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5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56화
256화. 천존(天尊)
탓- 타닷-
녹음이 우거진 숲 위. 선선한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이 날아간다.
하늘을 유영하는 매처럼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들은 천강과 개방의 방주였다.
개방 방주가 붉은 코를 슥슥 매만지며 웃었다.
"껄껄. 이거 아주 기분이 좋구먼! 정녕 네놈이 인간이 맞긴 맞느냐!"
제아무리 현경이라도 이리 내기를 팍팍 쓰며 다니진 못할 것이다. 끽해야 한 시진이 고작일까?
그러나 현재 천강은 한나절을 내리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개방 방주를 짊어진 채.
그 어마어마한 내기 양에 그가 놀랍다는 듯 연신 감탄사를 터뜨린다.
"마치 기린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 이와 같지 않겠느뇨!"
그러나 내기가 차고 넘치는 천강이라도 노을이 지는 황혼 때쯤에는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해야 했다.
탐(貪)이 있는 바람에 내기 소모가 급격했던 것이다. 녀석이 심검도 막아주고 기척도 차단해주는 게 좋긴 하나, 유지하는 데 꽤 내기를 많이 잡아먹는 단점이 있었다.
이왕 휴식을 취하는 김에 불을 피우고 식사를 하자, 개방 방주가 주위를 한차례 슥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지금 우리가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이냐? 북경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니었느냐?"
"최종 목적지가 북경은 맞아. 근데 그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청해에서 출발한 천강은 북경까지의 최단 거리로 이동하지 않고 줄곧 동쪽으로 쭉 이동해 왔다.
북경으로 가려 했다면 섬서를 지나 산서로 들어섰어야 했으나, 천강은 하남 경계에 와 있었다.
"강소에서 누굴 좀 만날 거야."
"강소라! 술 마시기 좋은 곳이로구나! 껄껄껄."
……누굴 만나는지 물어볼 줄 알았더니.
술 마실 생각만 하는 개방 방주를 보고는 천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도 방주까지 올라갔다는 생각에.
뭐 그래도 거지치고는 화경 끝자락이면 제법인가?
- 근데 정말 그곳에 있을까요, 소년?
'모르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나 천강은 묘하게 확신이 들었다.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
밤새 달려 새벽녘이 되는 아침이 되어서야 천강은 강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수향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가지고 하오문 강소 지부에 들어서자, 지부장이 나아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흑살마신을 뵙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강소에 사람을 만나러 왔다."
"그게 누군지 말씀해주시면 바로 대령하겠나이다."
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길 인도를 해야 할 거다."
으응? 술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 웃던 개방 방주가 그제야 호기심을 갖는다. 천강의 대답을 들은 지부장은 누군지 예상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혹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으신지요?"
"맞아. 안내해. 천존에게."
"처, 천존?!"
천존(天尊).
무림의 다섯 존자 중 제일이라 불리는 자.
천수향의 말에 따르면, 한때 의선이자 약선, 만의선사라고도 불린 전적이 있는 이다.
화타란 이름의 주인이라고도 하니 무려 이승에 천 년간 살아온 인물로, 이미 경지는 생사경에 도달했으나 이승에 어떤 미련이 남아 아직까지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천강은 지금 그 천존을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럼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이 왕방울만 해진 개방 방주를 이끌고 천강이 그 뒤를 따라간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개방 방주도 아직까지 천존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듯했다.
'뭐…… 하오문도 홍랑이 언질을 줘 그때부터 추격을 했다고 하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코끝으로 짠내가 느껴지고 이내 갯벌이 펼쳐진 바다에 도착하자, 하오문의 지부장이 갯벌 바위에 앉아 아침 해를 구경하고 있는 한 노인에게로 인도했다.
부스스한 머리.
햇빛에 그을린 피부.
'이자가 화타…….'
정돈하지 않은 꼴이나, 거지 못지않은 행색이 개방 방주를 옆에 붙여 놓고 보니 같이 다니는 동네 어르신 같이 보인다.
영락없는 바닷가의 늙은 노인과 같은 모습에 천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그 내면에는 태감(太監)조차도 아득히 넘어서는 기운이 어려 있었다. 천산의 보고 어르신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살짝 다른.
"늘 나를 지켜보더니, 오늘은 손님을 모셔왔구먼."
"죄송합니다. 혹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오문주의 진중한 사죄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다만 너무 가까이서 따라다니진 말라 하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신경이 쓰이니까 말이네."
"예. 아이들에게 그리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결국 이날이 오는구만."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존이 자신의 옆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와서 앉으라는 의미였다.
염치없이 냉큼 그곳으로 달려가려는 개방 방주를 잡아 하오문 강소 지부장에게 넘기고는 천강이 그 옆에 앉았다.
눈치 빠르게 지부장이 개방 방주를 끌고는 저 멀리 사라졌다.
"놔라! 어딜 어린 놈의 자슥이!"
"기다리는 동안 술 사드리겠습니다."
"으응?"
"술주정도 들어 드리지요."
그렇게 개방 방주가 지부장을 따라가고, 갯바위에 앉아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두 사람.
천강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 제가 올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냐라……. 그래. 한 번은 올 거라 생각했네. 그게 오늘인지는 나도 확신이 없었지만."
"그럼 제가 왜 왔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있자 천강에게 물을 뿐.
"내게 무얼 원하나."
"제가 엿본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건 많은 걸 함축한 말이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 태감과의 만남을 내 의지대로 피할 수 있는지.
최근 들어 부쩍 드는 의문이, 태감과 가까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환상을 자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천강이 느끼는 게 사실일 경우, 이번에 북경으로 올라가면 또다시 부딪치게 될 터.
그런 상황에 천강이 화타를 만나러 온 건, 그가 천강에게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감과 같은 생사경이면서 무려 천 년을 살아온 경험이 있기에.
화타가 처음으로 천강을 돌아보았다. 그가 천강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미롭군. 분명 현경에 불과한데, 머릿속 심득의 경지는 그 너머를 넘어서고 있다니. 자네는 무슨 무공을 익혔지?"
"북명신공을 익혔습니다."
"북명신공. 북명신공이라……."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고자 천강이 말을 덧붙였다.
"무제(武帝)의 무공입니다."
"아아, 무제! 그렇군. 그래서 그런 거였군."
그는 장고를 거듭하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천산의 보고 주인에게 물어보면 될 터인데, 왜 나를 찾아왔는가?"
"예?"
순간 이해를 못 해 되물었던 천강이 다시 대답했다.
"제게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북경으로 가서 일을 마치고 다시 사천으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맞아. 그랬지. 그래서 날 찾아온 거고 말이야."
화타가 주위를 슥슥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조그마한 나뭇가지를 집어 천강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그것을 자신의 검지 위에 올리는 노인. 이내 기다란 나뭇가지가 화타의 검지 위에서 균형을 잡고는 수평으로 우뚝 멈춰 섰다.
"세상은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네. 양이 극성하면 음으로 화하고, 반대로 음이 극성하면 양으로 되돌아오듯 세상의 모든 건 균형을 맞추려 하지."
화타가 나뭇가지를 살짝 건들자, 그것이 위아래로 흔들흔들하더니 이내 다시 균형을 맞추었다.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북경으로 가길 꺼리는 태감(太監) 또한 마찬가지."
"그 말씀은…… 저와 태감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말씀입니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네만, 상대가 그걸 강하게 원하고 있다네. 늘 자네를 만나길 원하고 고대하고 있지."
생사경은 신선의 반열에 오른 자다.
신선이 원하면, 그 의지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그걸 이루고자 움직이게 된다.
즉, 태감 쪽에서 천강을 엮고 있다는 뜻.
"태감과 거리상 가까워질 때마다 서로 마주치는 환상을 볼 거네. 그렇지 않나?"
천강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화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거리 때문이 아닐세. 거리상 가까워지다 보니, 자네도 태감을 머리로 인지하고…… 그렇게 서로 간에 접점이 발생하는 걸세."
"그 말씀은 제가 태감을 만날 걱정을 안 하면 안 만나게 된단 뜻이군요."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게야. 인간에게 걱정과 불안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니 말이네."
그럴 것이다. 마음이나 생각이나 쉬이 뜻대로 된다면, 태감은 진즉에 지상의 미련을 버리고 하늘 위로 우화등선했을 것이다.
어쩌면 눈앞의 화타 또한 마찬가지.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번에 북경으로 올라갈 때 마주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아직 태감을 만나선 안 된다.
신선환의 진실이 드러나면 황실은 몸을 사릴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태감 또한 발목이 묶일 것이다.
그러면 천강에겐 못해도 1년 이상의 여유가 생긴다. 그 기간 동안 생사경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바로 천강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북경으로 올라간다면 또 만나게 될 터. 그런 강한 직감이 계속 천강의 머릿속을 혼미케 만들었다.
그런 천강의 마음을 느낀 걸까. 화타가 입을 벌리고는 주저주저하다 말했다.
"아마 이대로 올라간다면 자네 생각대로 태감을 분명 마주칠 게야. 하늘의 뜻을 누가 막겠나.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쓴다면 그걸 미룰 수 있네."
"정말입니까?"
"그래. 피하지는 못하네. 그저 미래의 어느 날로 미루는 거지. 다만 그것엔 크나큰 단점이 존재하네."
화타가 말하는 단점이란 이러했다.
"그 미래는 언제가 될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모르네. 한 번 확정되면 절대 바꿀 수 없고, 그날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네. 만약 만남을 피하게 된다면, 피한 자의 지인 중 누군가가 확정적으로 죽지. 일종의 대가일세."
화타의 눈동자가 천강을 정확히 직시한다. 그의 얼굴엔 흥미가 그득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하겠나?"
- 소년. 그냥 피하는 건 어떤가요? 찜찜한 선택은 피하는 게 답입니다.
- 아닐세, 막야. 오히려 이대로 북경에 올라가는 게 더 찜찜하고 불확실한 선택 아닌가? 오히려 만날 미래를 확정 짓는 게 더 나을 것이네.
- 그러다 당장 내일 만나는 것으로 나오면요?
- 흠흠. 설마하니 그러겠는가? 미래로 미룬다 했으니 적어도 내일은 아니지.
신병이기들도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에 대해 결론이 안 나오는 듯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강은 줄곧 느끼고 있었다. 태감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으며, 이번에 북경에서 그를 만나면, 이전처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것을.
'일단 급한 불은 끄고, 이후 사학 어르신을 만나보자.'
그것이 천강이 내린 결론.
화타가 사학 어르신을 만나는 게 더 낫다고 추천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겠습니다."
천강의 대답을 들은 화타의 얼굴이 활짝 만개했다.
"그럼 눈을 감으시게. 그리고 태감과의 만남을 간절히 희망하시게. 그와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그럼 하늘이 잔가지를 모두 쳐내고, 그 운명의 날을 결정지어 줄……."
화타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진다. 그리고는 순간 한 미래가 천강의 눈에 선히 보였다.
"……어땠는가?"
화타의 부름에 천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신병이기들도 어떤 미래를 봤는지 천강에게 앞다투어 캐물었다.
그러나 천강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화타가 천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그 반대 손을 천강의 시선 앞으로 들어 보였다.
그 손엔 아직도 나뭇가지가 덩그러니 검지 위에 놓여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여기까지일세. 북경의 일이 끝나거든, 천산의 보고 주인을 찾아가게. 그가 자네에게 나보다 더 나은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네."
화타가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다 위 수평선을 바라본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떠올라 하늘 위로 승천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천강이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는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고개만 돌려 물었다.
"근데 왜 천산의 보고 주인이 더 나을 거라 조언하신 건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화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 또한 자네와 같은 운명을 타고났던 자. 그리고 그 승부에서 패한 자. 어쩌면 자네가 원하는 해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걸세."
천강이 정중히 다시 한번 예를 갖추고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
"태감. 준비가 끝났습니다."
황궁의 동쪽 끝자락.
수레 다섯 개와 그 안에 실은 물건을 일일이 확인한 동창(東廠)의 일원들이 도열해 섰다.
그들은 태감으로부터 출발 명령이 떨어지길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들의 상관.
"태감?"
"……아무것도 아니다. 준비를 마쳤으면 바로 출발하도록 한다."
태감이 대기 중이던 말 하나에 올라탄다. 그 행태에 부관이 다가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음? 태감께선 따로 움직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늦기 전에 어서 가자꾸나."
동창의 일원들이 얼굴에 의문을 단 채 그 뒤를 따른다. 제일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태감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올라왔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