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6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62화
262화. 선구자의 조언을 듣다
초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청명하기 그지없다.
산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사천엔 벌써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상은 10만 대군의 발길에 이리저리 흙먼지가 일며 더운 기운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들 위를 한 사내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천강이었다.
"으음."
"무진아. 정신이 드냐?"
"아…… 예, 형님."
간밤에 있었던 일로 제법 핼쑥해진 무진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웠다. 그래도 정신이 들고 나자 이내 생기가 빠르게 차올랐다.
무진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한참을 가만 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제 몸이 좀 이상합니다, 형님. 몸속에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힘주지 말고 가만 놔둬라. 네 몸 상태를 치료하는 중이다."
약 반 시진 전.
사자왕과 헤어진 천강에게 탐(貪)이 몸 밖으로 나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선계 놈들에게 갈 필요도 없이 내가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정말이냐? 너 선계로 갔다가 이철괴 만날까 봐 입 터는 거 아니지?"
"……생각해보니 그것도 끔찍하군. 아무튼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건 사실이다."
탐의 설명은 이러했다.
선술 중에는 자신의 몸을 작게 만드는 기술이 있단다. 그 방법을 이용해서 무진의 몸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막힌 혈관과 기혈을 먹어 치우고 다니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해?"
"아직 제대로 된 선술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양이로군. 선계로 올라가 인간의 잣대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거의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이곳 이승에서는 선술을 사용하는 게 금기라고 했다. 자칫 세상에 혼란을 가져다줄 수 있기에.
"이렇게 보니, 선계에 올라가고도 한참을 더 정진해야 할 꼬맹이였군."
탐이 곧바로 무진의 몸속으로 들어가 막힌 곳을 뚫고 다닌다. 그렇게 무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천강이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무진이 고개를 들고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천성 내 도시는 중추절을 준비하느라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님. 그럼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천산이다."
무진의 상태를 해결했다고 해도 아직 천강에게는 천산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태감과의 일전이 남은 것이다.
종종 훅 튀어나오는 미래의 환상도 그렇고.
'아이들이 잡혀갈 것은 알고 있었어.'
그로 인해 태감과의 자리가 마련될 것도.
태감이 그 미래를 보듯 천강 또한 그걸 엿본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무진이 안 보여서 기분 탓인가 했는데 그게 이런 결과였다니.
어찌 됐든 태감의 말대로 환상은 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단 한 번도 비껴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맹점 또한 존재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건 정확한데, 그로 인한 결과는 알 수 없단 말이지.'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사건으로 인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천강은 당연히 무진이 죽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 일이 일어나기를 막으려 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 억측에 불과했다.
'만약 내가 한순간이라도 무진이 죽을 거라 생각해 포기했다면, 무진이는 진짜로 죽었을 거다.'
그 환상에 대해 좀 더 명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겸사겸사 태감과 싸워 이길 방도도 마련하고.
무진 일행에게 일어난 일을 무림맹과 마교 측에 전달하는 잠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천강은 쉼 없이 천산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천산의 보고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관리자층 중앙으로 책상 하나를 두고 노인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사학 어르신, 흑살마신 천강 인사 올립니다."
천강의 등장에 그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끌끌. 그래. 어서 오거라."
***
노인의 인도를 따라 한쪽 공간에 무진을 눕힌다.
그가 천강과 무진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이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그때도 넌 이 아이를 들고 나타났었지. 살려달라고 말이야."
"하핫. 그랬던 적이 있었지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게 참으로 보기 좋구나. 좀처럼 마교에선 보기 힘든 일인데."
마교에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게 더 크고, 하루에도 숱한 사람이 다치고 죽다 보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곳보다 빠를 뿐.
노인이 무진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금도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을 쌓으면 도와주는 이가 많지. 내가 더 손을 쓸 필요는 없겠구먼."
단순히 탐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조금 불안했는데, 사학 노인의 말을 듣자 천강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노인이 천강을 이끌고 천산의 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생사경엔 도달했느냐."
"아직입니다."
천강이 검은 안개를 쳐다본다. 천해지경이 날아와 천강을 향해 활짝 제 몸을 펼쳐 보였다.
『 자신 외에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 그럼 자연스레 생사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
『 생사경까지 31개체가 남았느니라. 』
서른하나.
최근 들어 하나의 다른 생물을 이해하는 데 10일이 살짝 못 걸리니, 단순 계산으로 일 년쯤 남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노인이 고개를 찬찬히 주억였다.
"답답하겠구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생사경만 되었어도 태감과의 승리를 어찌어찌 점쳐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현실은 태감과 까마득한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그걸 북명신공이라는 역대급 무공과 선계의 무구인 토끼의 절굿공이, 흉수 중 하나라는 탐(貪)으로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날 찾아온 것은 답을 찾기 위함이겠지?"
"예."
노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각종 비급과 영약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중앙을 가로지르며 노인이 말했다.
"미래시(未來視)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제가 본 미래는 반드시 일어나지만, 그 결과는 알 수 없다는 것까지 압니다."
"끌끌. 그래. 정확하다. 하늘이 정한 그 뜻을 인간은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는 바꾸지 못해도, 그 이후의 결과는 바꿀 수 있지. 네가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인이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계단을 오르자 각종 진귀한 무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간만에 이곳에 오니 추억이 돋는군요.
- 흠흠. 우리가 이 좁은 곳에 있었다니.
'출세했지. 너희들은 진짜 나 때문에 새 삶 시작한 줄 알아.'
내가 아니었다면 아마 최소 일백 년은 이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어야 하리라.
그러자 공포 왈.
- 그게 왜 네 덕이냐. 엄밀히 말하면, 우릴 필요로 하게 해준 투파창귀 덕 아니냐? 크하하핫.
'그럼 넌 오늘부터 다시 여기 있을래?'
바로 입을 다문다. 요새 종종 까부는 것이 아주 살 만한가 본데, 주기적으로 이곳에 데려와야 할 듯싶다.
앞서가던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는 천강을 돌아보았다. 그가 잠잠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사실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그래도 화타가 어르신을 찾아가면 어떤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과거에 저와 같은 상황에 있으셨다고."
노인의 눈이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해졌다.
"먼 옛날의 일이지. 아주 먼 옛적의 일."
천강이 노인을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그저 노인의 추억 회상이라도 들어 그것에 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어야 했다.
그런 천강의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입이 찬찬히 움직였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그 순간, 서로가 서로의 숙명이라는 걸 직감했다."
보는 순간 검을 빼 들었고, 바로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당시의 상황을 굳이 합리화하자면 호승심.
한나절을 싸우던 도중, 관군들이 쳐들어와 결국 두 사람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흩어졌다.
"관군이요?"
"당시 그와 나는 쫓기는 몸이었다. 우린 정파 출신이 아니었거든."
지금이나 그때나 정파가 아니면 다 악 취급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나는 꿈을 꾸었지. 잠을 잘 때도, 낮에 길을 걷거나 밥을 먹는 와중에도 수시로 꿈을 꾸었다. 그 꿈에는 녀석과 다시 만나 싸우는 내가 있었지."
몇 차례의 만남 끝에 결전의 날이 도래했다. 그들은 지금 이 싸움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그래서일까?
"서로가 준비한 비장의 수를 써가며 삼 일 밤낮을 쉬지 않고 싸웠지. 그리고 그 결과, 난 패했다."
"패했다고요?"
"그래. 패했지만 그는 내 목숨을 거두어가지 않았지."
천강은 사학 노인의 말에 많은 게 생략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처음에 싸운 건 호승심이었을지라도, 이후에 삼 일 밤낮을 싸운 거라면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뜻을 펼치고자 하는 의지라든지, 혹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든지.
지금의 태감과 천강 자신처럼.
그러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기에 잠자코 있었고, 곧 회상에서 빠져나온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나는 패했기에 사실 승리하는 법을 모른다. 다만 하나는 알지. 두 대척점이 만나 승패가 갈렸을 때, 승자에겐 또 다른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노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네가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스스로가 잘난 탓이더냐?"
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사자왕이 되살린 전생의 육신을 보는 순간, 천강은 자신이 환생했음을 확신했다. 그것도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이전 같았으면, '당연히 내가 노력한 만큼 강해진 것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나, 지금의 천강은 그럴 수 없었다.
"물론 너 자신도 뼈를 깎는 노력을 했겠지만, 제일이 된다는 건 단순히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다. 하늘의 과한 관심을 받고 있는 거지."
"그 말씀은……."
"너든 태감이든, 두 번째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내해야 할 것이야."
두 번째 선택에 대한 책임.
즉, 하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대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천강이 나직이 물었다.
"어르신을 살려준 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바로 하늘의 부름을 받더군. 그 자신은 조금 더 있다가 가고 싶다며 미루다 끌려갔지만. 끌끌."
생각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최근에 무진 사건을 겪으며 본 게 많은 천강이었다.
'태감을 살려야 한다고? 그 인정도 없고 무자비한 놈을?'
놈을 죽이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사태는 언제고 다시 일어날 거다. 50년 전에도 시도했던 놈이니까.
그러나 녀석을 죽이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단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천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노인이 그 앞에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자. 고민은 다음에 하세. 자네에겐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 말이 맞았다. 일단 그 고민도 싸움에서 이긴 다음에 할 일이다.
천강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혹 제가 태감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도가 있겠습니까?"
"흠. 이길 방도라. 솔직히 패자에게 이길 방도를 묻는 건 실례 아니더냐? 끌끌끌."
"……죄송합니다."
"괜찮다. 아무튼 싸움에서 패한 자와 만나보았으니, 이긴 자도 만나보는 게 좋겠지. 승리의 방도는 그에게 구해보거라."
그러며 노인이 천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치 빠르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천강이 노인에게 물건 두 개를 건넸다. 천해지경과 목걸이였다.
노인이 그것을 한쪽 벽으로 들고 가자, 이내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는 문이 덩그러니 생성되었다.
그 문머리 위로는 떡하니 문구가 쓰여 있었다.
『 구산팔해(九山八海) 』
다섯 보 정도 거리에서 노인이 문을 열자 환한 빛이 방안 가득 내려앉았다. 천강이 앞으로 나가려 하자, 노인이 그를 제지하고는 천해지경을 잡아 던졌다.
파닥파닥?!
저항을 하나 그대로 날아가 빛 너머로 사라지는 비급.
"어르신, 대체 왜……."
"한 번쯤은 직접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예?"
"네 사문의 시조 또한, 자신의 후학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을 게다."
천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노인을 살려준 그 호적수를 만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북명신공의 창시자 무제(武帝)라니?!
"대신 생각을 잘해야 할 게다. 선계에서의 찰나는 이곳 시간으로 어마어마하니. 질문들을 미리 준비하고 가는 것도 좋겠지."
그랬다. 일전에 선계로 넘어가 토끼를 만난 뒤 잠깐 손을 봐주었을 뿐인데, 이곳에선 하루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었다.
선계로 가는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되리라.
후우. 심호흡을 하며 준비하는 천강.
……좋았어. 가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끌끌. 그래. 나는 이 밑에서 기다리도록 하마."
천강이 성큼성큼 걸어 문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빛이 몸을 감싸고, 이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감각이 차츰 사라져 갔다.
번쩍 빛이 일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방안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크나큰 진동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 으아아. 이번에도 우리를 놓고 가다니!
- 이건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네. 우릴 까먹을 수 있느냔 말이다!
- 나도 보고 싶느니라. 나도 선계 구경하고 싶느니라!
"……허허허허허."
온몸을 떨어대며 방안을 흔드는 그들의 행태에, 노인이 조용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 후로도 신병이기들은 한참을 울분을 토해내며 천산의 보고를 시끄럽게 만든 뒤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