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6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61화
261화. 응급처치
"사자왕(死者王)? 네가 왜 여기에?"
등에 짐을 이고 천강을 향해 다가오는 노인은 무림의 다섯 왕 중 하나인 사자왕이었다.
그가 천강의 질문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 자네랑 사천성 마교 지부에서 만나기로 했잖은가? 은신처에 가서 내 물건들 좀 챙기고 오느라 좀 늦긴 했네만……. 아무튼 이 밤중에 웬 큰불이 일기에 호기심이 일어 와봤네."
그러고는 그가 천강이 멱살 잡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적인가?"
"아니. 내 의형제다."
"저런. 쯧쯧. 지독한 수법에 당했구먼."
"뭔지 아나?"
사자왕이 대답 대신 짐을 내려놓고는 천강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무진 옆으로 자리를 잡아 그 몸에 손을 올렸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아. 맞네. 종신소의대법에 당했구먼."
종신소의대법.
태감이 무진에게 펼친 기술이다. 먼 과거 소림에서 개발했다가 너무도 잔혹해 봉인된 무공.
이것에 맞은 이는, 사람에 따라 그 차이가 있지만 종국엔 반드시 죽게 돼 있었다.
원래는 큰 죄를 범한 이들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고자 만든 것이었는데, 의식이 깨어있는 만큼 고통도 그대로 수반돼 보통은 때가 이르기 전 광인이 되는 일종의 마공이었다.
사자왕이 혀를 끌끌 찼다.
"현재 무림에서 이런 무공을 쓸 수 있는 자는 딱 한 명뿐이지. 태감(太監)."
"혹시 고칠 수 있나?"
천강의 물음에 사자왕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신선이 와도 고치지 못해. 하하핫. 물론, 비유가 그렇다는 거니까 그리 노려보지 말게. 근데 어디를 가려는 겐가."
"화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라면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미안하지만 소용없을 걸세. 나도 화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네만, 과거 그는 이것을 고치지 못했네."
무진을 막 들어 올리려던 천강의 얼굴에 낙담이 올라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넓고 넓은 중원에, 무진의 상태를 고칠 이가 한 명이 없다니.
그 모습을 잠시 빤히 쳐다보던 사자왕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래도 방법이 완전 없는 건 아니네."
"무슨 뜻이지?"
"자네는 알고 있지 않나."
무슨 의미냐며 천강이 그를 다그치자 사자왕이 답했다.
"선계로 가는 방법. 적어도 선계엔 이걸 고치는 방법이 있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게 다구먼."
그렇군.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응당 선계라면 이 정도쯤은 고칠 수 있을 것인데.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선계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무진을 선계에 데려다 놓고 그 틈에 이곳에서 방도를 찾아도 늦지 않았다.
"천산까지 가는데 버틸 수 있을까?"
"후우. 초 치는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네만, 사실 그게 제일 관건일세."
종신소의대법에 걸린 자는 오래 버텨봐야 사흘이면 죽는다.
평균적으로는 이틀.
문제는 천강이 여기서 아무리 빨리 뛰어봐야 사흘 안에 천산에는 당도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럼 이 증상을 완화하거나 늦출 방법은?"
"어디 보자. 잠만 기다려 보시게."
사자왕이 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보따리 안에는 수십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그중 십여 개의 서책을 꺼낸 그가 천강에게 말했다.
"빛을 좀 만들어주겠나?"
천강이 아주 큰불을 만들어주었다. 어떤 내용이 쓰여 있나 하여 뒤에서 엿보니, 그 대부분이 실험을 기록한 일지였다.
"우리 혈교는 늘 오래, 평안히 사는 걸 꿈꿔왔지. 잔병치레 없이 건강히 사는 걸 말이야."
다만 취지는 좋았으나 그것에 너무 과도하게 빠져 인체실험을 무분별하게 하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지탄받고. 종국엔 마교에서까지 배척받아 중원 외지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리곤 이렇게 망해 나 혼자만 남았으니……. 그래서 내 그대에게는 참으로 감사하고 있네. 그날 그 무덤에서 죽었다면, 우리 선인들의 노력과 지혜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졌을 테니까."
책을 다 살펴본 사자왕이 한숨을 탁 쉬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앞에 앉은 천강에게 말했다.
"일단 방법은 있네."
"뭔데."
"근데 그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네."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지금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의동생인 무진은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선계로 갈 때까지 버틸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말이다.
한 차례 무진에게 시선을 준 사자왕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 세 개를 치켜세웠다.
"세 가지가 필요하네. 하나는 지금 이 아이의 몸속에 잔재해 있는 태감의 기운을 빨아내는 것일세."
현재 무진의 몸속에는 태감의 기운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몸 주인의 내기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연의 기운도 막고 있었다.
"또한 지금 이 아이의 심장은 찢어져 있네. 태감의 기운이 그걸 감싸고 있어 출혈로 이어지고 있지 않지만, 그게 심장을 타고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가 혈관들을 막고 있는 중이네. 내기를 빨아내는 순간, 그 혈액이 빠르게 심장 밖으로 분출될 걸세."
그걸 막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게 심장의 출혈을 봉할 무언가였다.
그것까지 조치를 완료한 뒤 필요한 게 바로 영물.
"영물?"
"그래. 풀때기로는 안 되네. 살아있는 영물을 섭취해야, 심장이 빠르게 아물 수 있네."
그제야 천강은 사자왕이 왜 힘들다고 말한지 알 수 있었다.
태감의 내기를 빼내는 거야 천강이 할 수 있었으나, 찢어진 심장의 출혈을 압박하고 그걸 치유할 영물을 구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고개를 푹 수그리는 그때, 천강의 옷이 팔랑거렸다.
"인간.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이냐?"
탐(貪)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내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군. 너무 배가 고프면 내가 그 심장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강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무진의 특이체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남은 하나는 영물인데.'
천강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현재 중원에서 가장 쉽게 영물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곤륜산이다.
중원에 나올 적 그곳에서 숱한 영물들을 직접 마주하기도 했었고.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게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고민이 드는 것도 잠시, 음?!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천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것도 되나?"
천강이 검은 안개에서 물건 하나를 조심스레 빼 든다.
그것은 주먹만 한 알이었다. 한때 곤륜의 배신자들을 처리할 적, 그 장로들이 가지고 있던 걸 취한 것이었다.
사자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것은…… 영물의 알이로군!"
"맞아."
"아니, 이 귀한 걸 어찌 구했는가?!"
영물을 보기란 매우 힘들다. 쉽게 표현하면, 길 가다가 황족을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그중 영물의 알…… 그것도 내기가 어려 있는 상태의 알을 발견하기란, 객점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과 밥을 같이 먹었는데 그가 황제인 것과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냥 길 가다가 주웠어."
사자왕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천강을 바라보았다.
어이. 그리 노려봐도 사실이거든?
곤륜에서 배신자들을 처리하고 지나가는데, 문득 건물 안으로 신기한 물건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그저 주웠을 뿐이었다.
"끙. 눈만을 보면 사실을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어떤 영물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병신 같아서 그랬네. 자, 그럼 필요한 건 다 있는 것 같으니 준비하게."
천강과 사자왕의 대화를 함께 들었는지, 무진의 얼굴에 긴장된 기색이 올라왔다.
뭐 그럴 수밖에. 지금 자신의 심장이 찢어져 있으며, 어찌 됐든 탐(貪)이 그 심장을 압박하기 위해 들어가려면 맨살을 뚫고 들어가야 할 테니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라."
천강이 손을 잡아주자, 무진의 얼굴에 결의 어린 표정과 함께 미소가 올라왔다.
"다 준비됐는가?"
"그래."
"……예."
"그럼 흑살마신. 이 아이의 양다리에 손을 올리게."
양다리?
"가슴이 아니고?"
"그래. 어차피 그 천잠보의에도 내기를 흡수하는 능력이 있잖은가."
천강이 무진의 두 다리를 움켜쥐었다. 탐(貪)이 천강의 몸에서 빠져나와 무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영물의 알을 든 사자왕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촤라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구멍을 뚫고는 심장으로 향하는 탐.
천강이 북명신공으로 내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탐 또한 심장 부근에 완벽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살랑살랑.
채 무진의 몸속으로 다 들어가지 못한 탐의 몸뚱어리가 밖에서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무진의 표정을 확인해본즉 꽤 편안해 보였다.
"어때?"
"흠. 성공이군. 성공일세!"
사자왕의 말에 천강이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세상을 멸망시킬 힘을 지닌 흉수답다고 해야 할지.
그럼 이제 남은 건 심장이 붙는 것뿐인가?
무진의 몸으로 다시 대자연의 기운이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몸의 4할 가까이 기혈이 막힌 상태라 그 흐름은 거세지 않았다.
무진의 몸을 일으킨 사자왕이 그 목을 살짝 뒤로 젖혔다. 영물의 알이 무진의 입 위에 자리 잡았다.
"들어라. 이 영물의 내기가 흘러들어 가면 최대한 심장 쪽으로 보내거라. 흑살마신. 자네는 천잠보의에게 그 기운을 먹어 치우지 말아 달라고 하게."
들었지?
- 킁. 상당히 맛나 보이는 내기인데…….
'잘 도와주면 영물 먹을 기회는 따로 줄게. 저기 곤륜산에 영물이 발에 채도록 많거든. 이왕이면 지금 잠깐 참고, 다음에 여러 개 먹는 게 너도 낫잖아?'
- 흠흠. 약속한 것이다, 인간.
영물의 알이 갈라진다. 무진의 입안으로 그 내용물이 흘러 들어간다.
천강이 던진 미끼가 꽤 흡족했던 것인지 영물의 내기는 무진의 심장에 잘 전달되었다. 다만 무진이 고통스러운지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거렸다.
"야, 사자왕!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증상이 이상한데?!"
"어어? 왜 이러지?"
이런 돌팔이 새끼. 지가 당황하면 어떻게 해?
설마 예상치 못한 어떤 부작용이 있는 건……?
그런 생각도 잠시, 탐의 외침에 천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진정해라, 인간. 내 특별히 신경을 써, 심장이 잘 붙을 수 있도록 이리저리 만져주고 있는 것이니. 대신 못해도 영물 다섯은 줘야 할 것이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얘가 살면 그 배로 잡아 줄 테니까.'
- 크흐흐. 그것참 의욕이 샘솟는 말이로군!
그렇게 무진의 심장이 붙는 건, 여명의 빛이 내려앉고 이후 아침 해가 완전히 뜨고서야 완료될 수 있었다.
통증이 상당하였던지 모든 일이 끝났을 때에는 무진은 그대로 녹초가 돼 기절하고 말았다.
'수고했다, 무진아.'
천강이 무진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는 사자왕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 또한 간밤의 일로 신경을 많이 썼는지 주름이 더욱 깊이 패어있었으나, 그 입가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마 혈교의 원대한 사명.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건강하고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한 걸음 일조한 것에서 오는 보람과 즐거움이겠지.
다른 혈교인들은 몰라도 눈앞의 노인은 왠지 혈교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천강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수통을 노인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하핫. 그럴 리가. 지금 각 혈관에는 피가 막혀 찌들어 있을 게야. 그것이 문제가 되기 전에 천산으로 가서 조치를 취해야 비로소 끝인 게지."
사자왕의 말로는, 다른 이들 같았으면 설령 고쳐도 평생 불구가 되거나 할 것이나, 다행히도 무진은 광존과 같은 특이체질이라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미약하게나마 몸 전체로 새로운 기운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덕에 막힌 혈관이 썩거나 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뭐 영 안 되면 신선환을 먹여 봐도 되고 말이지."
환골탈태를 다시금 한다면, 몸의 기혈들이 다 뚫릴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두고 한 말이네. 이론과 현실은 늘 차이가 있으니까. 끌끌. 아무튼 이것으로 그날 굴에서의 은원관계는 청산한 것일세."
"고맙다."
이렇게 그때 베푼 은혜가 되돌아오는구만.
그럼 이제 무진을 데리고 천산으로 뛰어갈 일만 남았군.
천강이 무진을 내기로 들어 올렸다. 부리나케 달린다면 아마 닷새 이내엔 도착할 수 있으리라.
"나중에 사천성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그리함세."
사자왕과 작별 인사를 나눈 천강의 신형이 서쪽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