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1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16화
은천검제
제216화
암연은 물론이고, 홍화루마저 집요하게 성치문을 관찰했다.
두 곳은 드러나는 일이 없었으나 스치는 바람결에 암연의 눈이 지나갔고, 우연처럼 들어온 손님은 또한 홍화루가 보낸 감시였다.
성치문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 식사를 마치면 성조전장의 대청에 앉아 서기가 올리는 서류를 보았고, 전표를 승인하거나 은자의 입출을 관리했다.
아무리 벽계의 인물이라도 해도 한 번 드러난 이상 암연과 홍화루의 눈을 속이기는 어렵다.
그래서일까.
성치문은 의심 갈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늘 같은 태도로 전장의 일에 집중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성치문은 저녁을 마쳤고, 별다른 일없이 자리에 누웠다.
달이 높다랗게 떠오른 시간이었다.
은은한 빛이 창을 통해 안을 밝힐 때 성치문의 침실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고, 두 명이 들어섰다.
달빛이 복면을 하지 않은 종무헌과 모려원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낼 때,
스으응.
종무헌은 단숨에 검을 꺼내 득달같이 휘둘렀다.
휘릭! 휘리릭!
왼편으로 누웠던 성치문의 귀 뒤와 목덜미, 어깨를 사정없이 찌른 종무헌은 가뿐하게 침상의 반대편으로 넘어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휘리릭!
또다시 번득인 검 끝이 성치문의 인중과 왼편 가슴을 찌른 다음이었다.
검을 집어넣은 종무헌은 소매에서 헝겊을 꺼내 성치문의 손과 발을 묶은 뒤에 다시 허리에 재차 걸었다.
마치 죽은 자를 수습하듯 포박한 종무헌은 헝겊으로 만든 사람의 모형을 드는 것처럼 가볍게 성치문을 들었고, 창을 향해 움직였다.
돈을 만지는 전장이라 늘 은자가 과하게 있었다.
당연하게 전장을 지키는 무인들이 있었으나 두 사람이 성치문을 제압해 창 앞에 설 때까지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창을 통해 몸을 날렸다.
창과 담의 거리가 제법 있었는데도 두 사람은 마치 줄에 매달린 것처럼 성치문을 들고도 그 어떤 소리도 없이 담을 훌쩍 넘어갔다.
은은한 달빛이 무심하게 비추는 초량의 기와지붕을 밟으며 달린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트막한 언덕에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대사형.”
초량의 동산이라 할 언덕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진무린은 종무헌이 들고 온 성치문을 내려다보았다.
백초가 미끄러지듯 달려 종무헌의 어깨로 올라갈 때도 성치문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알만 급하게 움직였다.
“반항은 없었습니다. 오는 동안 살폈는데 내공을 일으키지도 않았고요.”
모려원의 보고에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치문. 네놈이 기운을 감춘 모양이다만, 본문에 가면 이야기가 다를 거다.”
진무린의 말에도 성치문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당황한 눈빛이었다.
“우리는 네놈들이 스물이나 강호에 잠입했다는 것을 알았고, 찾아낼 방법도 준비했다. 한 놈씩 찾아서 제자들의 무덤 앞에서 목을 잘라 줄 테니 부디 끝까지 그렇게 금제를 지켜다오.”
말을 마친 진무린은 몸을 돌렸다.
“먼 길을 가야 하니 사매가 우선 들어.”
“예, 대사형.”
진무린읜 지시에 모려원이 솜으로 만든 인형을 들 듯 성치문의 허리에 감긴 끈을 집었고, 곧바로 경공을 펼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전령을 보내 구대문파에 협조를 구한 황종관은 어느 곳보다 은천문의 의견을 기다렸다.
진중탈구검을 익힌 구대문파가 일제히 나서면 벽계의 준동이 일어난다 해도 어찌어찌 견디기야 하겠다. 그러나 구관에 들 후계자가 희생되고, 구대문파에서도 적잖이 피를 흘릴 텐데 뒷감당을 어찌할까.
오로지 은천문만이 구관을 개방하는 모든 일에 안전을 담보할 곳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황종관은 분명하게 알았다.
또한, 화산이 영웅대회에 제자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황종관은 능히 짐작했다.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니 표충량을 바르게 키우고, 그를 통해 매화검수를 발전시키겠다는 각오이리라.
지금 강호에서 은천문과 가장 가까운 문파가 화산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쉽게 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은천문의 진무린이 무공을 살펴주는 것이 구관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은혼의 결단이 황종관은 부러웠다.
“진 문주가 맹주를 맡아준다면…….”
커다란 도를 매만지며 황종관은 혼잣말을 뱉었다.
정도맹주의 지시를 거슬렀다가는 공동과 점창처럼 봉문을 당할 형국이니 감히 누가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구대문파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정도맹이라.
황종관은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
사흘 만에 다시 은천문으로 돌아온 진무린은 묶어놓은 성치문을 입구에 내려놓았다.
곧바로 안에서 지켜보던 제자들이 진법을 풀고 뛰쳐나와 진무린을 맞이했다.
“너는 먼저 움직여 사숙과 사부, 사고께 내가 성치문을 데려왔노라고 고해라.”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제자 한 명이 서둘러 달려갔고, 남은 제자들이 성치문을 들고 뒤를 따랐다.
진무린이 향한 곳은 문주의 전각이 아니라 희생된 제자들과 엄소동의 무덤 앞이었다.
“저 앞에 내려놔.”
“예.”
진무린의 시선이 가리킨 곳에 성치문을 내려둔 제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한낮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진무린이 말없이 무덤 앞에 서 있자 모려원과 종무헌이 그 뒤를 묵묵하게 받쳤고, 다시 제자들이 줄줄이 좌우를 지켰다.
‘엄 대협. 최선을 다한다고 뛰어다니고는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성치문을 보시며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으시길 바랍니다.’
진무린은 먼저 꿋꿋했던 엄소동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애잔하게 웃었다.
‘보았느냐. 너희의 희생이 있어 본문은 이리 무탈하다. 문주가 되어 고작 벽계의 인물 한 명을 잡아왔다만, 남은 열아홉을 모두 찾아낼 때까지 방심하지 않으마.’
바람이 장포를 흔들고, 햇살이 열기를 부었는데도 진무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내 슬픔 따위 크게 내비치지 않았던 진무린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늘 묵직하고 무던하게 버티던 진무린의 속에 담긴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지켜보던 모려원과 종무헌, 제자들은 분명하게 알았다.
일각쯤 그렇게 시간을 보냈을 때였다.
임운령과 전도위, 양소소, 남굉모, 나탑사가 함께 무덤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주를 보네.”
“다녀왔습니다. 이자가 성조전장의 장주로 모습을 바꾼 성치문입니다.”
진무린의 말과 동시에 임운령은 당장에라도 검을 꺼낼 거처럼 독한 눈으로 성치문을 내려다보았다.
“홍화루에 왔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는 전갈로 봐서 분명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 얼굴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백면호리를 이 자리에 부를까 합니다.”
“문주의 판단에 따르겠다.”
임운령의 의견을 들은 진무린이 종무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굳이 말이 필요할까.
종무헌이 빠르게 움직였다.
“번거롭게 할 필요 있겠냐. 이놈의 목을 단숨에 잘라버리지!”
나탑사와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던 남굉모가 양소소의 눈짓에 이를 갈면서도 물러섰고, 주먹을 꾹 움켜쥐었던 임운령 역시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억눌렀다.
종무헌은 백면호리와 곧바로 돌아왔다.
분위기를 알아차린 백면호리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고분고분한 태도로 진무린의 앞에 나섰다.
“이자가 얼굴을 바꾼 모양인데 백면호리가 살펴보고 의견을 주시오.”
“예, 문주.”
지켜보는 눈을 의식한 진무린이 정중하게 청하자 백면호리는 사명감 넘치는 태도로 앞으로 나서 성치문의 볼과 머리카락, 목 아래의 살을 당겼다.
“흥!”
그런 뒤에 백면호리의 첫 번째 반응은 코웃음이었다.
눈알을 굴리는 성치문을 향해 야릇한 웃음을 던진 백면호리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방계의 역용술입니다. 신장에서 처음 창시되었는데 지금은 실종된 역용술이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 가닥 수염을 움직이며 진중하게 의견을 내는 백면호리는 마치 관인이라도 된 양,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진무린에게 의견을 냈다.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소?”
“본인의 얼굴에 완벽하게 붙이는 터라 과거의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합니다. 다만, 이자가 역용술을 부렸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있습니다.”
진무린의 표정을 본 백면호리가 황제의 명을 받은 관인처럼 거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종 소협. 검으로 이자의 수염을 말끔하게 잘라주게. 한 치 이하로 잘라주면 되네.”
제자가 할 일이었으나 백면호리가 분위기에 취해 종무헌을 지적했다. 기가 막힌 상황인데 종무헌은 다른 말없이 나서 검을 휘둘렀다.
휘릭! 휘릭!
종무헌이 두 번에 걸쳐 검을 번득이자 성치문의 수염이 말끔하게 잘려나갔다.
“어리석은 자야. 수염은 감추지 못하니 살 아래 눌린 수염은 어찌 변명하려느냐.”
백면호리가 큰소리를 치고는 눈알만 움직이는 성치문의 볼을 잡아 늘였다.
그의 말대로 코 아래와 턱 주변의 살 아래에 수염이 어슴푸레하게 눌려 있는 것이 드러났다.
“내공을 이용해 체격까지 바꾸었다는 뜻이구나.”
임운령의 말에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몸의 체형을 바꾼 역용술을 풀어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하면 본 모습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성치문은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진무린은 가볍게 웃은 뒤에 상체를 굽혀 묶여 있는 성치문의 혈도 몇 곳을 두들겼다.
“후-.”
성치문은 곧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요? 전장의 돈을 요구하는 거라면 모두 드리겠소!”
성치문의 말에 진무린은 재미있다는 눈으로 상체를 세웠다.
“벽계의 인물이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거짓으로 살기를 바라다니. 너희는 진정 추악한 존재였구나.”
“나는 성조전장의 장주로…….”
“성치문. 너의 무공을 폐하고 가두겠다. 석 달 뒤에 남은 셋을 모두 데려오면 한 날, 한 시에 이곳에서 처형할 테니 그리 알아.”
“이보시오! 대체 무슨 연유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성치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매달릴 때였다.
“문주께 청이 있다. 저자의 무공을 폐하는 일을 내게 맡겨다오.”
임운령이 간곡한 청을 내놓았다.
“사숙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무린의 답이 떨어지자 임운령은 성치문의 앞으로 움직였다.
“나는 내공이 없소! 이런 나를…….”
“강호를 손에 넣겠다는 야욕에 희생된 본문의 제자들을 대신해 내리는 벌이다.”
내공을 일으킨 임운령은 오른손을 들어 성치문의 단전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끄으…….”
단박에 피를 토해낸 성치문이 비명을 지른 뒤에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보기에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깨가 꺾인 그의 팔이 소매의 밖으로 나올 정도로 길어졌고, 이어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한 끝에 전혀 다른 체형으로 바뀌었는데 뼈가 소리를 낼 때마다 성치문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자들은 저자를 토굴에 가두고 한시도 눈을 떼지 마라. 사매는 자결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비한 뒤에 다시 혈도를 눌러 둬.”
“예, 대사형.”
성치문의 일은 그렇게 끝났다.
짧지만 큰일이 있은 날 밤, 백면호리는 은천문을 나서 정도맹으로 향했다.
**
황종관은 진무린의 서찰을 받았다.
“백면호리. 자네가 한 번 더 수고해 주게.”
“은천문에 가라는 말씀입니까?”
“왜? 어려운가?”
“그런 것이 아니라……. 가야지요! 갑니다!”
백면호리에게 서찰을 써서 전한 황종관은 느긋한 얼굴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부관! 서문가주를 모셔다오.”
“예!”
진무린의 전갈은 간단했다.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면 협조하겠다는 내용이어서 황종관은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는 느낌이었다.
백면호리가 돌아간 뒤에 황종관은 구관에 관한 두 번째 방을 내걸었다.
서문세가에 구관 중 하나를 지정하기로 하였는데 당일에 문제가 생긴다면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가주의 목을 치겠다는 내용이었고, 구대문파 중 여섯 곳이 동의했다는 내용이었다.
**
은천문이 내려다보이는 동산이었다.
임운령과 양소소, 남굉모와 나탑사는 술과 가벼운 안주가 담긴 바구니를 앞에 두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내일 영웅대회에 출발하는 일행에 묻어 나도 밖으로 나가볼까 한다.”
“외조부. 그러지 말고 이곳에 계시면 어때요?”
“몸은 편하나 갑갑함을 견디기가 어렵다.”
요 며칠 남굉모의 태도를 보며 다들 짐작했던 일이라 양소소도 더는 나서서 만류하지 못했다.
“영웅대회 구경이라도 가시죠?”
양소소의 두 번째 권유에도 남굉모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구대문파의 제자라는 것들이 설칠 테고, 사파에 마교까지 뒤엉켜 시끄러울 곳을 뭐하러 가. 나는 이 사람과 유유자적하는 게 좋아.”
말을 마친 남굉모는 슬쩍 진무린이 거처하는 전각을 돌아보았다.
“문주는 뭐가 저리 심각해?”
“검법을 고민한다잖아요.”
은천수호검을 대신할 검법을 고민하느라 진무린은 벌써 보름이 넘게 두문불출이었다.
“이쯤 하자. 내일 먼 길을 나서려면 준비들 해야지.”
남굉모가 처음으로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나섰다.
영웅대회를 위해 모려원, 종무헌, 임운령이 제자들을 이끌고 정도맹으로 출발하는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