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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204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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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204화

은천검제

제204화

 

진무린을 따르기로 한 운진은 시간이 급한 것을 안다는 투의 걸음으로 은혼을 향해 움직였다.

“장문인. 노도는 무공을 전혀 알지 못하오.”

양손을 잡은 늙은 도사가 그래도 모산의 문주였다.

“제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가르침을 주십시오.”

은혼이 예를 잃지 않은 채 양손을 잡아 운진의 인사에 답했다.

“화산과 장문인, 함께하신 제자 분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마음은 없으나 혹여 도움이 될까 해서 부적을 한 장 붙일까 하오.”

지금 운진이 보이는 공손한 태도와 눈길, 음성을 듣고 그 진심을 모를 수가 있을까.

“진 문주를 도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겠습니까. 문주께서는 부족한 이 사람이 전중방과 담을 지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정도 문파는 참 말 많아.”

투덜거리는 정동추 앞에서 운진은 양손을 교차해 소매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 하늘로 던졌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올라간 부적은 담을 향해 날아가 좌우에 박힌 것처럼 붙었다.

“장문인께서는 노도에게 검을 잠시 보여주시겠소?”

은혼이 진중하게 검을 뽑아 앞으로 내밀자 운진은 또 한 장의 부적을 뽑아 검면에 붙였다.

뜨거운 검에 닿은 얼음처럼 부적은 삽시간에 검면에 스며들어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효능이 있습니까?”

“노도는 진 문주에게 몇 차례의 구명지은을 입었소. 본산 역시 진 문주가 아니셨다면 이미 제 모습을 잃었을 테지요.”

“본론을 얼른 전하고 가야 한다니까.”

백면호리가 뱉어내면 적당한 재촉을 정동추가 토해냈다.

재촉은 같으나 백면호리와 정동추의 차이는 컸고, 말에 담긴 무게도 달랐다.

“저 담이 진 문주의 사매와 사제분을 구할 마지막 고리라 들었소. 해서 노도가 지닌 술법을 장문인의 검에 연결해 놓았으니 마지막 순간에 한 번쯤 득을 보실 것이오.”

운진이 깊은 말을 하지 않는 데다 정동추의 눈꼬리가 고리 형태로 구부러지고 있어서 더는 시간을 끌기 어려웠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종횡주를 매만지는 운진의 곁에서 정동추는 당연하다는 듯 전중방의 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진 문주! 나는 어쩔까?”

“이곳에 있어도 좋고. 귀혼곡으로 가도 괜찮으니 편한 대로 해. 어려움을 보고도 달려와 준 것을 잊지 않을 테니 언제고 백면호리가 당부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지.”

백면호리가 히죽 웃을 때였다.

양손을 잡아 남은 이들에게 예를 보인 진무린이 훌쩍 몸을 날렸고, 운진과 정동추가 그 뒤를 따랐다.

“너희 네 사람은 담 밖을 경계하고 십 리 이내로 들어서는 자가 있다면 내게 알려라. 또한 이곳에 네 명을 세워 교대로 지키도록 해.”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은혼이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백면호리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아 있자니 이곳에 벽계의 인물이 나타나면 화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귀혼곡은 맹주가 달려갈 정도이니 또 어려움이 있을 테고.

주변을 둘러본 백면호리는 마음을 정하고 은혼을 향해 양손을 마주잡았다.

“저는 이만 가 볼까 합니다.”

“편히 하시오.”

인사를 마친 백면호리는 그대로 몸을 날려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

 

진무린이 앞을 날고 정동추와 운진이 좌우로 뒤따르는 형국이었다.

“무슨 짓이냐!”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그의 머리가 손으로 누른 것처럼 달라붙었는데 그 와중에도 정동추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아무리 공력이 넘친다 해도 이런 짓을 하고 어찌 적을 상대할 수 있어!”

경공을 펼친 직후에 진무린이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 정동추와 운진을 감싼 탓이었다.

혈도에 손을 올리고 전해주어도 손실이 워낙 큰 것이 공력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경공을 펼치는 가운데 전해주면 십 분지 일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부족하게 전달되는 것이라면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정동추가 놀랄 정도의 공력이 전해주는 것을 넘어서 운진에게까지 그리하고 있지 않은가.

“사매와 사제를 구하는 일이 급합니다!”

“이대로는 그 어떤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제대로 견디지 못한다! 너도 알지 않느냐!”

“교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문주의 술법도 필요하고요! 마지막으로 공력을 아낄 틈 따위 없을 정도로 시간 역시 촉박합니다!”

“젠자-앙!”

진무린의 얼굴을 살핀 정동추가 느닷없이 거친 말을 시원하게 뱉었다.

운진은 끼어들지조차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데 정동추는 이미 눈꼬리가 고리 형태로 변해 있었다.

“기물이 혹시 은천문을 여는 열쇠냐!”

절벽을 뛰어내린 진무린을 따라 정동추와 운진이 몸을 날렸다.

“다오! 내가 가서 열어주마!”

중간의 바위를 차고 솟구친 정동추가 진무린의 곁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워낙 중한 물건이니 화산의 장문인이나 백면호리에게 맡기기 어려웠던 게지! 그렇지 않으냐! 그걸 열어야 하니까 또 시간이 급할 테고, 나까지 덩달아 함께 달리는 것을 감당해야겠지!”

정동추는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마교 교주가 진무린을 제대로 따르지 못해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한 모양이었다.

“본교의 이름과 내 명예를 걸고 은천문을 열어주마! 대신 이것 한 가지는 알아라! 네가 없다면 본교가 이십 년 내로 강호를 일통할 거다! 반드시 명심해!”

힐끔 돌린 진무린의 눈을 정동추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휘이익!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넘어서느라 진무린과 정동추는 각각 시선을 돌렸다.

“내놓으라지 않으냐!”

“교주께서 제 부담을 덜어주시고자 억지를 부리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끄럽다!”

“함께 벽계를 상대하고 본문으로 향해도 됩니다!”

“그렇다면 공력을 거두어!”

마지막 정동추의 요구에 진무린은 답을 하지 못했다.

“내놓아!”

감정이 담긴 요구를 들은 진무린은 나무 위를 달리며 품에서 보자기를 꺼내 허공에 놓았다.

워낙 빠르게 달리는 터라 보자기에 쌓인 기물은 곧바로 뒤따르는 정동추의 손에 잡혔다.

“어떻게 하랴?”

“세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두 그루의 가지가 얽힌 아래에 기물을 두십시오. 그리하면 안에서 제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전할 말은!”

“전중방으로 향해 담을 지키라 전해주십시오!”

“그다음은?”

“귀혼곡에서 뵙겠습니다!”

“교주가 돼서 심부름이나 하다니! 젠장!”

빗겨나간 화살처럼 정동추는 오른쪽으로 크게 휘더니 그 짧은 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동추가 사라지자 운진이 좀 더 진무린의 곁에 붙을 수 있었다. 

죽으라 달려 전중방에 도착한 직후에 다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경공을 펼치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몸이 개운해서 마치 신선이 되어 구름에 올라탄 느낌마저 들었다.

‘진 문주!’

진무린을 살핀 그는 이제야 왜 정동추가 그리 악을 써대며 은천문으로 향했는지 알았다.

전중방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진무린의 낯빛이 확실히 좋지 않았다.

 

**

 

해가 어스름하게 산의 너머로 넘어갈 때 황종관은 귀혼곡의 근처에 도착했다.

여전히 검을 늘어트린 채였고, 왼쪽 팔뚝에서 배어 나온 피가 손을 흠뻑 적시고 바닥에 떨어지는데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습이 드러날까를 염려한 황종관 일행이 산의 능선을 타고 묵묵하게 걸을 때였다.

앞쪽 숲에서 튀어나온 비월단 단원이 황종관을 향해 왼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윤고상은?”

“귀혼곡의 입구에 길이 아홉 치의 청동검 세 자루와 옥으로 만든 형상을 심어두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눈가를 좁힌 황종관은 굳은 표정이었다.

“앞장서.”

“예, 맹주.”

길을 여는 비월단 단원을 따라 황종관과 가신들, 백호단이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다닌 적 없는 산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여기서부터 기척을 줄이셔야 합니다.”

이각쯤 걸은 비월단 단원의 경고에 황종관 일행은 숨소리마저 주의하며 움직였다. 

다시 일각쯤 더 움직인 뒤였다.

“저 바위 너머에 있습니다.”

비월단원이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내공을 일으킨 황종관은 바닥을 밟지 않는 것처럼 경공을 발휘해 움직였고, 이어 바위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윤고상이었다.

수척해진 그는 비수 세 개를 세모꼴로 바닥에 꽂아두었는데 날이 모두 흙에 박혀서 손잡이만 보였다. 그리고는 비수 사이마다 옥으로 만든 형상을 세워두었다.

거리가 있어서 비월단 단원은 못 봤을지 몰라도 내공이 높은 황종관은 형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다.

무인의 자세였다.

하나는 양팔을 엇갈려 위로 들었고, 다른 하나는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으며, 마지막은 낮춘 자세에서 무릎 앞을 막는 동작처럼 보였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당장 윤고상의 목을 베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붙들어서 추궁할까.

아니면 좀 더 지켜볼까.

그러나 왜 저런 짓을, 그것도 비월단의 단주였던 윤고상이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선택이 필요했다.

윤고상은 무공이 높지 않았다.

무공이 높은 자는 청룡단이나 백호단의 단주를 하면 했지, 비월단을 맡으려 하지 않는 점도 있고, 비월단에 필요한 은신술과 경공에 치중한 탓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윤고상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홀로 있는 윤고상은 두려운 모양으로 자주 주변을 살폈다.

이것이 덫이면 불쑥 튀어나갔다가 황종관 일행은 몰살당하기 좋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벽계의 인물 하나를 상대하는 데도 이 모양인데 그들이 굳이 몸을 감출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라면 얼마든지 황종관 일행의 기척을 알아챌…….

섬뜩한 생각에 황종관이 고개를 돌렸고,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바위의 맞은편 나무 위에서 중년 남자가 꼿꼿하게 선 채 황종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종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가신들과 백호단원들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잡았을 때, 중년 남자는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새가 앉아도 휘어질 것처럼 얇은 가지들을 여유롭게 밟아가며 마침내 중년 남자가 바닥에 내려섰다.

“그래도 맹주란 것인가? 용케 이곳까지 왔군.”

동료의 죽음을 짐작했을 텐데도 중년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황종관은 아직도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이 꼴이 되어서 겨우 살아왔더니 아무래도 명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모양이오. 무덤에 술을 부어주는 대신 궁금한 것 한 가지만 들읍시다.”

질문하란 말도 없었는데 황종관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윤고상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흠흐흐.”

질문을 들은 중년 남자는 먼저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직후에 그는 모습이 흐릿해질 만큼 빠르게 산을 향해 뛰어들었다.

황종관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토끼를 잡은 사냥꾼처럼 비월단원의 뒷덜미를 움켜쥔 중년 남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맹주의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해주려고 해도 이놈이 말을 퍼트리면 곤란하지 않겠나.”

보란 듯이 중년 남자는 붙들고 있던 비월단원을 앞으로 툭 던졌다.

“이제 말이 새나갈 염려가 없으니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비수와 흉상은 귀혼곡에 붙들린 매개물에 힘을 준다네.”

“매개물은 또 뭐요?”

황종관이 다시 질문을 건넸는데 중년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고 했으니 이제 그만 끝내세.”

“궁금해서 그렇잖아!”

황종관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으니 악만 남은 사람처럼 보였다.

“매개물은 뭐고 당신들이 직접 해도 될 간단한 일을 왜 윤고상을 시켰는지 궁금하니까!”

도를 들어 윤고상을 가리켰던 황종관이 빠르게 가신들과 백호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윤고상을 죽여!”

“예!”

가신들이 확실히 빨랐다.

퍼러럭, 옷자락을 날리며 일곱 명의 가신들이 몸을 날렸고, 그 뒤를 따라 백호단원들이 줄줄이 바위 아래로 뛰었다.

“어딜!”

휘릭! 쉐에엑! 카아앙!

황종관은 핏물이 흠뻑 묻은 왼손으로 도의 등을 때려 중년 남자를 막았다.

쉑! 카앙! 쉑쉑! 카아앙!

중년 남자가 황종관을 죽이려 한다면 대략 십여 초 안에 뜻을 이루지 않을까. 그러나 윤고상을 향해 몸을 빼려는 마음에 중년 남자는 마음이 급해 보였다.

쉬이이익! 쉐에에엑!

기운을 한껏 끌어올린 남자의 손을 황종관이 막은 직후였다.

콰으응!

섬뜩한 충돌음이 터지며 황종관이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욕을 할 틈도, 마지막 한 수를 뻗을 틈도 없는 사람처럼 중년 남자가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고,

“끄아-악!”

처참한 비명이 아래쪽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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