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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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11화
은천검제
제211화
이안공자는 분명하게 운진을 먼저 돌아보았다.
“세 명을 추적하는 술법을 부리면 문주께서 절명한다 들었습니다.”
그가 내놓은 말에 당황하던 운진은 곧바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웃었다.
“양묘가 떠든 모양이나 염려하지 마실 것이 없소.”
“문주. 솔직한 답을 주십시오.”
진무린을 향한 운진의 눈빛은 잔잔했다.
욕심이나 탐욕은 터럭만큼도 묻지 않은 그의 눈은 마치 신선을 마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강호에 검과 도가 사람을 해친다고 해서 무인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고 여기십니까? 이전에 저와 한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잠시 시선을 떨궜던 운진이 계면쩍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벽계의 비수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도력의 소진이 워낙 커 이리되었소.”
“그렇다면 도력을 채우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 명에 지장 없도록 도력을 쌓으려면 최소 석 달은 걸릴 게요. 그동안 벽계의 인물을 가만두시려 하시오?”
결국, 모려원과 종무헌을 살리기 위해 술법을 부린 탓이었다.
말을 들은 종무헌이 고개를 떨구자 운진이 얼른 팔을 뻗어 종무헌의 손을 다독였다.
“종 소협은 고개를 숙이지 마시오. 노도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리다.”
뭐라 해도 운진이 부적을 붙여놓았던 벽계의 인물을 찾는 데 삼 개월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자. 상등에서 추종향을 묻혀 놓았다니 한 명은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매가 돌아오는 대로 상등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진무린은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모려원과 종무헌을 구하기 위해 시간이 늦춰진 것이라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
모려원과 백면호리가 요정이 있는 동굴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오지 말랬잖아요!”
앙칼진 요정의 고함이 동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봤지?’
백면호리의 눈을 본 모려원은 다른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기가 담긴 음성이었다.
저런 기운이 머리를 완벽하게 파고들면 기인촌 사람을 모두 죽일 때까지 날뛸 것이 분명했다.
“여기 계세요.”
“모 소저…….”
걱정을 가득 담아 매달리는 백면호리를 다독인 모려원은 동굴을 향해 걸었다.
중단전을 제대로 닦지 못한 상태에서 급격한 성취를 바라거나 본의 아니게 상단전을 개방하게 되면 저런 증상이 나온다.
정동추의 공력을 받은 것 때문일까.
마교에 소수마공이라 전해질 정도로 익숙한 무공이라 정동추가 너무 과한 것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려원이 동굴에 세 걸음쯤 들어선 뒤였다.
산발한 요정이 홱 시선을 돌리더니 득달같이 손을 뻗었다.
쉬익! 쉭!
상체를 좌우로 비틀어 가볍게 피한 모려원을 향해 요정은 높게 몸을 띄웠다. 그리고는 배와 가슴을 노리고 양발을 번갈아 놀렸다.
턱! 터억!
왼손으로 요정의 발을 연달아 막아낸 모려원은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산발한 머리, 광기가 어리는 눈빛, 주저하지 않고 뿜어내는 독한 초식, 마지막으로 모려원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마비된 이성까지, 이미 발 하나는 살인귀가 되는 계단에 올려놓은 단계였다.
“힘들었구나.”
쉬익! 쉭! 쉬이익!
이미 등룡창천을 몸에 담은 모려원은 살기마저 담은 요정의 손길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했다.
요정이 재차 뛰어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모려원이 요정의 바로 앞에 있었다.
터억! 턱!
모려원은 먼저 요정의 왼쪽 어깨를 연달아 밀쳐냈다.
몸이 밀린 요정이 팔을 길게 펴고 달려들었는데 바로 코앞에 있는 모려원은 그 역시도 가볍게 상체를 젖히는 동작으로 피했다.
터억!
이번에 모려원이 밀쳐낸 한 수에는 묵룡심법의 내공이 담겼다.
견디지 못한 요정이 왼편으로 몸을 돌리는 찰나,
터억! 턱! 턱! 터억!
모려원은 번개같이 손을 움직여 요정의 목덜미를 때리며 공력을 넣었고, 이어 연달아 혈도를 찍었다.
요정은 한순간에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되었으면서도 아빠와 기인촌 촌민들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고함을 질렀다니 정아는 참 대단하다.”
동상처럼 서 있는 요정의 뒤에서 모려원은 자상한 음성으로 칭찬을 건넸다.
“전에 내 손을 잡아주었던 거 기억하지? 고통에 떠는 나를 안아주기도 했었잖아. 이제는 언니가 도와줄게. 목덜미 아래로 기운을 불어넣을 테니 천천히 운기해. 알았지?”
움직임이 없는 요정의 목덜미에 모려원은 오른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등룡창천의 기운을 옅게 풀어 서서히 요정의 기혈을 다독였다.
단전에 있어야 할 요정의 내공들이 이리저리 뭉쳤는데 중단전과 상단전에 기운이 뻗친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홀로 익힌 탓에 이대로 두면 언제고 대결이나 운기 중에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모려원은 등룡창천의 기운으로 요정의 중단전과 상단전 근처에 똬리 튼 기운을 몰아냈다.
자칫하면 중단전과 상단전을 모두 막아야 했으나, 이후 바른 수련을 통해 중단전과 상단전을 제대로 깨우칠 기회를 두었으니 모려원을 만난 것이 요정의 또 다른 기연이라 할 만했다.
일각쯤 흐른 뒤였다.
모려원이 손을 빠르게 놀려 목덜미를 몇 차례 두드리자 동상처럼 서 있던 요정이 힘이 빠진 것처럼 휘청였다.
“언니?”
그런 뒤에 요정은 전과 같이 선한 눈빛으로 모려원을 향해 돌아섰다.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품을 향해 달려드는 요정을 모려원은 깊게 안았고, 천천히 다독였다.
“귀혼곡을 지키고 싶었어요. 아빠와 여기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는데 무공이 늘지 않았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이토록 매달렸던 거구나.”
잠시 요정을 달래준 모려원은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빠가 밖에서 기다리셔. 걱정이 크시던데 이제 봐야 하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인 요정이 산발한 모습으로 동굴 밖을 향해 걸었다.
“정아야! 정아! 우리 정아가…….”
“아빠-아!”
동굴 밖을 지켜보며 모려원은 옅게 웃었다.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나중에 하면 된다.
놀라고 당황한 아이는 먼저 품어준 뒤에 잘못을 하나씩 알려주어도 된다.
“나 아빠하고 기인촌을 지키고 싶었어요!”
“알지! 아빠는 알지! 다 알지!”
아빠와 귀혼곡을 지키겠다며 저 어린 몸으로 사기에 물들 정도로 무공에 매달렸던 아이라면 말이다.
**
모려원이 백면호리, 요정과 돌아온 다음이었다.
요정을 다독여준 진무린은 잠시 뒤에 이안애에 올랐다.
귀혼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선 진무린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세상사 참, 뜻대로 안 된다.
지금도 강호 어딘가에 스무 명이나 되는 벽계의 인물이 숨죽이고 있는데 그들을 찾으려면 석 달을 기다려야 한다.
진무린이 멀리 시선을 두었을 때였다.
뒤편 계단을 통해 모려원이 올라왔다.
“사제는?”
“운진 문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대사형이 청강 진인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에요.”
다가온 모려원은 진무린의 곁에 서서 같은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구대문파가 이미 진중탈구검을 익히고 있어서 벽계의 인물이 나타난다고 해도 과거처럼 쉽사리 당하지는 않잖아요.”
모려원의 말에 진무린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영웅대회를 걱정하세요?”
“사매나 사제만 자리를 지켜도 벽계의 인물들은 충분히 감당한다. 그들 역시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 테니 다른 수를 준비하겠지.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것이다.”
귀혼곡을 내려다보던 진무린이 가볍게 웃었다.
미소의 의미를 모르는 모려원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다음이었다.
“전중방에서 도주한 벽계의 인물을 추적했다는 말을 기억하지? 십 리 안에 있다면 그들의 기운을 잡아낼 수 있으니 상등에 들렀다가 그 핑계로 사매와 강호를 돌아볼까?”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야 본문으로 돌아가겠네요.”
모려원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이제 상등으로 출발하자. 은천수호검을 풀었으니 남는 시간에 검법을 고민하며 보낼 생각이다.”
“예, 대사형.”
그토록 마음 졸이던 모려원이 곁에 있었다.
진무린은 그것이 고마워서 눈부시게 빛나는 모려원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
상등에 도착한 진무린 일행은 곧장 홍화루를 찾았다.
점심을 먹기 전이라 활력이 넘치는 상등과 대조적으로 홍화루는 한밤처럼 고요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진무린 일행을 기다린 것은 총관 백섭광이었다.
“문주를 뵙습니다.”
총관의 태도는 공손했다.
“무탈해서 다행이다. 루주를 만날까 하는데?”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귀혼곡에서 연락을 받은 모양으로 백섭광은 막힘없이 진무린 일행을 원예의 거처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며 느껴지는 살기는 이전과 같았다.
홍화루가 살수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이 매번 궁금했으나 난폭하게 구는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루주. 은천문의 문주께서 방문하셨습니다.”
3층에 오른 백섭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커다란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원예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오른쪽에 설란과 은향이 공손한 태도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루주가 은천문의 문주를 뵙습니다.”
“불편하게 할 것이 있나. 사매는 알 테고, 이쪽은 사제 종무헌이라 하지.”
진무린의 소개로 원예와 종무헌이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탁자를 준비해 놓았고, 의자 역시 세 개였다.
진무린과 모려원, 종무헌이 앉기 무섭게 시비들이 차를 앞에 놓아주었다.
“모산의 문주께서 석 달의 여유가 필요한 참에 루주가 추종향을 이용했다니 다른 의견이 없다면 우리가 추적해볼까 한다.”
진무린의 요구에 원예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설란이 움직여 나무로 만든 작은 우리를 진무린의 앞 탁자에 올려놓았다.
“백초라 불리는 백색 담비예요. 사흘에 한 번, 소고기 반 근을 생으로 먹여야 하죠.”
안이 들여다보이는 우리 안에는 진무린이 양손을 넓게 펼친 크기의 담비가 있었다.
설명을 마친 원예가 다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은향이 엄지손톱 크기의 하얀 단지를 우리 옆에 두었다.
“단지를 열어 향을 맡게 하면 그때부터 우리가 발라놓은 추종향을 찾을 때까지 달려요. 명심하세요.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향을 찾아낸 백초는 야생으로 돌아가 절대 돌아오지 않아요.”
진무린은 우리 안에서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이는 백색 담비를 내려다보았다.
영악한 눈과 날카로운 이빨, 날렵한 몸매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총관.”
백색 담비를 살피는 진무린 일행 앞에서 원예가 백섭광을 불렀다.
시비가 가져다준 종이 세 뭉치를 백섭광이 탁자에 올리자 담비가 그것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앞발을 뻗었다.
“말린 소고기예요. 소지하고 계시다가 사흘에 한 번만 먹이세요. 아무리 애타게 매달려도 그 이상을 주시면 안 돼요. 배가 부르면 향을 추적하지 않거든요.”
“사흘에 한 번이면 9일 안에 추종향을 묻힌 사람을 찾아낸다는 건가?”
“그 전에 찾을 거예요. 추종향을 찾으면 사흘이 안 되었더라도 남은 고기를 먹이세요. 그럼 제 갈 길을 찾아가죠.”
자유로워질 담비가 부러운 것처럼 내려다보았던 원예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9일 안에 추종향을 찾아내지 못하면?”
“생으로 된 고기라도 좋으니 그걸 구해 먹이세요.”
“상등의 사당 앞에서 풀어주겠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네요.”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슷하게 몸을 일으킨 원예는 양손을 앞으로 잡은 뒤에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좋은 소식을 고대하겠습니다.”
어쩐지 진무린을 향한 마지막 인사처럼 보였다.
“사람 일은 함부로 장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루주와 홍화루가 무탈하기를 바라.”
진무린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양손을 마주 잡아 포권을 보인 뒤에 몸을 돌렸다.
비슷하게 인사한 모려원이 담비가 든 우리를 들었고, 종무헌이 종이에 싼 말린 고기를 집었다.
진무린 일행이 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원예는 문이 닫힌 뒤에 자리에 앉았다.
“벽계와 구주의 무공을 능가할 무인을 보다니. 문주의 말대로 사람 일은 함부로 장담해서는 안 되겠지.”
묘한 말을 남긴 원예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시비들이 거짓말처럼 탁자와 의자를 치웠고, 그녀가 읽던 책을 앞에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