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59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59화
259화. 하늘이 정한 미래
달그락- 달그락-
수레 다섯이 평탄한 평지를 줄줄이 나아가고, 그 주위를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호위하듯 포진한다.
얼핏 보면 행상인 같이 보이는 이들은 황실을 장악하고 중원을 거머쥔 동창(東廠)이었다.
그들은 사천성에서 대장군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쟁에 쓸 하르간이란 풀을 운송하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 중인 그들 앞으로 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태감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멈추어 세웠다.
"지금부터 인원을 나눈다."
"두 길로 나누어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낫지 않겠나."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신선환의 진실을 알고 있는 마교가 무림맹과 함께 했다는 정보가 들어온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태감이 두 사람을 지목해 좌편을 가리켰다.
"이 둘은 수레 둘을 이끌고 나와 함께 좌편으로 이동한다. 나머지는 그대로 전방으로 나아가도록."
"예, 태감. 그럼 사천성에서 뵙겠습니다."
***
가을에 접어들며 알록달록 꽃단장을 하기 시작하는 산천초목 어느 산길.
네 사람이 노상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비어버린 인력을 메우기 위해 이동 중인 무진 일행이었다.
무진이 물로 목을 축이며 초아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끼리 할 수 있을까요?"
다른 곳은 여덟아홉에 가까운 인원이 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네 명에 불과하지 않던가.
달리느라 지친 말을 쓰다듬어 주던 초아가 호탕하게 웃는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어리고 숫자가 적어도 화경만 넷이야."
또한 무공이나 실력들도 하나같이 고강했다.
일단 초아 자신의 경우, 마교 내 암살자 중 제일이라는 암운사신의 무공을 익혔으며 암운곡 내내 신동 소리를 달고 살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무진의 경우 광존과 같은 특이체질에다가, 연화는 상대의 모든 공격을 예측하는 독목신공을 갖추었고, 청청의 경우엔 무려 투파창귀의 무공을 사사하였다.
"거기다 우리 청청에겐 신병이기까지 있다고? 경지는 화경이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현경이라고 할 수 있지!"
사실 이미 경지 또한 현경이었지만 청청이 말없이 방긋 미소 지었다.
즉, 현경 하나에 화경 세 명에 해당하는 전력. 사실상 그 어느 곳보다 실패할 확률이 낮다고 할 수 있었다.
그에 연화의 뜬금없는 소리에 냉큼 응한 것이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무진이 고개를 주억인다.
늘 천강과 비교하다 보니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했는데, 정작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땐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튼 사천성에서 줄곧 대기하는 것보단 이게 훨 낫네."
"그러게요, 언니."
이제야 뭔가 무림의 위기 속에 도움이 되는 듯한 기분.
물론 모두가 그것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물오물. 먹을 것만 좀 두둑이 챙겼으면 금상첨화였는데."
그새 식량을 털고 있는 연화를 보며 초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내친김에 아예 식사를 하고는 이동했다.
그런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한 건, 해가 져 온 세상이 어스름하게 비칠 때였다.
"여기가 맞는 것 같죠?"
"어. 맞아. 저 상류로 굽이치는 물길과 여기 다리. 확실해."
북경에서 사천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곳곳에 자리한 수로를 건너야 한다.
응당 풀을 나르기 위해 수레도 끌고 올 터이니, 무림맹과 마교 입장에서는 각각의 다리 부근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되었다.
"아줌마, 다리 밑에 숨어있는 건 어때?"
"나야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어서 상관없다만 너 물속에 계속 숨어있을 수 있어?"
"여기 물은 천산 지하수로와 달리 따뜻해서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물 깊이가 상당해 그 제안은 단번에 기각되고. 주위를 살펴보며 매복할 곳을 찾는 그때, 저 멀리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아이들이 다리 아래쪽, 짙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건너편을 조용히 응시한다.
달빛이 유독 약한 날이라 정확한 형체가 보이진 않았으나, 말의 푸드덕거리는 콧김 소리와 나무의 삐꺽거림으로 볼 때 수레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과연…… 조금 더 가까이 오자, 그 형상이 고스란히 그들 앞에 드러났다.
"수레야."
"두 대네."
"장사꾼들일까요?"
각각의 수레를 이끄는 마부 둘을 제외하고는 호위도 병력도 없다. 이 늦은 시간에 행상인들이 홀로 돌아다닐 일은 없으니, 아무래도 요 근방에 사는 사람인 듯 보였다.
"이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봐도 그래 보입니다."
그런 결론이 내려지려는 순간이었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청청이 의문을 내비쳤다.
"근데 구소환패 말로는 저 사람들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데요."
일반인이 무기를 지니고 다니진 않는다. 아이들이 서로를 쳐다보고, 이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수레가 다리를 건너는 순간, 공격하는 거야."
초아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
벌레들이 노래하는 늦은 시간.
고요한 숲 위로 돌연 태풍이 인다. 그것은 한 인간이 빠르게 지나가며 인 후폭풍이었다.
- 소년,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건가요?
막야의 질문에 천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하늘을 내달렸다. 천강의 머릿속으로 마지막으로 본 환상이 계속 스치듯 지나갔다.
'안 돼. 더 빨리 가야 해.'
그 일은 어둠이 자욱이 내려앉은 시간에 벌어진다.
곳곳에 싸움의 흔적이 그득하고, 천강이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어둑어둑해진 사위를 본 천강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하늘이 정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천강이 안 움직이고 버티면 바뀔 수 있는 미래였다. 적어도 천강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운철에 대한 정보를 얻으러 가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태감을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고, 금의위를 만난 그 자리서 아침까지 시간을 죽였다면 또한 그와의 만남은 비껴갔을 것이었다.
얼마 전 흑귀 또한 마찬가지. 쫓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도망칠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이번 환상은 그런 천강을 시험해보려는 듯 움직이게 만들었다. 마치 어디 한 번 힘껏 발악해보라는 듯.
'난 그따위 미래 인정 못 해!'
천강의 신형이 광풍을 일으키며 사천의 동쪽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
셋! 이라는 외침에 무진과 아이들이 일제히 튀어 나갔다. 그들의 등장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검을 빼 들었다.
어스름한 달빛에도 그 빛을 받아 번쩍이는 날붙이들.
"웬 놈이냐!"
뻔한 대사와 함께 그들이 살기등등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검신을 타고 피어오르는 강기.
그러나 그들의 적은 무려 고수의 상징인 강기를 보고도 조금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한 남자를 향해 매섭게 쇄도해 나갔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녀를 향해 일말의 자비도 주지 않고 빠르게 연격을 펼쳤다.
어둠 위로 번쩍번쩍 화려한 섬광이 일었다. 그러나 공격을 하는 이의 입에서는 당황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미, 미친?!"
상대가 모든 공격을 완벽히 다 피해낸 것.
그 말도 안 되는 재주에 그는 자신감을 상실해 이내 틈을 보였고, 그 순간 그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짓쳐들어와 그의 목을 썩둑 잘라냈다.
"앗. 아줌마 뭐야! 이제 막 반격할 참이었는데!"
"풉. 느린 네 손을 탓하렴."
그렇게 연화와 초아가 화경 하나를 처리하는 사이, 무진과 청청은 다른 한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청청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진이 상대의 검격을 흘려 빠르게 접근하고는 검을 쥔 손을 강하게 후려치자, 그대로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마무리로 적의 명치에 내가중수를 먹여 깔끔히 끝낸 무진은 자신의 힘을 고작 1할밖에 개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진, 실력이 더 늘었네. 아주버님께서 기뻐하겠어."
"그래도 아직 멀었지."
청청이 다가와 무진의 혈도를 다시 막아준다. 막 싸움을 끝낸 초아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수확물을 확인하기 위해 수레에 모인 아이들.
"대체 뭘까. 신선환의 독성을 일으키는 풀이라는 게."
사실 이미 어떻게 생긴지는 안다. 일전에 동창에서 천산 곳곳에 배치했던 걸 회수하며 본 탓이다.
연화의 물음은 그저 순수하게 풀의 정체가 궁금하다는 뜻.
"일단 물건이 맞나 확인해 보자."
수레 위 덮개를 걷어낸다. 한 번 본 적 있는 마른 풀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럼 난 이쪽을 확인해 볼게!"
쫑쫑쫑 뛰어가 덮개를 잡고는 여는 연화. 그 순간 청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연화! 조심해애애!"
청청의 벼락같은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앞쪽 수레로 가 닿았다. 연화의 신형이 무너지고, 막 수레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이군. 그 잠깐 사이에 몸을 비틀다니. 역시 마인들은 어리다고 얕볼 수 없군."
"연화!"
연화가 바닥에 쓰러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초아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다시 나타난 건, 태감의 바로 뒤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 두 개로 목을 향해 내지르는 일격. 그 안에는 태감의 그 목을 두 동강 내 저승으로 보내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태감은 그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
"가, 강기가 안 통해?!"
"놀랍군. 사신도 아니면서 내기를 완전히 숨긴다라……. 흑살마신이 누구에게 배웠나 했더니 이쪽 사문이었나."
태감이 내력을 발산한다. 무려 생사경이 내지르는 강한 파동에 고스란히 노출된 초아는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언니!"
청청이 등에 메고 있던 구소환패를 빼 들었다. 그러나 태감의 시선이 닿는 순간, 청청은 나자빠지고 구소환패가 산산조각 나 강물 위로 흩뿌려졌다.
"아……."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게 생사경?'
신병이기를 고작 눈빛만으로 박살을 내버리는 신위라니. 아무리 악기형 신병이기가 그 내구도에 있어 약하기 그지없다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구소환패!"
청청이 비명을 지르다 태감에게 점혈을 당하고는 쓰러졌다.
아이들의 사기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걸 확인한 태감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한 명 한 명을 슥 얼굴을 확인했다.
'그래. 얘들이 맞아. 얘들도 그곳에 있었어.'
얼마 전 북경에서 출발할 때 태감은 한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흑살마신을 만나 싸움을 벌이는 미래.
그러나 평소 보던 것과는 달랐다. 환상을 보는 기간도 길었고, 현실로 돌아온 뒤로는 묘한 확신까지 들었다.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그런 확신이.
그 뒤로는 그 미래와 관련된 환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을 여기서 만날 것도 그렇게 안 것이다.
태감은 이들을 잡아가는 것이 그 미래를 완성하는 길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에 점혈을 해 챙기려는 그때, 태감 앞으로 한 사람이 나섰다. 무진이었다.
"선인께 인사드립니다. 무진이라 합니다."
태감의 시선이 무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역시 다시 확인해 봐도 미래엔 없었던 인물이다.
"그래. 죽기 전 유언이라도 남길 게 있느냐."
"그건 아니고, 저와 내기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
태감이 파안대소했다.
이전 같았으면 대화고 뭐고 무림인을 만나는 순간 그 목을 쳤을 것이나, 천강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은 태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내기더냐?"
"혹 제가 선인께 의미 있는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제 동료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옷깃을 스치는 것도 아니고 의미 있는 타격이라?"
무진이 그렇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연한 표정 하며, 또한 사신 시술을 받은 그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주겠다는 호언에 태감은 돌연 강하게 흥미가 돌았다.
그가 수레로부터 찬찬히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근데 왜 조건에 너 자신은 뺀 것이냐."
인간은 간사하다.
남보단 자신을 중시하며, 설령 남을 우선하더라도 그 안에는 이유가 있다.
정파인들이 협을 외치며 희생을 하더라도 그 속에는 자신의 명예를 챙기는 게 있듯이 말이다.
그나마 무림인 중에 인간의 본성에 가장 솔직한 이들이 있다면 바로 마교인데, 그렇기에 태감은 지금 무진의 선택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진이 선선히 대답했다.
"많은 걸 바라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저까지 살려 달라 하면 내기에 응하지 않을까 하여 그랬나이다."
"하핫. 그 배포와 현명함이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무진이 자세를 잡았다. 태감이 뒷짐을 지고는 어디 들어와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뚜둑. 뚜두둑.
두 다리에서부터 온몸으로 막힌 혈도가 풀린다. 고요히 흐르던 대자연의 기운이 돌연 맹렬하게 무진에게로 쇄도한다.
무진이 땅을 강하게 박차고 나가자, 그 기운들은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콰-
무진이 태감의 앞으로 쏜살같이 접근했다.
좁쌀만 하던 그의 내기는 점차 그 크기를 불리더니, 태감의 앞에 도착할 때쯤에는 태산같이 부풀어 올랐다.
"이, 이것은?!"
태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소용돌이가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이듯, 온 산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해내는 걸 보고서야 무진의 체질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 본들 일개 체질일 뿐!'
광존과 몇 차례 싸워본 그는 그 특이체질이란 게 별것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지속력에 있어 효과가 있긴 하지만 딱 그뿐이었던 것이다.
태감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배와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뒤로 젖혀진 무진의 주먹이 앞으로 움직였다.
'단 일격에 천지가 무너지고 요동을 치니.'
수천 번 수만 번 내지르고 연습한 권격.
두 다리가 바닥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대자연의 기가 그곳을 타고 올라와 허리를 단단히 받친다.
그리고는 상체와 양팔로부터 흘러나온 내기가 주먹 끝에 응집해 폭발하니…….
'지천뇌공.'
큰 폭음이 일었다. 고요한 강길 주변으로 광풍이 일었다.
줄곧 자신만만하던 태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