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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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87화
점창이 가장 마지막으로 황현에 들어섰을 때 무림맹의 무인들은 그들을 보기 위해 벌 떼같이 몰려들었다.
천하통일전의 전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꿔 버린 점창의 힘은 무림맹에 소속된 무인들뿐만 아니라 중원천하인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점창이 가장 늦게 황현으로 들어선 것은 적들의 후미 기습을 막아주기 위한 청현자의 결정 때문이었다.
남부와 중부 무림맹의 무인들이 합쳐지자 거의 만오천에 달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기에 청현자는 점창을 뒤로 돌려 후미의 위협을 차단했다.
황현은 북부 전선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했고 무당과 청성, 공동파가 맡은 곳이기도 했다.
그들의 삼천 병력과 밑에서 올라온 지원군이 합쳐지자 거의 이만에 달하는 대군이 황현에 집결했는데, 그들은 점창이 마지막으로 들어오자 구름처럼 운집해서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점창이 전막을 치고 자리를 잡자 무당의 장문인을 비롯해서 청성의 만궁자 등 무림맹 소속의 문파 수장들이 청현자의 전막에 몰려들었다.
중부 무림맹주는 남궁세가의 가주인 창천검이 맡았고 남부 무림맹주는 모산파의 무검제였으나 수장들은 당연한 듯 청현자의 전막에 몰려들어 향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논의했다.
강호무림의 역사는 언제나 힘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점창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으나 청현자는 그들의 손에 의해 암묵적으로 실질적인 무림맹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다.
마지막 결전에서 점창이 어떤 활약을 펼쳐 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마풍에서 진을 치고 있던 소림 장문인이자 공식적인 무림맹주인 뇌인 대사로부터 전서가 날아온 것은 수장들의 회의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그에게서 날아온 전서의 내용은 모든 병력을 서평(西平)으로 이동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청현자는 그의 서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막에 모인 수장들이 내놓은 최종 결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남(汝南)으로 물러선 적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서평을 점령해야 했는데, 서평을 접수하면 천왕성은 후퇴해서 섬서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림맹의 생각은 적들을 물러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평에서 마지막 일전을 겨루겠다는 것이었다.
적들이 결심을 굳히면 서평은 이제 천하통일전의 마지막 결전장으로 변하게 된다.
비세에 몰린 적들이 후퇴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운호는 점심을 먹고 황현을 감싸듯 생성된 구릉지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이는 풍모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갈대밭이 마치 한 폭의 구름처럼 보일 지경이다.
구릉을 훑자 온통 핏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부 무림맹은 이곳을 방어선으로 삼고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이 분명했다.
아름다운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이제 이곳을 내려가면 보고 싶은 한설아를 찾아갈 것이다.
청성은 점창이 머무른 곳에서 불과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달려가지 못한 것은 아직 수장 회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일전을 앞에 두고 수장 회의의 결과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인을 찾아간다면 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탓할지도 몰랐다.
마검은 그만한 지위를 지닌 사람이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입에서 현존 천하제일고수의 위치에 오르내린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랬으니 언제나 그의 행동과 위치는 초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흠칫.
벌판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릴 때 의외의 인물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회색의 전도복, 무당의 태악검 무상이다.
무상은 운호의 전면 삼 장에서 우아하게 몸을 뒤집으며 깃털처럼 내려앉았는데, 마치 제비가 공중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오랜만이오?”
“무당의 무상이 마검을 뵈오.”
무상의 입에서 정중한 음성이 흘러나왔고 더불어 허리까지 깊이 숙여졌다.
최상의 예를 보인 무상을 향해 운호가 얼떨결에 비슷한 인사를 했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과분한 인사였기에 운호는 허리를 펴고도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나를 찾아오셨소?”
“그렇습니다. 수장 회의에 장문인을 모시고 왔다가 마검을 뵙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요.”
“그러셨구려. 그래, 무슨 일이오?”
“동생의 말을 전해주기 위함이오.”
“동생이라면……?”
“대악검 무령이 내 친동생이오.”
“정말이오?”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여자였고 유일한 내 혈육이었소.”
“음…….”
“아셨던 모양이구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뒤늦게 알게 되었소. 그래, 그녀는 잘 있소이까?”
“그 아이는 한 달 전에 유명을 달리했소. 내가 온 것은 그 아이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오.”
“그녀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단 말이오!”
“전쟁에서 죽은 게 아니었소. 그 아이는…….”
무상은 자신과 그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어 운호에게 펼쳐 냈다.
어릴 적 현 장문인의 스승인 송인자에 의해 거둬지면서 그들 남매는 무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 남매의 오성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서 송인자는 항렬을 무시한 채 그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고 무공을 가르쳤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금방 후기지수 중에서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다.
문제는 무령이 열세 살 때부터 나타났다.
무령은 매월 보름만 되면 쓰러져서 삼 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는데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한기에 시달렸다.
송인자의 초청으로 무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상수신의가 맥을 짚은 후 그녀의 병이 천음절맥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세에 지극히 희귀한 병.
길어야 서른을 넘기지 못하는 불치의 병을 그녀는 앓고 있었던 것이다.
무상이 상수신의의 손을 잡고 울었고 송인자가 무당의 보물인 태청단을 내놓으며 부탁했으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당산을 내려갔다.
그가 남긴 말은 절대 남자의 양기를 접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남자와 관계를 갖거나 양기를 접하게 되면 수명이 급하게 단축된다면서 무상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잘 지켜보라는 말을 남겼다.
동굴에서 위기에 처한 운호를 무상이 죽이려 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의 부탁으로 인해 그냥 돌아갔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었던지 무령은 세 달 전부터 시름시름 앓으며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더니 기어코 한 달 전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녀 나이 스물일곱에 불과했는데 상수신의의 말보다 삼 년이나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무상이 운호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마검께서는 동생을 어찌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아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 그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오. 그 아이는 마지막 눈을 감기 전에 이 말을 하더이다.”
“무슨 말이었소?”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예쁘게 단장하고 그대와 함께 동정호를 거닐기를 소망했소. 낙조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대와 함께 있는 상상을 하면 언제나 행복했기에 아플 때마다 그 생각으로 고통을 참아냈다고 하더이다. 다음 생에 나타나면 그대가 꼭 알아봐 주기를 간절히 원했소… 끄윽!”
무상은 결국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억눌린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의 짝사랑.
유일한 혈육이었던 동생이 죽어가면서 보고 싶어 했던 사내에게 그 유언을 남긴다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고 잔인한 것이었다.
운호는 한숨을 내리쉰 후 무상이 떠나며 바라보았던 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제는 흐릿해진 그녀의 모습.
자신을 마음속에 품은 채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는 그녀의 모습이 구름과 겹쳐지면서 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수명을 단축하면서까지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그래… 그랬다.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
요문은 여남(汝南)에서 진을 치고 남부 전선과 중부 전선에서 이동해 온 제장들을 맞아들였다.
그의 전막에는 육십여 명의 수뇌부가 모였는데 성내에서 머물던 천왕오패와 호법들까지 전부 전선으로 나왔기 때문에 주 전력이 모두 모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요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대계가 점창에 의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수장들을 향해 터뜨린 음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묵직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전쟁의 양상이 조금 변했기 때문이다. 남부 전선이 점창에 의해 틀어졌을 뿐 상황은 바뀐 게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쥐 새끼처럼 숨어서 방어에만 치중하던 자들이 서평(西平)으로 나온다니 이제 정말 끝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천의 말씀이 맞습니다. 비록 놈들의 숫자가 우리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하나 대부분의 병력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자들이 서평으로 나온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 될 겁니다.”
요문의 일갈에 단하에 있던 단황야가 강한 어조로 맞장구를 쳐왔다.
그러자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자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여기에 모인 자들은 천왕성의 핵심 중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랬기에 요문과 단황야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천왕성의 병력은 무림맹의 절반인 만이천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낭인들과 중소 문파의 떨거지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정예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끝없이 펼쳐진 서평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력이다.
물론 점창이란 변수가 있으나 전쟁이 어느 특정 세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을 거란 판단은 그들의 마음에 자신감을 들어차게 만들었다.
몇 가지 요문의 모두 발언이 끝나자 대신 나선 것은 총사 설운호였다.
그는 앞으로 나온 후 곧장 연단에 설치된 지도를 끌어냈는데, 서평의 상세 지형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있었고 문파의 배치도와 병력 상황까지 빽빽하게 적혀져 있었다.
설운호는 무림맹의 이만오천 병력에 맞서 세 개의 천왕무영진을 배치했고 두 개의 특수 타격대를 운영하는 전략을 수장들에게 선보였다.
적들의 전진을 확실하게 차단하는 진법과 숨통을 끊어놓는 병력을 따로 운영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겠다는 전략이었다.
천뇌 설운호.
하늘마저 속이고 산천초목을 떨게 만들 정도로 무서운 두뇌를 가진 자.
그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전략은 각 부대장들에게 하나씩 숙지되기 시작했는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전막이 급히 열리며 하나의 무인이 들어온 것은 거의 한 시진에 걸친 설명을 끝낸 설운호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연단에서 내려올 때였다.
“소천께 아뢰오.”
“무슨 일이냐.”
요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들어선 자는 천왕성의 핵심 중 유일하게 전략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정보각주 비령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령은 천혼을 가동해서 적들의 움직임을 비롯한 정보 수집에 전력을 다하느라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가 전막의 문이 찢어질 것처럼 밀고 들어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천, 성주께서 운명하셨다는 전갈입니다.”
“뭐라!”
비령이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바닥에 양손을 잡고 쓰러졌지만 요문은 자리를 박차고는 벌벌 떨며 움직이지 못했다.
단하에서는 요문의 동생이자 주요 지휘관인 아들들이 소리를 질렀고 단황야를 비롯해서 화검제와 주요 수장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그들은 성주 요광이 오랫동안 두문분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면서도 요문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하며 시간을 넘겨왔었다.
그러나 비령이 들어와 성주의 죽음을 알리자 그들 모두는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들처럼 충격을 받았다.
천왕성주 요광.
그들이 아는 천하제일고수.
천왕검법을 대성해서 무적의 경지에 올라선 초인.
그가 있었기에 마검과 점창이 날뛰었어도 그들은 안심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성주가 죽었다고 하니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요문은 한동안 멍하니 서서 단하에 엎드린 비령을 바라보다가 충격에 사로잡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장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런 후 깊은 한숨과 함께 눈물을 주르륵 흘려내며 통곡을 시작했다.
“기어코… 기어코 가셨구나! 천왕의 꿈이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가시면 어쩌란 말인가. 선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으니 이 일을 어이할꼬. 참으로 원통하구나. 어허, 어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