네 이놈! 여기가 네 묏자리다."
"죽긴 누가 죽냐? 버릇없는 애새끼들이 재수 없게!"
수많은 검이 한 사람을 노리고 들어왔다. 전신을 갈기갈기 찢을 듯 삼엄하게 파고드는 검의 수는 수십 개에 달했다. 그들이 노리는 피는 혈검신마뿐만이 아니라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소천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살벌한 협공에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는 강단을 보였다. 스르르 미끄러지며 일단 움직이자 나비가 너풀대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현란한 보법이 펼쳐졌다. 절정을 뛰어넘는 보법은 그물처럼 촘촘한 검의 숲을 헤집고 손쉽게 빠져나갔다. 그의 손에서 섬광이 번뜩이며 빛을 발하는 순간 어김없이 한 사람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일검일살 그대로였다.
터져나오는 비명에 굴하지 않고 무인들은 혈검신마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시퍼런 광망을 서리서리 뿌리며 검술을 펼치는 무인들의 눈에는 사생결단의 단호한 의지가 서려 나왔다. 살벌한 검의 예기만 봐도 일류고수를 넘어선 무인들이었다. 공격받던 혈검신마는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죽여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달려드는 놈들이 성가셨다. 갑자기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멈춰라!"
고막을 터뜨릴 듯 가공할 내공을 담은 목소리에 포위 공격하던 무림인들이 깜짝 놀라 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무림인들은 누가 소리쳤나 궁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심 어디서 자신들을 도울 신비고수가 나타나길 바라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뒤에서 포위망의 요소를 점하고 지휘하던 노년의 고수들도 두리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소리친 이가 나오지 않았다. 다들 어리둥절해할 즈음!
"내가 말했다. 이놈들아!"
혈검신마라 불리는 노인의 입이 떨어졌다. 순간 무림인들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런!"
"자식들아, 왜 난 멈추어라, 이런 말 하면 안 되나?"
무림인들은 황당했다. 세상에 포위당한 이가 싸우다 말고 '멈춰라!' 소리치는 상황에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혈검신마는 이기심어술로 뒤에서 누가 말한 듯 사기를 친 후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무인들을 고소한 듯 쳐다보았다.
"이런 쳐 죽일 대마두 놈이!"
희롱당한 수많은 무인들이 분노의 안광을 번뜩였다. 혈검신마를 가운데 두고 겹겹이 포위망을 만들었다. 손에 검과 도를 들고 노려보는 그들의 눈빛은 원독의 광망이 서리서리 뿜어져 나왔다. 그들은 구대문파의 제자 복색을 한 수백여 명과 오대세가의 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땅에는 이미 여러 명이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천라지망의 강력한 포위망에 갇혀 있어도 왠지 당당해 보이는 혈검신마!
그는 한 손에 검을 쥐고 소리쳤다.
"야, 이 자식들아! 왜 불나방처럼 죽기를 자청하냐?"
"시끄럽다. 대마두! 네놈을 죽여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말겠다."
의기가 하늘을 찌르는 한 무당 제자의 외침에 혈검신마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정의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무대가리 같은 소리냐? 이렇게 떼거리로 덤벼들어 한 사람을 핍박하는 게 정의냐? 아주 염병을 해라, 염병을 해!"
비수처럼 정파인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장내의 정파 무인들은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인들이 흔들리자 그 광경을 바라보던 무당파의 장로 현천자(玄天子)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