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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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33화
232화. 잠시 보았으면 하는데……
화르륵.
사방에 홰가 올라 진가를 대낮처럼 만들어 놓았다.
무인들은 홰를 들고 매서운 눈을 빛내며 진가의 외곽을 경계했다.
노복이 전한 소청의 말에 따라 진가와 간양의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발효되었다.
진가신은 그사이 서둘러 식솔들을 피난 행렬에 오르게 했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계획이었으나 급한 걸음이니 준비가 제대로 될 리는 없었지만, 그는 소청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진가에서 시작된 행렬에 대한 소식은 전서구에 실려 간양을 지나 사천의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전쟁을 준비하던 사천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서천맹은 무인들에게 긴급령을 내림과 동시에 급히 진가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전령을 급파했다.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듯이 모든 것이 분주해졌다.
‘소청…….’
소청의 말을 전해 들은 혁련휘는 간양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철혈군을 불러들였고, 별동대 무인들을 각기 구역을 나누어 배치했다.
비마대원들은 몸을 숨기고 간양의 외곽지를 살피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적의 습격을 미리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형님은 괜찮으실까요?”
혁련휘와 함께 진가의 가주전 앞에서 대기 중이던 소강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 거야.”
“…….”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네 형은 지금의 중원에서 사부님 다음으로 강하다.”
“하지만…….”
“걱정 마. 앞뒤 분간 못 하고 위험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정도로 우직한 놈이 아니다. 위험하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빠져나올 거야.”
“…….”
“기억나지 않느냐? 산이 무너져 갇혔을 때, 모두가 죽었다 했다. 하지만 그때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나온 녀석이 아니냐.”
소강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형이다.
충분히…….
소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혁련휘가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소강을 안정시켜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도 있었다.
소강이 있기에 아닌 척했지만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소청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인물.
그리고 내려진 비상경계령.
필시 마천일 것이다.
구자겸, 백효.
마천의 양대 산맥과도 같은 존재들을 무너뜨린 소청을 찾아와 만나고자 했다면 부름의 주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마종 종리세.
분명히 그일 것이다.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면 토번에 잠입해 있는 흑비로부터 연락이 아니 왔을 리 없다.
서천맹이 움직였다는 소식도 없으니 그들은 분명 은밀하게 사천에 잠입한 것이다.
‘소청, 어째서 이리 늦는 것이냐?’
혁련휘는 무의식중에 흑룡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소청이 진가 밖으로 나간 것은 자신과 비무를 끝내고 난 오시 초(11시).
유시(17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 지 한참이 되었다.
무려 세 시진이 흘렀다.
대화만 나누었다면 벌써 돌아오고도 남았어야만 할 시간이었다.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혁련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련주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와중에 철혈군의 수장 백강이 혁련휘를 향해 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
백강의 말에 혁련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련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아!”
혈랑대와 함께 무한을 떠났다는 말은 진즉에 들은 뒤였다.
순간 혁련휘는 불안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의지할 존재.
그가 온다면 소청을 찾으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계시냐?”
“간양의 입구에 도착하셨다는 전갈입니다.”
그런데 의아하다.
입구에 도착했다는 전갈이라니?
혁련휘는 더 묻지 않고 곧바로 백강과 함께 무황이 오고 있다는 간양의 관도를 향해 뛰어나갔다.
두 줄로 늘어선 말의 행렬 사이로 소박하기 짝이 없는 마차가 간양의 관도를 들어서고 있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진가신과 혁련휘, 백강만이 무황을 맞이했다.
“어찌 된 일이더냐?”
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황이 혁련휘에게 물었다.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도심에 들었으니 객점에 불이 밝혀지고 오가는 행인이나 취객은 있어야 함인데 모두가 문을 꽁꽁 닫고 있으니 의아함이 들 만도 했다.
“적의 위협이 있는 듯하여 경계령이 내려졌습니다.”
“적?”
“예.”
혁련휘가 대답하고 물러나자 진가신이 예를 다해 무황을 맞이했다.
“진가의 가주 진가신이 무황을 뵙습니다.”
“오! 소청의 부친이시로군.”
무황이 반가운 얼굴로 진가신의 손을 잡았다.
둘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반가워만은 할 수가 없었다.
“가문에 우환이 있어…….”
“괜찮소. 마음 쓰지 마시오.”
무황은 소청의 부친이라는 이유 하나로 진가신에게 공대를 했다.
오존에게조차 하대할 수 있는 그의 존대는 진가신의 마음을 벅찬 감동으로 물들였다.
“그나저나 우환이라니? 혹, 오는 길에 본 피난 행렬과 관계가 있는 건가?”
“예. 일단 들어가시지요.”
무황이 진가신과 함께 마차에 오르자 혁련휘가 서둘러 말했다.
“사부님, 저는 잠시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밖에?”
“예. 소청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무황이 혁련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자세히 묻지 않았다.
이미 손을 떠나 있는 제자였으니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알았다. 연유는 후에 들으마.”
“예.”
무황과 진가신이 탄 마차가 진가를 향하자 혁련휘는 서둘러 소청을 찾을 수색대를 모집했다.
굳이 다른 이는 필요 없었다.
“백강, 철혈군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 * *
찍, 찌직!
간양 남서쪽을 감시하고 있던 은수의 품 안에서 적서가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응?”
적서가 움직이는 것은 만리향을 감지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적서가 움직인다는 것은…….
“패월? 패월이다!”
은수는 곧바로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 쏴 올렸다.
모두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피융! 퍼-엉!
청색 불꽃이 하늘을 수놓음과 동시에 은수는 적서의 뒤를 쫓았다.
* * *
은은한 약 향이 흐르는 방.
수십 개의 호롱이 준비되니 방 안은 낮의 그것보다 훨씬 더 밝게 느껴졌다.
꾹.
의원의 손을 따라 혈도가 잡히고 장침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의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 위해 시비들이 양쪽에서 바삐 움직였다.
의원은 침 한 대조차 허투루 놓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벌거벗겨진 채 누운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진소청이었다.
비마대의 은수에 의해 발견되었고 신호탄을 보고 달려간 혁련휘에 의해 돌아왔다.
의원의 말로는 제때 발견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했다.
돌아온 소청은 곧바로 진가의 약당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되었다.
무려 네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의원은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그의 몸에 박혀 있는 침으로 인해 흡사 고슴도치처럼 보였다.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으나 내상이 문제였다.
기혈이 들끓고 있었고 맥은 들쭉날쭉했다.
수백 개의 침을 놓고서야 겨우 호흡을 안정적으로 돌려 놓을 수 있었다.
“휴우…….”
마지막 침을 놓은 의원은 긴장이 풀어진 때문인지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제때 시비들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바닥을 굴렀으리라.
“문을 열게. 바람을 쐬어야겠네.”
의원이 시비에게 부축되어 밖으로 나가려 문을 열자 밤을 새우며 기다린 이들의 면면이 보였다.
“어, 어찌 되었습니까?”
문 앞에 있던 소강이 다급하게 외쳐 물었다.
“목소리를 낮추시게. 환자의 상태가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닐세.”
“죄송합니다.”
의원의 낮은 호통에 금세 수긍하는 소강이었으나 시선은 침상에 누운 소청을 향해 있었다.
그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새벽 공기는 중상을 입은 환자에게 극독과도 같은 법이었다.
의원은 소강을 밀어내며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모두의 시선이 소청에게서 의원의 얼굴로 옮겨 왔다.
“강 의원! 어찌 되었소? 우리 소청이는 어찌…….”
섭약란이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떠올라 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밤새 마음을 졸였으니 혼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다행히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아…….”
고비를 넘겼다는 의원의 말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고 섭약란은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았다.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
“강 의원,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진가신은 강 의원의 표정이 치료를 완전히 끝냈음에도 밝지 않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것이…….”
강 의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호흡과 기맥은 잡았으나 문제는 손상된 단전입니다.”
“…….”
“어떤 이유에선지 단전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강 의원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그 말이 청천벽력임을 깨달았다.
단전의 손상.
내공을 담는 그릇이 부서졌다.
“아…….”
모두가 장탄식을 터트리고 말았다.
단전이 부서졌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많은 내공을 가졌던 진소청이니 살아도 산 게 아니리라.
“바, 방법이 없겠는가?”
“있기는 합니다만 큰공자께서 가지고 계신 단전은 너무나 거대합니다. 어떤 영약이 있어 그 거대한 내공을 채우고 있던 그릇을 치유하겠습니까.”
“아…….”
탄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미 정천오존과 사도삼위를 넘어서 버린 소청이었다. 보통의 영약이나 영단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만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진가가 가진 모든 재산을 턴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한 힘을 가진 영약을 구하는 것은 천운이 닿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손상된 채로 굳어 버린다면 영약을 구한다 해도 단전을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제가!”
소강이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의미 없는 외침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가신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소강의 어깨를 잡았다.
“아버님…….”
“되었다. 단전이 깨어지면 어떻고 내력을 잃었으면 어떠하더냐. 살았으니…… 살았으니 되었다.”
“아버님…….”
소강이 진가신의 옷자락을 잡고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진소청.
잠시나마 위대했던 존재.
그의 몰락은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데.
저벅, 저벅, 저벅…….
약당을 겹겹이 둘러싼 무인들 사이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다가서자 모두가 공손하게 옆으로 물러났다.
“내가 잠시 보았으면 하는데…….”
“……!”
순간 진가신은 개안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당대 최강의 힘을 가진 자가 진가에 있었다.
어떤 영약이나 영단이 가진 힘보다도 강한 그가 막 진가에 도착해서 쉬고 있었다.
“무, 무황 어르신…….”
사람들의 틈을 뚫고 나타난 것은 무황과 혁련휘였다.
“내공을 회복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으나 단전을 치유하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네.”
“아!”
무황의 한마디가 모두에게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강에게 괜찮다 말했던 진가신이 두 눈에 글썽인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했다.
“일어나시게. 감사랄 게 무에 있는가? 이미 그 녀석을 휘아처럼 대하고 있음인데…….”
무황이 빙긋이 웃었고 혁련휘가 진가신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