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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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10화
은천검제
제210화
모려원과 종무헌이 벽계의 진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반가움을 나눈 일행의 주변에 무너져 있던 담의 잔해가 가루로 변하며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흔적만 남았던 사당 역시 비슷하게 없어졌는데 그 자리에 어른 팔 길이의 나무를 정(井)자 형태로 놓은 취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혼과 매화검수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으나 은천문 일행은 덤덤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 담의 잔해와 사당의 흔적이 사라진 이유가 벽계의 진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까?”
“그렇다고 보시면 되겠소. 취수정에 진을 심어놓았고, 그를 중심으로 결계을 펼친 것이라 생각되오. 다만, 어떻게 기물을 둘로 나누어 공간을 크게 만들었는지가 남는데…….”
은혼의 질문에 답하던 임운령이 고개를 들어 전중방의 건물을 돌아보았다.
“그렇구나! 그랬어! 우리가 장 노대에게 진을 심은 것과 같은 이치겠지.”
설명을 하던 임운령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은혼이 궁금한 눈으로 지켜보는 참이었다.
“장문인께 결례를 보였소. 취수정부터 무너진 담까지 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또 하나의 기물이 필요한 법이라오. 아마도 벽계는 취수정에 하나, 그리고 이곳 방주에게 진을 담지 않았나 싶소.”
은천문 역시 장 노대에게 진을 심었던 터라 충분히 수긍할 만한 추측이었다.
건물을 돌아본 은혼은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방주는 어떻게 됩니까?”
“그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진을 벗어났으니 조만간 쾌차할 것이오. 운기 중에 주화입마에 든 것이 아니라 운기하는 전중방의 방주에게 벽계가 진법을 심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일 게요.”
“참으로 간악한 자들입니다.”
상황을 이해한 은혼이 낡아 버린 전중방의 건물을 보며 탄식을 토해냈다.
“사숙. 방주를 위해 약초를 구하러 나섰던 전중방의 제자 세 사람이 양묘의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제자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이미 오래전 희생되었겠지. 그런 뒤에 양묘의 제자 셋이 그들로 위장해 너를 이용하려 했던 게지.”
모려원의 질문에 임운령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을 내놓았다.
설명을 듣고서야 진을 완벽하게 이해한 진무린은 내심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금이 간 것을 통해 진이 흔들렸고, 그 틈으로 모려원과 종무헌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처음 짐작대로 단숨에 부쉈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일이었다.
세상사가 참 우습다.
담을 부수려 달려드는 정동추를 벽계의 인물이 막았고, 이후에는 다시 은혼과 매화검수가 지켜낸 덕분에 사매와 사제가 돌아왔다.
진무린은 복잡한 심정으로 전중방의 낡은 건물을 눈에 담았다.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진을 담은 방주는 주화입마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고, 제자들은 죽어서 겉모습마저 이용당한 탓에 이제는 전중방이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언제고 도움 될 수 있도록 훗날 따로 전중방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무린의 답이 있고서야 일행은 시선을 다시 가져왔다.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할 때였다.
진무린은 먼저 제자 넷을 불렀다.
“너희는 저기 외롭게 계신 분을 수습해 먼저 본문으로 돌아가라. 사고께 말씀드리면 지시를 주실 테니 그 말씀에 따라.”
“예, 문주.”
화산이 장 노대의 신분을 짐작한다고 해도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마지막까지 암연의 수장으로 떠나게 하려는 진무린의 배려였다.
냉정해 보일 정도로 지시를 내린 진무린은 천을 넓게 펼친 제자들이 장 노대를 감싸도록 곁을 떠나지 않았다.
‘노대. 지금의 소홀함은 암연의 수장을 보내는 문주가 보일 예우입니다. 바로 뒤따라 모실 테니 가시는 길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무린의 아픈 시선 앞에서 천을 펼쳐 장 노대를 감싼 제자 넷이 먼저 출발했다.
그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던 진무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중방의 방주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이만 자리를 피할까 합니다.”
진무린의 의견에 다들 동의해서 일행은 조용하게 무너진 곳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일행은 함께 오 리쯤 걸었다.
뒤에 산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동산에 도착한 일행은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했고, 모려원과 종무헌이 안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화산이 담을 지키지 못했다면, 임운령과 전도위가 급히 오지 않았다면, 진무린이 조금이나마 늦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다! 또한, 화산의 장문인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구나!”
임운령의 말에 모려원과 종무헌이 재차 감사의 뜻을 표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어찌하려느냐?”
“마침 오시는 모양입니다. 교주께서 도착하시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어 임운령이 질문했고, 진무린의 답이 있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임운령과 전도위, 모려원이 먼저 고개를 돌렸고, 잠시 뒤에 은혼과 종무헌이 강한 기운을 느끼며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차를 한 모금 정도 마실 시간이 지난 뒤에 정동추가 일행의 앞에 도착했다.
임운령과 전도위를 소개한 진무린은 정동추를 향해 양손을 잡았다.
“본문을 위해 애써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경공만 펼쳤을 뿐이다. 힘조차 별로 들지 않았는데 무슨 그리 과한 인사를 하냐.”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임운령과 전도위를 소개했고, 애써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태상은 강호에 최소 스무 명의 벽계 인물을 내보냈습니다. 그들이 강호 곳곳에 몸을 감추었는데 세 명은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진무린은 부적을 붙여놓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매와 사제는 암연을 통해 맹주의 위치를 파악해. 그런 뒤에 세 가지 보물을 전해드려.”
“예, 대사형.”
“나는 어른들을 모시고 본문에 돌아가 장 노대를 보내드린 뒤에 귀혼곡으로 향하겠다. 맹주에게 보물을 전하고 나면 귀혼곡으로 와라. 그곳에서 보자.”
진무린이 지시를 마친 뒤였다.
“진 문주. 우리는 이만 본산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진무린이 바쁠 것을 짐작한 은혼이 출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저녁이라도 먹자고 붙드는 것이 예의이자 도리였다.
그러나 당장 장 노대를 앞서 보낸 참이고, 귀혼곡에서는 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산이 베풀어주신 것을 생각하면 본문으로 모셔 대접하는 것이 도리이나 불행한 일과 해야 할 일이 급해 다음에 찾아뵙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벽계의 인물이 누구를 해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입니다. 진 문주께서는 사사로운 정에 끌려 큰일을 소홀하지 마십시오.”
진무린의 양해를 은혼은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남은 것은 정동추였다.
“추적할 수 있는 자가 셋이라 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정동추는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정했다면 시간 끌 것이 무엇이 있어? 이만 일어서자.”
정동추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은 모두 몸을 일으켰고, 다시 몇 차례의 인사를 나눈 뒤에 일행은 은천문, 화산, 마교, 정도맹을 향해 각자의 길을 나섰다.
**
사흘이 훌쩍 흘렀다.
그사이 치열한 대결을 꿀꺽 삼킨 강호는 표정을 읽기 어려운 두꺼비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정도맹을 둘러쌌던 무인들이 절반으로 줄었는데 대신 남은 자들은 끝까지 버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나흘째 되는 날, 황종관은 공고를 정도맹의 네 곳에 내걸었다.
[구관에 들 영웅을 초빙하는 영웅대회를 개최함]
백 일 뒤에 정도맹의 앞에 설치하는 연무대에서 개최하는 영웅대회의 규칙마저 올라와 있어서 모여 있던 이들은 환호했고, 하나둘 흩어졌다.
“맹주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오!”
밖에서 날아드는 환호성을 들으며 황종관은 고개를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은 벽계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른다.
그저 강호의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만 가슴에 담고 실력에 비해 과한 기회를 얻고자 몰려들었을 뿐이었다. 구대문파의 제자들조차 넘어서지 못할 실력이 대다수인데도 말이다.
‘무얼 하고 있나?’
황종관은 벽계의 인물을 추적하고 있을지 모를 진무린을 떠올렸다.
**
진무린은 모려원, 종무헌과 함께 귀혼곡의 앞에 도착했다.
장 노대를 보내주었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쉴 틈 없이 다시 귀혼곡을 찾은 길이었다.
부러진 나무 아래 돌을 두드린 다음이었다.
진법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섭성이 고개를 숙였다.
“잘 지냈니? 다른 일은?”
“그 뒤로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진무린 일행은 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섭성은 종무헌을 더욱 따랐다.
아마도 요정을 지도하며 이곳에서 지낼 때 의지가 됐던 모양이었다.
“참. 백면호리께서 오셨어요.”
“그랬구나.”
걸음을 재촉한 네 사람은 곧장 기인촌으로 들어섰다.
“진 문주! 모 소저! 종 소협!”
누구보다 운진이 기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맞았고, 그 뒤에서 이안공자가 갓을 쓰지 않은 모습으로 손을 맞잡았다.
조마조마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운진은 종무헌의 얼굴을 살피고, 팔을 쓸며 기뻐해서 지켜보는 진무린과 모려원을 미소 짓게 했다.
세 사람이 기인촌 인물들과 인사를 나눌 때였다.
백면호리가 뒤늦게 나타났다.
“정아는?”
“나도 여태 못 봤어.”
그는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난번에도 못 봤는데 여태 안 돌아왔다고?”
“혹시 문제가 있나 해서 가봤거든. 조심해서 다가서는 데도 오지 말라고 버럭 고함을 지르는 거야.”
진무린은 모려원을 돌아보았다.
“소매가 다녀올게요.”
“부탁한다, 사매.”
진무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백면호리는 덜컥 걱정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뭔데 진 문주의 표정이 그래?”
“무공을 익히다 보면 한계를 만날 때가 있어. 그런 상황에서 수련만이 길이라고 매달리다 보면 벽을 깨는 것이 아니라 무공에만 집착하게 될 때가 있지.”
강호에 무공에 미쳐 날뛰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진무린이 듣기 좋게 돌려 말해서 그렇지 광인이 되어 결국 쓰러져 죽는 것이 대다수였고, 몇몇은 결국 살인마가 되어 처참한 최후를 맞곤 했다.
“얼른 사매를 그곳에 데려가.”
“알았어. 다녀올게.”
백면호리가 급하게 몸을 돌렸고, 모려원이 뒤따랐다.
진무린은 종무헌, 운진과 함께 이안공자의 거처 앞에 놓인 탁자에 자리했다.
“진 문주. 상등에서 연락이 있었소.”
“홍화루 말씀입니까?”
“그곳에 벽계의 인물이 들렀던 모양이오.”
입을 연 이안공자가 당시의 상황을 전해 받은 대로 들려주었다.
“공자. 혹시 보관하는 구주의 물건 중에 벽계의 인물을 추적하거나 찾아내는 데 사용할 기물은 없습니까?”
“그들의 진법을 여는 기물은 이미 드렸고, 홍화루가 지닌 것이 남은 전부요. 그 외에는 내가 지닌 의술과 진법이 있는데 이것을 벽계의 인물들을 찾는 데 사용하지는 못하오.”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벽계와 구주가 어디에서 유래됐는지 말씀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뒤에 이안공자를 향해 질문을 내놓았다.
“공자. 벽계가 몸을 감출 다른 장소가 있습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하나밖에 없었소. 그곳에 옥으로 만든 형상이 있어서 그곳의 기운을 받아 육체가 늙지 않는 효능이 있다고 들었소.”
“엄 대협께서도 그러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주도 그런 효능을 얻는 장소가 있다는 뜻입니까?”
“진 문주께 더 무엇을 숨기겠소. 다만, 훗날 조용하게 말씀드릴 기회를 얻었으면 하오.”
이안공자의 대꾸에 진무린은 불편한 심정을 감추려 눈빛을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함께 있는 사람이라 해야 종무헌과 운진이 전부인데 굳이 말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결국, 이안공자는 둘만 있는 순간을 핑계로 시간을 벌고 있었다.
잠시 이안공자를 바라보던 진무린은 품에서 그가 전해주었던 기물을 꺼냈다.
“상황이 복잡하기는 했으나 기물 덕분에 사매와 사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벽계가 새롭게 진을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오. 그러니 그 물건은 진 문주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이 좋지 않겠소?”
벽계와 구주의 사연은 말하지 않으나 협조는 아끼지 않는다.
이안공자의 의지는 분명했다.
“그렇다면 벽계를 해결할 때까지 이 물건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굳이 사양할 일이 아니어서 진무린은 이안공자의 권유대로 기물을 품에 다시 넣었다.
“공자. 벽계의 인물 세 사람을 추적할 술법을 문주께서 펼쳐놓으셨습니다. 혹시 그 셋을 통해 다른 자들을 찾을 방법은 없겠습니까?”
진무린이 마지막으로 건넨 조언에 이안공자는 두 얼굴에 각각 미안하고, 아쉬운 감정을 피워냈다.
“지금껏 벽계의 도발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강호에 숨어들어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숨었다면 그들을 찾아낼 다른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짐작했던 답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모려원이 돌아와 벽계의 세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모려원이라면 길게 시간을 끌지 않을 텐데?
진무린이 모려원과 백면호리가 간 방향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진 문주.”
이안공자의 좌안이 진무린을 조심스럽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