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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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216화
파계 9권 - 16화
“크으!”
무형의 장력이 조각나고, 이 장로는 전신에 십여 개의 검상을 입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츠바사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분노의 감정이 서려 있는 눈으로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츠바사의 검이 이 장로의 어깨어림부터 길게 베어오고 있었다.
쉭-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했던 이 장로의 오른손이 앞으로 들려지고, 소매에서 쇠꼬챙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츠바사의 복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
하지만 쇠꼬챙이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쇠꼬챙이는 츠바사의 겨드랑이 사이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당신은 암기를 너무 티가 나게 숨기고 다니더군요.”
츠바사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이 장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들려진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스악- 털썩.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동강난 이 장로의 상체는 균형을 잃은 하체와 함께 땅으로 쓰러졌다.
철퍽철퍽.
츠바사는 황급히 이 장로에게 일격을 맞고 쓰러진 냉음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가 큰 내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오칠에게 고개를 돌렸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오칠은 츠바사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움직여 혼절한 냉음설을 보면서 물었다.
“지금의 혈천신교가 가진 전력이라면 욕심을 부려볼 만도 할 텐데 왜 포기하지?”
“내가 욕심내는 곳은 땅이 아니라 바다입니다.”
오칠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나야 좋지.”
“잘 선택하셨습니다.”
츠바사는 마치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거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오칠은 그 말에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츠바사는 그만큼 강한 검객이었으니까.
“모두 싸움을 멈춰라!”
오칠의 음성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넓고 강렬하게 뻗어나갔다. 그러자 배화교 무사들은 즉각적으로 싸움을 멈추고 물러났다.
“책사님이 멈추라고 하신다!”
오관지옥대 무사들, 정확히는 금령단을 먹고 독기에 차서 싸우고 있던 독룡방 해적들과 장강의 수적들은 잠시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했지만, 곧 뒤로 물러났다. 야마오가 그들의 수장이었지만, 모두가 내심으로는 츠바사를 수장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산지옥대 무사들은 달랐다. 냉음설이 혼절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백천맹이 있는 은시까지 가는 것이 그들의 목적인 것이다. 설사 냉음설이 그에 반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교주가 내린 명령이 더욱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물러나는 배화교 무사들을 뚫고 도주하려고 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오칠의 단호한 명령에 배화교 무사들은 금령단까지 복용하며 필사적으로 도주로를 뚫으려고 하는 태산지옥대를 공격, 반 시진 만에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름이 뭐냐?”
내상약을 복용시키고 냉음설을 등에 업은 츠바사에게 오칠이 물었다. 이름 같은 것을 알아서 뭐 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김만해라고 합니다.”
츠바사는 왜의 이름이 아닌 원래의 이름을 말했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 야마오가 죽었기 때문일까? 모를 일이었다. 오칠이 그냥 이유 없이 물었듯이 츠바사 역시 그냥 그렇게 대답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김만해라……. 왜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왜놈치고는 너무 강했거든.”
오칠의 말에 츠바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치지 않는 빗줄기 사이로 냉음설을 등에 업고, 이제는 천여 명으로 줄어든 수하(해적, 수적)들과 함께 배가 선착되어 있는 형문산 밑자락 강변으로 향했다. 분명 이제 다시는 츠바사의 모습을 중원의 땅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 * *
“두 사람은 괜찮나?”
오칠은 치료를 받고 있는 화웅섭과 초열홍에게 다가갔다. 그들 주변에는 초왕성 등이 모여서 두 사람의 상세를 살펴보고 있었다.
“큰 부상은 아닙니다.”
“이 정도로는 끄떡없습니다.”
그러나 오칠이 보기에 두 사람의 부상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최소 보름 정도는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부상자들과 함께 대기해라.”
“오칠님, 이 정도는 싸우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화웅섭이 옆구리와 허벅지의 고통이 심할 텐데도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오칠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억지로 앉게 했다. 거구의 화웅섭이었지만, 오칠의 손에 담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놀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곳을 경유해서 은시로부터 도주하는 혈천신교의 잔당을 차단해라.”
오칠에게도 두 사람의 부재는 적지 않은 손실이었다. 이들 수준의 고수들이 싸움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최상의 몸 상태라 해도 부족할 싸움에 부상을 입고 싸운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
화응섭과 초열홍은 거부할 수 없었다. 오칠의 명령이 눈에 빤히 보이는 의미 없는 것이라 해도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지금 출발한다.”
오칠은 화웅섭과 초열홍, 그리고 부상자까지 해서 삼백여 명의 무사들을 남겨두고, 나머지 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은시로 향했다.
쏴아아아.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냉한 기온에 휩싸인 저 멀리 뿌연 공간 너머로 은시를 둘러싸고 있을 금양산(金陽山)의 거체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87장. 배후에는 그가 있다
은시의 하늘 위를 가득 채웠던 먹구름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엄청난 빗줄기를 쏟아내고 주변 대지를 온통 질척하게 짓이겨놓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먹구름은 시간이 흐른 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기 마련인 것이다.
‘앞날이 참으로 어둡구나.’
어둑해져가는 저녁 무렵, 소림 최고 고수이자 무림의 최고 항렬인 광죽 노승은 은시의 중심 언덕에 높다랗게 세워진 백천맹의 거성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대사님,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만화곡 곡주 녹음월은 초췌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그녀의 뒤쪽으로는 혈천신교의 추적을 간신히 뿌리치고 살아난 백 명도 되지 않는 호남 정파인들이 있었다. 그것도 호북 선도(仙桃)에서 광죽 노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추적을 멈추지 않는 혈천신교의 추적자들에게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하기는, 성으로 들어가야지.”
“하지만 마을에 적들이 은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천맹의 거성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엔 불빛 하나 켜져 있지 않아서 사람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족히 천이 넘는 혈천신교의 암살자와 무사들이 마을 곳곳에 은신한 채로 백천맹으로 가려는 정파인들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 녹음월과 광죽 노승은 다른 방향에서 백천맹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몇몇 무리의 무림인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혈천신교 무사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결국 아무도 백천맹의 입구까지 당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가야지.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은가.”
그냥 있는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 근방에는 혈천신교의 수천이나 되는 무사들이 넓게 포위망을 구축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왜 곧바로 공격을 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들의 눈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녹음월 등이 안전하게 온 것도 광죽 노승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준비할 수 있도록 말해두겠습니다.”
녹음월도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뒤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마을의 상황은 어떻소?”
남편 신담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잘린 팔이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있어서 홀로 운신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검을 쥐던 오른팔이 잘렸기에 여기까지 오면서 이전의 절반도 되지 못하는 검술 실력으로 힘겹게 적들과 싸워야만 했다.
“정확하게는 파악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마을을 지나 백천맹으로 들어가야 해요.”
“대사께서도 그리하시자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목숨의 위협에도 인내하고 굳세게 버티었던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벽에 부딪혔기 때문에 매우 상심해 있었던 것이다.
“그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부상자들을 데리고 마을을 지나갈 수는 없어요!”
한쪽에 있던 녹선향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녀는 옆에 누워 있는 노백을 염려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녹 소저, 난 괜찮습니다.”
노백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혈천신교의 사 장로, 육 장로와의 싸움 중에 왼쪽 어깨와 가슴에 생긴 상처는 너무도 극심하여 아직까지도 낫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몸을 건사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없었기에 몸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다. 사부인 사 장로의 죽음에 분노한 제자들이 집요하게 뒤를 쫓아오는 통에 그들의 도주는 더욱 고되고 힘이 들었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어요. 노 대협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그동안 많이 호전됐습니다. 보십시오. 이제는 상처에서 피도 나지 않고 있습니다.”
옷을 찢어 붕대처럼 감싼 가슴과 어깨를 들어 보이는 노백을 보는 녹선향의 눈동자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 물기가 서렸다. 피가 나지 않는 것은 호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피부만 아물고 그 안에 고름이 찼기 때문이다. 차라리 붉은 피가 나오는 것이 더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요, 노 대협. 우리는 노 대협과 함께할 겁니다. 지금까지 노 대협이 우리를 지켜주었으니, 이제 우리가 노 대협을 지켜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녹음월은 노백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노백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구한 목숨이 몇이며, 그로 인해 이겨냈던 위험이 얼마이던가. 그런 노백을 녹음월은 더 이상 싫어할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노 대협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업겠습니다! 그럼 이동하는 데는 문제없을 겁니다!”
“자네는 허리를 다치지 않았는가, 내가 업지. 난 멀쩡하니 내가 하겠네.”
“어허, 그 등에 난 상처는 어찌하고! 나야말로 팔뚝에 난 상처뿐이니 내가 업겠네!”
사람들은 노백의 주변으로 모여들며 자신이 멀쩡하니 노백을 업겠다고 앞장서 주장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상처 하나씩은 갖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힘겹게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모두 그만 하세요! 노 대협은 제가 업겠어요. 절 보세요. 저야말로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어요. 모두 노 대협이 절 지켜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제가 업겠어요.”
녹선향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고된 도주 중에도,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노백은 늘 녹선향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위험이 있으면 모든 고통과 피로를 꾹꾹 참아내며 싸웠다.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녹선향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질 못했다. 그녀의 주장은 정당했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방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선향이 네가 업어라. 노 대협도 더 이상 거부하지 마세요.”
“하지만…….”
노백은 난감한 듯이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가면 속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얼굴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해 있었다.
“모두 도와주세요.”
녹선향은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노백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람들은 얼른 노백을 부축하여 녹선향의 등에 업히게 했다.
“…….”
오칠을 제외하고는 생전 남의 도움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없던 노백이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결코 남에게 도움 받을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다. 한데,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노백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감격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녹선향의 등에 머리를 묻고 말았다.
“모두 준비되었겠지?”
중한 부상자들은 무리의 중심에, 그리고 경미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외곽으로 섰다. 그리고 뒤쪽은 녹음월과 실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고수들이 맡고, 광죽 노승이 길을 뚫기 위해 선두에 섰다.
“경공을 펼치는 것에 온 힘을 다해야 함을 잊지 마라. 그리고 동료가 쓰러져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 길이 목숨을 담보로 한 생로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
스님으로서는 참으로 하기 힘든 광죽 노승의 말에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저 멀리, 사백여 장 거리에 있는 백천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죽거나 살거나 백천맹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간다!”
광죽 노승이 앞으로 달리는 것과 함께 무리 전체가 최선을 다해 경공을 펼치며 뒤를 따랐다. 물론 광죽 노승은 무리 전체의 이동 속도를 감안하여 경공을 펼치는 것이었다. 실상 그 혼자라면 안전하게 백천맹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혼자의 안전을 도모할 것이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놈들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여 장의 평야를 달려 마을 초입에 들어선 순간, 광죽 노승은 살기를 감지했다. 그리고 곧바로 좌우의 작은 집 지붕과 문에서 십여 명의 무사들이 뛰어나와 표창을 내던졌다.
챙채채채채채챙-
표창들은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고, 광죽 노승의 무리는 그곳으로부터 십여 장이나 멀어졌다. 하지만 공격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좌우 사방에서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가지각색의 무기를 들고 그들을 향해 포위를 좁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악!”
왼쪽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정파인이 갑자기 고꾸라졌다. 질척한 땅속에 은신하고 있던 적이 칼을 땅위로 내밀어 발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하지만 무리는 앞으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껏 생사를 함께 넘나들던 동료가 쓰러졌지만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계속 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발목이 잘려 쓰러진 무사도 그걸 원치 않았다. 동료의 무의미한 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발목이 잘린 그에게는 무림인으로서의 미래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