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7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70화
270화. 결전의 날
"다녀왔습니다, 금나한님."
"주군!"
"하하핫. 돌아왔느냐!"
천강의 등장에 금나한과 일귀가 후다닥 뛰어온다. 그들의 얼굴엔 반가움과 함께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죽은 자들만이 가게 된다는 명계에 간다고 하기에…… 과연 무사히 잘 갔다 올는지, 어디 다치지는 않을는지, 혹 제시간에 맞춰 나타날 것인지 등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천강의 몸은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다 못해 쌩쌩하였다.
"약속일까지 얼마나 남았지?"
"십 일 남았습니다, 주군."
천강의 얼굴에 아쉬움이 올라왔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능히 네 개의 다른 개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이니.
"돌아가는 상황은 어때?"
금나한에게 예를 갖추고 천산의 보고로 올라가는 길. 천강에게 일귀가 옆에서 따라붙으며 보고를 올렸다.
"아주 안 좋습니다."
"안 좋다?"
분명 명계로 떠나기 전만 해도 무림맹과 마교 연합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계획해 놓은 명분을 상대측에서는 절대로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다져놓았고, 중원의 반향 또한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안 좋다니?
"그게……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바람에."
"하아?"
순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가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 황실이 보통 황실인가? 무려 전대 황제를 힘으로 몰아내고, 수차례 몽골로 원정을 나간 전쟁 영웅이 황제로 자리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나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다져놓은 체계와 힘, 권력은 그대로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한 상태였다.
가히 먼 옛적 초나라를 이끌던 항우와 비견해도 될 정도로.
그러니 백성들이 좀 따지고 든다고 눈 하나 깜짝할쏘냐? 오히려 칼을 빼 들고는, 계속 시끄럽게 떠들면 그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나오는 것이리라.
"골치 아프게 됐네."
"예. 그로 인해 민중들도 뻔히 황실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는 있으나 나서지를 못하고, 그들을 한데 뭉칠 이들도 마땅히 없습니다."
동창(東廠)이 지난 세월 동안 힘 좀 있는 이들을 다 역모로 몰아 그 목을 쳤으니까, 이젠 이 나라를 세울 때 힘을 썼던 개국 공신들조차 씨가 말랐겠지.
고위 직책도 아닌 그저 장사꾼 출신인 묵현의 충신조차도 그 목을 치는 걸로 봐서는 중원에 더는 제대로 된 지도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이젠 아예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겠구만."
"예, 주군. 민중들 눈치를 안 보고 사천성 경계에 10만 대군을 보내 진 치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태감과 나와의 만남이, 이 모든 걸 결정짓는 자리가 되는 것인가.
천산의 보고에 들어서자, 사학 노인과 무진이 천강에게 다가왔다. 천강이 예를 갖추고는 무진의 상태를 살폈다.
"몸은 좀 어떠냐?"
"완치되었습니다, 형님. 다만…… 왜인지 좀처럼 내기가 모이지 않습니다."
"그래?"
천강이 손을 뻗어 무진의 왼편 장딴지를 짚었다.
"그만 나와라?"
- 쳇.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탐(貪). 갑자기 자신의 다리에서 비단이 튀어나오는 행태에 무진이 눈을 크게 떴다.
탐이 펄럭펄럭 날아 천강의 몸을 휘감았다.
그럼 준비는 다 끝났으니, 이제 약속 장소로 나가는 일만 남았군.
"어르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두 번째 선택에 대해서는 어찌할지 생각해 보았느냐?"
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 이기는 것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것 같아, 생각하기를 관두었습니다."
"끌끌. 그렇구나."
"그래도 제가 이길 것입니다. 혹 이곳을 잃을까 염려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천강의 말에 사학 노인이 파안대소를 했다. 천강과 무진, 일귀가 그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고는 물러났다.
그들이 떠난 방향을 가만 바라보며 노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제(武帝), 나의 친우여. 어쩌면 나도 이승의 일을 마치고 곧 그대를 따라갈 수 있을 듯허이."
***
무림맹과 마교 연합의 사기는 개판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더더욱.
그래도 황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만큼은 건재했다. 다만, 그들은 천강이 태감(太監)과 싸우러 가는 걸 극구 반대했다.
"위험합니다.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다니요!"
"응하면 안 됩니다. 볼 것도 없이 함정입니다!"
무림맹에서 적극적으로 천강의 안전을 바라고.
"안타깝지만 저들의 말이 맞네."
"어쩌면 반격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리는 결정이 될지도 모르지."
마교 측에서도 그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사실상 천강이 있기에 저들이 당장 싸움을 걸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강이 익힌 북명신공 자체는 전쟁에서 별것이 없었으나, 천마신공 파검결과 흑색 절굿공이, 지천뇌공. 이 세 개의 위력은 가히 대단해, 그 어떤 대군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천강의 시선이 잠시 주태와 권광투마에 가 닿았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혹 우리 딸들 때문에 그런 거라면……."
천강이 손을 들어 권광투마의 말을 잘랐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 하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태감과 난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이유라니요?"
이해를 못 하겠다는 사람들의 시선에 천강은 간단히 일축했다.
"이건 단순히 우열을 가리는 싸움이 아냐. 저 위에서도 간절히 원하고 있어. 태감과 내가 싸우기를 말이야."
사람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아직 현경에도 도달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
'아무래도 다른 방향으로 설득을 해야겠군.'
천강이 전략을 살짝 바꾸었다.
"그리고 그쪽도 치사하게 단체로 밟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녀석도 본인 실력에 꽤 자신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설령 일대일로 이긴다손 치더라도, 살아나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냥 이곳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것이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
그러나 놈과 내가 싸우는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물론, 한 차례 미룬다면 온전히 생사경 상태로 녀석과 싸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조금 전 권광투마에게도 이야기했듯, 스승 외에 내게 인연이 된 이들…… 초아와 연화, 청청을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끼던 이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은 스승 때 하나로도 충분했다. 차라리 그들이 죽는 꼴을 볼 바에야, 내가 죽는 게 더 속 편하리라.
'이미 한 번 죽어보기도 했고 말이지.'
천강이 막사에 모인 이들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설령 그곳에 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난 내 사람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구해낼 것이다. 그건 이곳에 모인 너희들도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렇게 말을 하자, 그제야 의와 협에 약한 무림맹 사람들이 감동 어린 얼굴로 수긍을 하였다.
마교 측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강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진즉에 여울나무에 밀려 그 명줄이 모두 끊어졌을 운명이었으니까.
"그럼 나 갔다 올 테니까, 열심히 싸울 준비들 하고 있으라고. 영 불안하면 서로 한 번씩 대련이라도 좀 하고."
천강이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중원의 동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은 검은 밤하늘을 천강의 신형이 내달린다.
하늘 아래로는 어느덧 중추절이 성큼 다가와 각 도시마다 축제가 열리고, 등불놀이가 한창 진행 중인지 붉은 등이 거리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잠시 내기를 보충하기 위해 한 건물 지붕에 자리를 잡고 앉은 천강이 검은 안개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전에 선계에 올라갔을 때, 무제(武帝)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받은 서신이었다.
- 혹 생사경에 못 이르고 싸움에 임하게 되면, 그때 펼쳐 보거라.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걸 펼치자, 서신 안에는 침 하나가 놓여 있었다.
또한 그걸 감싸던 종이에는 덩그러니 한 글자가 적혀 천강의 마음을 혼란케 했다.
사(死).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
침과 함께 사(死)가 쓰여 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 혹 침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풀 수 없는 독이 묻어 있는 것 아니냐?
일리가 있어 그 끝을 확인해본즉 과연 침 끝으로 무언가 묻어 굳은 자국이 자리했다. 정확히 어떤 성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이라…….'
- 문제는 일격에 찌를 수 있느냐가 관건이구만.
- 승사 말대로다. 자칫 싸우다 침 끝에 굳어 매달린 독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다면, 더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단 일격에 성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침 자체도 여러 차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천강의 머릿속으로 숱한 무공이 스치듯 지나갔다.
'이것을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무공이 무엇이 있을까.'
태감과의 일전을 떠올리며 천강이 그와의 싸움을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이 침을 그의 몸에 꽂아 넣을 수 있는 방법을 그려 나가며.
'내가 놈에 대해 잘 알듯, 놈 또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천강이 손을 뻗으면 어떻게든 다 흘릴 것이다. 그에게 가장 까다로운 공격이 바로 탐(貪)과 천강의 흡공이니까.
'특히나 탐의 공격은 흡성대법에 가까워. 강탈이다 보니 근육이랑 기혈이 뒤틀리지.'
북명신공은 상대의 내기가 바닥이 날 때까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태감은 탐의 공격에 상대적으로 예민하게 반응을 할 것이다.
그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 찔러야 해.'
손으로 찌르면 빤히 보이니, 소매 밑에 숨기고 있다가 쏘아 보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확실한 순간에 날려 보내면 되리라.
하루 일찍 북경에 도착한 천강이 가만 눈을 감고는 태감과의 싸움을 준비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벌써 태감과의 싸움이 수천 번째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을 하고 있으면 천강의 이마 위로 촉촉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것도 잠시, 이내 천강의 눈이 찬찬히 뜨였다. 그가 앉은 건물 지붕 세 채 너머로 한 인영이 서서 그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간만이군, 흑살마신. 준비는 많이 했나?"
"물론. 근데 못 알아볼 뻔했어. 얼굴이 완전 새까매져서."
태감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흑탄이라 해도 믿을 만큼.
"그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나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라고 봐주면 좋겠군."
"아이들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히 있다. 물론, 그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오늘까지겠지만 말이야."
천강을 바라보는 태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는 천강이 아직도 생사경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번 싸움은 나의 승리군. 차라리 생사경이 되었더라면 더욱 즐거운 싸움이 되었을 것을.'
천강이 생사경에 도달했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있는 태감이었다. 그가 홱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럼 금일 미시(未時)에 보도록 하지. 궁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을 끝으로 태감이 사라졌다. 조금 있자, 여명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태양을 지상 위로 끌어올렸다.
그 찬란한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애들아."
50년 넘게 이어온 악연을 끊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