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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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209화
파계 9권 - 9화
쉭.
조화창이 화살처럼 쏘아지며 적의 등을 파고들었다. 아니, 파고들려는 순간 적은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가 긁히고, 낭패한 표정으로 짐작해볼 때 거의 본능적으로 피한 것이 분명했다.
“너!”
인상을 찡그린 적은 노백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사실 노백도 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는 육 장로 묘방등이었다. 류양에서 한 번 격돌한 적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노백에게 큰 상처를 입어 한동안 고생해야 했던 그였다.
“진작 널 찾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네놈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놓고야 말겠어!”
마치 지난번에는 시간이 없어 노백을 죽이지 못했다는 듯 육 장로는 핏빛으로 물든 손가락을 날카롭게 휘둘러왔다. 하지만 노백은 그러한 분노와 살기에 찬 고함에도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조화창을 앞으로 찔러갈 뿐이었다.
칭- 칭- 칭-
혈홍쇄혼조와 낙화천공창법(落花穿孔槍法)의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불꽃이 번쩍거리고, 두 사람 주변에 있던 이들은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이놈! 이놈! 이놈!”
육 장로는 고함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아리따운 여덟 명의 여인이 짊어진 교자(轎子)까지 새로이 교궁이 지어지는 석문(石門)에 놔두고 나선 추적이었다. 자신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냉음설을 품에 안을 기회까지 놓치게 만든 노백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책임지고 이들을 추살하라는 교주의 명이었지만 말이다.
칭- 칭- 칭-
하지만 그의 분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백은 좀처럼 빈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빈틈이 생기며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도리어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육 장로의 표정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라 더욱 불안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한 명이 가세하며 그의 불안감을 잠재워주었다.
“내가 맡겠다.”
육 장로와 함께 호남 정파인 추살의 명을 받은 사 장로가 혈겸(血鎌)을 번뜩이며 노백의 우측으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노백의 옆구리를 노리고 혈겸을 크게 휘저었다.
휘웅- 텅-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노백은 조화창을 크고 둥글게 휘둘러 육 장로를 물러나게 하고, 사 장로의 혈겸을 막아냈다. 그리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창끝을 앞으로 겨눈 자세를 취했다.
‘강하군.’
사 장로는 노백의 수준이 육 장로에게 들은 것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창대에 막힌 순간 생겨난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잘게 진동하고 있는 그의 혈겸, 빈틈없는 자세와 자신과 같은 고수를 둘이나 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는 눈동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세. 이전에 손속을 나누어본 적이 있던 환도신군 이상의 고수가 분명했다.
‘나 혼자는 벅찬 상대다.’
홀로 노백을 상대하려고 했던 사 장로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족과 다름없는 제자들이 이곳에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정파인들이 이동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예상 방향으로 보냈기 때문에 이곳에 당도하려면 한 시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슥.
사 장로는 육 장로와 눈빛을 교환하며 한 걸음씩 왼쪽으로 둥글게 움직였다. 육 장로와 노백을 사이로 좌우 간격을 넓혀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쉭.
하지만 노백은 그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나의 하얀 선이 생겼다 싶은 순간, 창끝이 사 장로의 미간으로 바짝 다가갔다.
츠앙.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혈겸을 들어올려 창끝을 위로 쳐낸 사 장로는 그대로 몸을 왼쪽으로 회전시키며 혈겸을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그와 때를 같이해서 육 장로가 손가락을 세우고 노백의 우측을 날카롭게 찔러갔다.
“합!”
노백은 짧고 강하게 기합을 지르며 조화창을 좌우로 찔렀다. 공격해오는 두 사람의 간격이 넓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면서 최대한 각을 좁히는 방어 수법이었다.
칭, 치치치칭, 칭칭칭-
노백의 정면 좌우로 하얀 가시밭길이 생겨난 것처럼 수십 개의 창영(槍影)이 만들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사 장로와 육 장로는 공격에서 갑자기 수세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노백의 창끝은 날카롭고 강력했다.
‘이런 개 같은!’
육 장로는 이를 박박 갈았다. 숨을 내쉴 틈도 없이 손을 휘저어야 하는 데다, 손가락이 점점 심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 장로야 혈겸으로 막으면 된다지만, 그는 맨손이 아니던가. 물론 천욕대염공(天慾大炎功)의 공력으로 보호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강력한 공격에는 그의 단단한 손가락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웅-
사 장로의 혈겸이 붉은 광채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수세만 취하다가는 노백의 창에 꿰뚫리고 말 것 같다는 불안감에 광염혈류마공(狂炎血流魔功)의 공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것이다.
퉁- 투투투투투퉁-
공력이 잔뜩 응축된 혈겸은 확실히 달랐다. 노백은 창끝에 부딪쳐오는 충격이 확실히 커진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의 피부가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붉어지기는 했지만, 그건 상대하기 벅차서가 아니라 천원무극단공(天元無極丹功)의 공력을 극성으로 운용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저건!’
육 장로는 노백의 피부가 붉어지면 어찌 되는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험이 느껴진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 그도 천욕대염공의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노백의 뒤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슉- 슉- 슉- 슉-
수십 개의 창영은 십여 개로 줄었지만, 속도와 힘은 그 몇 배로 늘어나 사 장로와 육 장로를 향해 쏘아졌다.
쩌정- 쩌저정-
혈겸과 창끝은 귀가 아릿할 정도의 충격음을 터트리며 마주치고, 사 장로의 붉은 손은 창끝에 꿰뚫리지 않기 위해 옆으로 흘리는 수법으로 방어했다.
“……!”
츠차차차차창-
하지만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마음으로 파고들어오는 사 장로의 공격에 노백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고 육 장로가 뒤로 바짝 다가섰다.
츄악-
“크!”
노백의 등줄기로 고랑 같은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노백은 고통을 참으며 창대를 뒤로 휘돌려서 연이은 공격을 하려던 육 장로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끝이다!”
뒤로 몸을 돌리면서 등을 보인 노백의 허리로 사 장로의 혈겸이 붉은 선을 만들며 휘둘러졌다. 노백은 황급히 발끝 용천혈(湧泉穴)로 공력을 내려 보내고, 탄섬보(彈閃步)를 펼치며 번개처럼 사 장로를 스쳐지나갔다.
스악-
혈겸이 빈 공간을 그어 올리자마자 사 장로는 다시 노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혈겸을 빗겨 올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사 장로는 그를 직시하는 노백을 마주 보았다. 목을 뚫고 들어온 창끝이 그의 시선을 그렇게 고정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짜증이 났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외부적인 힘에 의해 자신의 육체가 좌지우지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목이 꿰뚫려 죽은 사람은 분노를 느낄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노백은 사 장로의 숨이 끊기는 것과 동시에 창을 당겼다. 그의 우측으로 접근해오는 육 장로를 막기 위해서였다.
“……?”
그러나 노백은 처음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사 장로의 목을 뚫은 창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기 바로 직전 사 장로가 창을 움켜잡은 것이 그 자신의 목에서 뽑아내려고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창을 뽑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넌 죽었다!”
육 장로는 살기 어린 외침을 터트리며 노백의 바로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한 손은 벌써 노백의 왼쪽 어깨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노백은 왼쪽 어깨가 꿰뚫리는 끔찍한 고통 가운데서도 있는 힘을 다해 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육 장로의 또 다른 손이 어느새 노백의 머리를 움켜잡으려 하고 있었다.
스악-
“악!”
육 장로는 갑작스럽게 등줄기를 타고 전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로 인해 머리를 잡아가던 그의 날카로운 손은 방향이 틀어지며, 피하려고 몸을 젖히는 노백의 왼쪽 가슴을 노려야 했다.
으지직!
“크윽!”
왼쪽 가슴이 크게 뜯겨나간 노백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육 장로는 가슴에서 물컹물컹 선혈을 뿜어내는 노백이 쓰러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년이 감히!”
육 장로는 자신의 등줄기를 벤 것이 노백의 위험을 보고 황급히 달려온 녹선향의 짓임을 알고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을 휘둘렀다. 미처 물러나지 못하고 있던 녹선향을 일격에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사납고 강맹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공격을 성공시킬 수가 없었다. 왼쪽 가슴이 깊숙이 뜯겨나가 분명히 바닥으로 쓰러졌을 거라 믿었던 노백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고, 육 장로의 신형은 한쪽으로 쭉 밀려났기 때문이다.
“개놈의 자식! 완전히 끝장을 내……!”
푹.
밀려나는 몸을 우뚝 세우고, 붉은 손가락을 날카롭게 세우며 노백을 공격하려고 했던 육 장로는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
아랫배에는 하얀 창이 박혀 있었다. 쓰러지지 않고 무릎으로 버티고 있는 노백이 조화창으로 그의 배를 꿰뚫은 것이다.
“비… 빌어먹을…….”
육 장로는 조금만 있으면 노백을 죽일 수 있었다는 아쉬움과 이대로 죽어야만 한다는 두려움 속에서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 육 장로의 배에서 노백은 조화창을 뽑아냈다. 그러나 그것이 노백이 낼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노 대협!”
녹선향은 쓰러지는 노백을 붙잡았다.
“퇴… 퇴각해야 하오…….”
노백은 끊길 듯 가느다란 음성으로 녹선향에게 말하고는 정신을 잃었다. 등과 오른쪽 어깨, 그리고 왼쪽 가슴의 부상으로 출혈이 심했던 그가 이 정도까지 버틴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알겠어요!”
녹석향은 노백이 듣지 못함을 알면서도 힘차게 대답하고는 그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모친과 곡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서둘러 물러나야 해요!”
녹음월은 녹선향과 그의 등에 업힌 노백을 보고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좌우로 크게 소리쳤다.
“퇴각하라!”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부축하여 녹선향 등과 함께 길을 뚫기 시작했다. 적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그들을 이끌고 있던 사 장로, 육 장로가 죽으면서 견고했던 포위망은 엉성해져버렸다. 그래서 백여 명으로 줄어든 정파인들은 더 이상의 피해 없이 퇴로를 뚫고 안전하게 포위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 * *
‘소림사(少林寺).’
하남성(河南省) 등봉현 숭산(崇山)의 서쪽 기슭, 소실봉(少室峯) 중턱의 유서 깊은 불교 사찰을 바라보는 오칠의 눈동자엔 이상하게도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과거 그를 속박했다는 원한, 그에게 많은 것을 참고 인내하게 만들었던 것들, 그리고 결국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소림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감각하기만 했다.
‘아무리 감정이 결핍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걸 득도의 경지라고 해야 하나?’
오칠은 괜히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 어떠한 감정이든 끄집어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저 과거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무엇을 결심하고 살았었는지를 기억해냈다.
‘반드시 살아서 밖으로 나갈 것이다!’
오칠은 과거 광인처럼 살며 생을 지켜가고 있을 때 산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매일같이 그 각오를 다졌었다. 언젠간 이곳 소림사를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당당히는 아니더라도 승려들에게서, 소림사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다졌었다.
‘결국 벗어났잖아.’
그의 의지라기보다 다른 자에 의해서 벗어난 것이지만, 결국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소림 고위승들의 안내를 받아 소림사 산문 안으로 당당히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사숙님!”
기다란 봉을 집고서 삼엄한 기세로 굳게 닫힌 산문을 지키고 있던 십여 명의 무승들이 굉진 대사를 비롯한 팔십여 명의 무승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뒤쪽으로 자리한 오칠과 그 무리 때문에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곧 함께 온 손님이라는 굉진 대사의 설명에 경계하는 표정을 지웠다.
“방장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상석에 계십니다.”
상석(床石)은 평소 소림사의 승려들이 권법 수련을 하는 곳이었다.
“내가 본사를 떠날 때도 그곳에 계시더니만…….”
방장 사형은 산서로 보낸 이들의 안위를 염려함은 물론, 소림사의 모든 승려들이 똑같은 마음으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길 원했다. 그래서 방장인 그부터 방장실이 아니라 본전 앞 상석에서 고행을 하듯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 장문인, 이쪽이오이다.”
굉진 대사가 산문 초입에 서서 오칠을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오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으로 갔고, 바로 뒤에 초왕성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굳게 닫혀 있던 산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몇 달 만에 소림사가 개문을 한 것이었다.
저벅.
“…….”
오칠은 산문 안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소림사 외원의 전경을 쭉 둘러보았다. 처음 방문한 사람이 그러하듯 궁금증과 경외감 등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건 굉진 대사의 착각이었다. 누구나 소림사를 처음 방문하면 그러한 반응이기 때문에 오칠도 그러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오칠은 소림사의 구조를 이곳의 소림 무승들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중간에 증축을 했다면 모를까, 최소한 오 년여 전의 소림사의 구조는 모두 알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계율원(戒律院)이 있을 테고, 그 뒤쪽으로는 장경각(藏經閣)이…….’
소림사의 모든 구조가 오칠의 머릿속에서 일목요연하게 그려졌다. 왼쪽으로 가면 장생전(長生殿)이, 그곳에서 돌아 오른쪽으로 가면 소림삼십육방(少林三十六房)이, 그리고 그 너머에는 탑림(塔林)이 있을 것이다. 노승의 묘가 있고, 탈출할 그날을 위해 그가 광인처럼 살았던 바로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