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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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84화
점창이 움직인 것은 그다음 날 미시(未時) 무렵이었다.
전날 전투와 이동을 하면서 무리를 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하겠다는 선택이었다.
망성은 여전히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어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전면전은 아니었다.
천왕성은 끊임없이 공격을 시행하면서 무림맹의 전력이 누수 현상을 일으켜 약화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전면적 공격보다는 요충지 함락전을 펴고 있었다.
주요 고지에서는 뺏기고 뺏는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천왕성의 의도는 조금씩 효력을 발휘해서 하루에도 십여 명씩 낭인들과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전력에서 이탈했다.
무검제가 점창에게 신화를 탈환해 달라고 주문한 것은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전황이 불리해지는 건 북부 무림뿐만 아니라 남부 무림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오시가 되자 무림맹의 수뇌부와 예비 병력이 전부 전장에 투입되면서 반격전이 펼쳐졌다.
근래에 없었던 맹공이었다.
무검제가 이끄는 모산파가 중앙을 맡았고 쾌활림과 패천방이 우측, 파한문과 은하문, 파령문이 좌측을 맡은 맹렬한 반격전이 오시부터 시작되어 점창이 망성을 떠나고 한참 후인 신시(申時)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뺏겼던 주요 거점을 무려 서른 개나 되찾을 정도로 엄청난 반격전이었다.
적들은 무림맹의 무서운 반격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연신 물러섰다.
의외의 반격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미리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 놓은 게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림맹의 반격전은 점창 병력이 쥐도 새도 모르게 망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천왕성의 눈을 막아주었다.
“점… 창!”
분노하며 두들긴 요홍의 일장에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탁자가 박살이 나며 날아갔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는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무풍사와 팔황문이 점창에게 당했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보고 받은 것이 불과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너무 놀라고 기가 막혀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자며 이를 갈았는데 점창은 단 하루 만에 천왕성의 포위망을 뚫고 주요 거점들의 병력을 처단하며 자신이 있는 신화를 향해 전진해 오고 있었다.
마검을 비롯한 점창삼신룡이 안록산을 가로막았을 때 삼공이 필요했던 것은 워낙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버텼기 때문에 전력의 낭비를 피하기 위함이었지, 진정으로 그들이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간의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머릿속에 항상 들어 있었다. 집단전의 전투는 몇몇 개개인의 의해서 승패가 결정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뒤집어 버리고 점창삼신룡은 풍검문을 단 셋으로 박살 내는 전과를 이뤄냈다.
진정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천왕삼공을 꺾은 마검의 무력이 두려울 정도로 강하다는 건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호북으로 도주의 길에 올랐었다.
그런 자가 어찌 풍검문을 초토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풍검문에는 풍도제가 버젓이 살아서 버티고 있었다.
분명 마검의 무력은 그사이에 또 다른 진화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랬기에 무풍사와 팔황문이 점창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골이 송연해졌다.
단 셋만으로 풍검문을 세상에서 지운 마당에 점창이 모두 나선 공격이었으니 무풍사와 팔황문이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두려움보다는 분노가 먼저 치솟았다.
점창만 없었다면 남부 전선은 그의 생각대로 조만간 끝장이 날 판이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돌이 날아와 바둑판을 완전히 박살 내고 말았다.
으드득!
요홍은 이를 간 후 좌하에 있는 서효원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외곽에 나가 있는 혼천당과 무천당의 병력을 전부 집결시켜. 천왕무영진으로 놈들을 잡겠다.”
“지금 신화에는 팔백에 달하는 중소 문파 무인들과 낭인이 집결해 있습니다. 그자들은 어찌하오리까?”
“불쏘시개는 불을 지피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자들을 전위에 내세워 놈들의 몸에 피를 뒤집어씌운다.”
“그럼 그리 준비하겠나이다.”
“살아남은 삼공은 어디 있나?”
“문덕에 계십니다.”
“아직도 묘를 지키고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서효원의 대답에 요홍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혀를 찼다.
전곡전투에서 일공과 이공이 목숨을 잃었으나 삼공은 살아남아 이곳 신화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평생을 같이해 온 친구들이 죽어버리자 그는 그들의 묘를 지키며 거의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요홍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정문을 통해 혼천당주와 무천당주가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올 때였다.
“그를 문덕에서 끄집어내라.”
“나오겠습니까?”
“나올 것이다. 친구들의 복수를 해야 할 테니 당연히 나온다. 그리고 좌판으로 전서를 띄워 천왕칠절을 이쪽으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놈들이 오기 전까지는 도착이 가능할 것입니다.”
“크크크. 점창… 어디 와보거라. 신화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터이니.”
점창 본진이 신화 외곽에 도착한 것은 망성에서 빠져나온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 이틀 동안 점창 무인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얼굴이 거칠게 변해 있었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천왕성의 병력들이 기습을 해왔기 때문에 온전한 전진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신화는 만면산과 조령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두 산의 끝자락에 마련된 계곡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지형을 가졌다. 계곡이라고는 하지만 분지에 가까울 정도로 넓었는데, 묘하게도 대규모 병력으로 막아서면 통과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사람들은 이 분지를 황곡이라 불렀다.
청현자는 선두에 서서 적의 진형을 관찰한 후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적들의 병력은 정보로 입수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무려 이천.
황곡을 가로막은 병력의 숲을 확인한 청현자는 옆에 다가와 선 사형들을 향해 의견을 묻는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대뜸 청무자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왔으니 다른 길은 없소이다. 오늘이 장문인께서 무검제에게 약속했던 마지막 날이오. 무슨 수를 쓰든 놈들을 처단해야 하오.”
“저자들의 진형이 이상해서 조금 주저되는군요. 사형들께서는 혹시 아시는 바가 있는지요?”
청현자가 천왕성이 펼쳐 놓은 진을 확인하고 무거운 얼굴을 만들었다.
묵묵하게 퍼져 나오는 죽음의 기운.
그 기운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차갑고 어두우며 무거운 살기가 분명했다.
청문자가 자신의 검을 땅에 짚으며 입을 연 것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적들이 펼쳐 놓은 진영으로 향했을 때였다.
“앞에 선 자들은 허수아비들로 보이는구려. 문제는 뒤쪽에 배치된 자들인데 칠성을 근간으로 하는 전투 진영을 마련한 것으로 보이오. 문제는 구궁이 가미되어 있는지를 지금으로써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오. 하지만 진법의 기본은 오행과 칠성, 팔괘의 흐름이 조화되면서 무서운 위력을 펼치게 되는 것이니…….”
청문자가 깊은 눈으로 적들의 진영을 짚으며 진법의 원리를 설명해 나갔다.
그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진법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공부해 왔기 때문에 무림에 몇 안 되는 진법의 대가 중 한 사람이었다.
청문자는 장문인인 청현자와 장로들을 향해 알아듣기 쉽도록 적들의 진형에 대해서 설명을 한 후 한숨을 들이쉬며 마지막 이야기를 꺼냈다.
“진법이 무서울수록 생문은 하나가 되오. 지금은 그 생문이 어딘지 알 수 없으나 직접 부딪치면 알아낼 수 있을 터이니 장문인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마음이 황망해선지 사형께서 진법의 대가라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사형께서 해결 방안을 마련해 주신다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자,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장로들을 일별한 후 청현자가 풍운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공격을 시작하라는 지시였다.
언제나 공격의 선봉에는 풍운대가 선다.
막강한 무력을 장착한 풍운대가 선봉에 서게 되면 본진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풍운대가 치고 나가자 삼 대로 나뉘어진 점창 본진이 동시에 움직여 천왕성의 병력을 향해 돌진했다.
각 대의 전면에는 장로들과 운풍을 비롯한 운자배 무인들이 검을 들었는데, 그 기세가 거대한 산악처럼 묵직했다.
이천 대 삼백의 결전.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흑의 전도복의 점창 본진이 마치 붉은 태양 속으로 날아가는 검은 독수리처럼 보였다.
운호는 선봉에 선 풍운대 중에서도 운상, 운여와 함께 중앙에 섰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얼굴이 굳어진 운상이 보였다.
놈은 망성을 떠나오면서 결국은 자신처럼 소하령을 선택하지 못했다.
남으라고 말했다.
누가 너에 대해서 질책을 한다면 그 질책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내가 질 테니 너는 그저 남아서 그녀를 지키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운상은 슬픈 미소를 얼굴에 매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를 보호해 줄 거다. 그러니 운호야, 그냥 가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러면서도 길을 나선 것은 사문에 대한 충성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사형제에 대한 의리 때문일 것이다.
전면에 선 자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자들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익을 위해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적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나선 자들이다.
마음속의 동정이 그들을 살리고 싶어 했지만 결국 운호는 검을 내리긋고 말았다.
전쟁.
인간의 본성이 깡그리 말살되고 마는 최악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 그곳에 선 자들의 이성은 언제나 분노와 살의로 바뀌고 만다.
인간 방패를 형성했던 중소 문파의 무인들과 낭인들은 점창의 힘에 의해 산산이 찢겨졌으나 끝내 도주조차 하지 못하고 전멸의 길을 걸어갔다.
뒤쪽에서 진영을 구축하고 있던 천왕성의 무리들이 그들의 도주로를 차단한 채 검을 날려왔기 때문이었다.
앞뒤로 검을 받은 그들의 선택은 헛된 죽음뿐이었다.
불과 한 시진.
팔백에 달하는 전위 병력이 몰살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요홍의 의도대로 그 한 시진 만에 점창 무인들의 몸은 시뻘건 선혈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운호는 전위 병력이 전멸하자 곧장 천왕성의 병력이 진형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날아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적들을 향해 일검을 날렸다.
헛되이 수많은 목숨을 죽인 원망과 분노가 담긴 일격이었다.
콰앙!
물샐틈없이 견고했던 천왕무영진의 일각이 운호의 일격에 삼 장이나 찢어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막강한 위력임에도 조금도 진형을 허물지 못했다.
천왕무영진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꿈틀거리며 외부에서 들어온 거대한 충격을 흡수해서 소멸시켰는데, 처음부터 아무런 일조차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일격을 날렸던 운호가 검을 내린 채 천왕성 병력이 만들어놓은 천왕무영진을 노려보았다.
무려 천에 달하는 병력이 만들어놓은 병진은 청문자가 말한 것처럼 칠성의 방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오행과 팔괘의 조화가 숨어 있어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병진이 열리고 붉은 전포에 황금색 투구를 쓴 요홍이 나타난 것은 운호가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네가 마검이냐?”
“그렇다. 너는?”
“요홍. 남부 전선을 맡고 있는 총사령이 바로 나다.”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무슨 뜻이냐?”
“네 목을 따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가소로운 놈. 네 눈에는 이 병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어디 해보거라.”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나선 이유나 말해. 갑자기 나타나서 멋있는 척하니까 헷갈리잖아.”
“크크.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마검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나온 것뿐이다. 이제 봤으니 되었다.”
“그냥 갈 생각이냐?”
“가소로운 놈. 네 눈앞에 있는 천왕무영진을 깨고 들어오면 그때 네 숨통을 끊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