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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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73화
273화. 자연경에 도달하다
무제(武帝)가 천강에게 준 침엔 독이 발라져 있었다.
모든 감각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독으로, 과거 천수향이 광존을 고문할 썼던 독 종류와 유사했다.
그걸 몸에 주입한 천강은 감각이 완전히 개방된 상태에서 태감과 싸웠고, 그 상태에서 또한 죽음에 다다르면서 비로소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걸 초월한 참된 해탈과 자유였다.
생사경까지는 지고하고 굳건한, 그리고 확고한 뜻과 의지가 있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자연경은 그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초월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그건 본인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생사경에 도달할 정도로 뜻이 확고히 선 이가 반대로 그걸 내려놓아야 하니, 어찌 쉬울까.
- 제가 과연 그것을 시간 안에 이룰지 모르겠습니다.
- 뭐 못하면 별수 없지 않느냐. 죽어서 깨닫는 수밖에.
사실상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무제(武帝)의 조언이 괜한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강은 죽기 직전, 그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죽었다. 태감의 마지막 일격을 맞고는 그 숨이 멈추었다.
"가자고."
추혼살개와 그 동료가 죽은 천강의 영혼을 회수하기 위해 다가왔다.
내심 천강이 이기기를 바랐건만……. 씁쓸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죽은 영혼을 법대로 회수하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 이변이 생겼다.
"추, 추혼살개 이것을 보게!"
"이것은?!"
망자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온 흑백무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천강의 몸 위로 돌연 한 글자가 두둥실 떠오른 것이다.
면(免).
그것은 명계에 있을 적, 전대 천마인 송제대왕이 천강의 손에 써 준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대왕들 모두 천강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똑같이 새겨준 글자이기도 했다.
명계의 대왕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권세 중 하나.
하늘에서 정한 천수인 천명을…… 죽음을 한 번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물론 어디까지나 판관으로서 의견을 낸 것으로, 이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하늘의 문제이긴 한데, 무려 지옥의 모든 판관이 한 의견을 내었다.
이건 아무리 하늘이라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음?'
죽었다고 생각한 천강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그 시선이 좌우 사방을 가만 훑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빠르게 이해되는 다른 생물들.
하나, 둘, 셋, 넷, 다섯…….
나 이외에 주위의 있는 다른 개체들이 속속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천강에게 변화가 빠르게 찾아왔다.
순식간에 백 개를 넘어, 천 개의 개체를 모두 채운 천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죽기 전 있었던 독과 상처는 이미 말끔히 치유된 상태였다.
태감이 천강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고는 외쳤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네놈이 그 경지에?!"
"……간단해. 나 이외에 다른 개체를 천 개 이해해봐. 그럼 너도 될 수 있어."
"누가 그런 헛소리를 믿을 것 같으냐!"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나 또한 천해지경의 말을 처음엔 믿지 않았으니까.
"그것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천강의 빤한 시선에 태감이 얼굴을 구겼다. 가만 보니, 그는 천강의 경지를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흥. 그래 봤자 바뀐 것은 없다. 어차피 난 네놈이 생사경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준비했으니!"
태감이 천강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섬광과 같은 연격이 천강에게로 무자비하게 쇄도해 왔다.
그러나 그걸 마주하는 천강의 태도엔 여유가 그득했다.
'이 건방진 놈이 감히 뒷짐을 져?!'
그 여유로운 얼굴을 오늘 완전히 망가뜨려 주마!
그러나…… 뒷짐을 지고는 한 손으로 그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내는 천강.
'무, 무슨?!'
태감이 더욱 속도를 높인다. 주먹에 힘을 싣고, 그 끝에 파괴력을 더욱 늘려나간다.
그러나 천강은 그 모든 공격을 다 받아냈다. 흘리지도 않고, 제자리에 서서, 단 한 손으로 가볍게.
"으아아아아! 장난으로 임하지 말고 제대로 하란 말이다!"
"그래?"
천강이 손을 회수한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일격을 먹이기 위해 용을 쓰는 태감의 주먹이 천강의 근처에도 닿지 못한 것이다.
마치 무형의 막에 가로막힌 듯 나아가지 못하고 태감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야만 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주먹이 뻗어 나가지조차 못한다고?
무려 무림 최강인, 신선의 반열에 오른 생사경의 고수인 이 내가?!
"으아아아아!"
태감이 고함을 치며 더욱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천강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마치 물속에서 수영을 하듯 허우적거리며 천강에게 주먹을 날리는 태감의 행동은 분명 매섭기 그지없으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녀석과 내가 이리 차이가 났었나……?'
하늘을 가만 바라보며 하품을 하던 천강의 시선이 태감에게 닿는다. 그 순간, 태감은 복부에 묵직한 감각을 느꼈다.
그대로 허공에 떠올라 뒤로 나자빠지는 태감.
"무슨……. 분명 주먹을 내지르는 걸 보지 못했는데……?"
"그럴 거야. 주먹 따윈 내지르지 않았으니까."
"뭐?"
태감의 동공이 지진이 인 것처럼 흔들거린다. 이제야 천강의 경지가 어느 수준인지를 파악이 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어찌 생사경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자연경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러게. 내가 직접 겪고도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
새삼 무제(武帝)께서 왜 설명하기 힘들어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태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연경이라니, 헛소리! 그깟 거짓을 내가 믿을 것 같으냐!"
본인이 추리해놓고 역으로 역정을 내네.
뭐 그만큼 혼란스럽다는 것이겠지.
태감이 천강에게 달려와 주먹을 뻗었다. 천강은 피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쿠구구구구.
곧바로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은 환관장. 돌연 강한 힘이 그의 몸을 찍어 눌러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쿵. 쿵. 쿠구구구궁.
일어나는 족족 도로 앉는다. 어떻게든 저항을 하고, 막아도 보고, 흘려도, 대자연의 기운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그를 무릎 꿇렸다.
"으아아아아!"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어찌 경지 하나 차이인데 이리 손도 못 쓸 수 있단 말인가?!
태감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천강이 잠잠히 그에게 권유한다.
"이제 슬슬 패배를 인정하는 게 어때?"
"웃기지 마라! 제아무리 네놈이 자연경이라 한들 무한히 이 짓을 할 수는 없을 터!"
몇 번 무릎을 꿇더니 머리가 돌이 됐나?
자연경은 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 이 짓을 1년 동안 하라고 해도 천강은 할 자신이 있었다.
'음. 아무래도 확실히 보여주는 게 좋겠네. 지금 녀석과 나의 수준 차를.'
천강이 태감을 검지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쭈욱 밑으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태감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고 허리가 굽어, 마치 천강의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그제야 기세등등하던 태감의 기세가 완전히 식어 흐늘흐늘해졌다.
'난 이기지 못할 거야. 무려 자연경을 어찌 이긴단 말인가. 이 싸움은 졌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태감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이내 목표물을 포착한 그의 신형이 빠르게 튀어 나가,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인질을 잡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자연경을 아주 우습게 본 행위.
"……어?"
"내 얼굴도 못 때리는데, 걔들이라고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냐?"
"이익! 무, 뭣들 하느냐! 그 애들을 붙들지 않고!"
태감의 외침에 동창(東廠)이 일제히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동창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명을 따르려 해도 몸이 꿈쩍도 안 한 것이다.
'싸움은 이것으로 끝이구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버린 태감. 줄곧 하늘 위에 떠 있던 금강탁이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그건 마치 두 사람의 시합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것과 같았다.
다만 천강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이제 싸움의 승자로서 두 번째 선택을 해야겠지.'
태감을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초췌한 얼굴로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는 태감에게 천강이 다가갔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마냥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분명…… 분명 네놈을 이 자리에서 쓰러뜨리는 미래를 보았는데, 어째서? 이건 있을 수 없어. 꿈일 거야. 아주 지독한 악몽."
"태감."
천강이 부르자 그가 천강을 홱 올려다보았다. 전의를 상실했어도 그 눈에는 여전히 적의가 그득했다.
아마 그 적의는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 무림인들로부터 기인한 것이겠지.
그 앞에서, 나름 진심을 담아 천강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과거 무림인들의 과오를 인정한다. 대다수 무림인들은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그걸 남용하고 오용해왔지. 나 또한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인도할 테니, 이만 이쯤에서 용서하는 게 어떤가?"
그러나 태감의 눈에는 서슬 퍼런 빛이 올라올 뿐이었다.
"내 죽기 전에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이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뭐 그럴 것 같았다.
줄곧 무림인을 경멸하고 멸시하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무림인 같이 행동해온 게 바로 그 태감이었기에.
천강이 하늘 높이 팔을 치켜들었다. 신병이기들이 그런 천강을 향해 소리쳐 외쳤다.
- 진정하세요, 소년! 두 번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어찌 감당하려 하는 겁니까!
- 그러하다. 화가 나더라도, 찜찜하더라도 참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천강의 얼굴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좆까. 이제껏 하늘이 깔아준 판에서 이리저리 끌려만 다녔어.'
내 의지다운 선택도 제대로 못 해보고 일평생을 살아왔다.
어릴 적에는 전쟁으로 인해, 이후엔 마교로 끌려가, 그리고 지금은 요놈의 태감이 벌여놓은 좆같은 상황에 꼬여.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치여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그걸 뒤바꿀 수 있는 건, 저기 옥좌에 앉거나 그 앞에서 굽실거리는 관료들이나 가능하겠지.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무림과 중원에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이를 제거할 수 있는.
싸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천강으로서는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천강이 잠시 고개를 돌려 초아와 연화, 청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주위로 자리한 동창과 황군들도.
오랜 전쟁 끝에 얻은 평화다. 더는 중원에 피바람이 일기를 원치 않았다.
- 그래도 그 모든 걸 소년이 책임지기엔……!
'됐어.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내가 결정해. 그리고 내가 뭐 순 대의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 예? 그러면?
흑살마신의 철칙. 받은 건 돌려주기. 그중 맞은 건 배로 갚아주기.
난 무림인이자 마교 사람이다. 무림인에게 은원관계는 그 목숨보다 중하고, 그 어떤 무림인보다 마교인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다.
'그게 누가 됐건, 나와 내 식구들을 건드렸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천강이 태감을 죽일 걸 확신한 탐(貪)이 팔찌에서 떨어져 나와 태감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전의를 상실했어도 태감은 신선이라 명명할 수 있는 생사경.
"어딜! 내가 이대로 죽을 성싶으냐!"
탐의 주둥이를 잡고는 필사적으로 버틴다. 도리어 흡공까지 사용하며 탐과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천강이 손을 내뻗자 곧 크게 뜬 눈으로 그가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배에는 창 하나가 관통해 등 뒤로 삐져나와 있었다.
"이건 대체……?"
"널 위해 어렵게 구해온 거야. 무려 명계까지 가서 말이지."
"하, 하하……."
태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올라왔다.
"이런 기분인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또렷하던 눈이 점차 아련해진다. 얼굴 위로 회한 가득한 표정이 물씬 올라왔다.
그리곤 이내 눈이 스르륵 감기며 그 몸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정말이지…… 참으로 인생이란 허무하구나……."
탐(貪)이 태감을 집어삼켰다. 심연의 그늘로 사라져가는 그의 얼굴엔 그저 후회만이 가득했다.
무려 오십여 년에 걸쳐 전란의 불씨를 만들어내던 거대한 흑막은, 그렇게 중원에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