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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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8화
은천검제
제198화
백면호리는 원체 정도맹이 불편했다.
맹주 황종관이 건네준 환약 덕분에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그는 갑갑한 얼굴로 별채의 마당에 나섰다.
“이건 아니지.”
벌써 며칠째인가.
정도맹의 별채를 차지하고 지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백면호리가 그 정도에 정신을 팔 위인은 아니었다.
“어째 그러시오?”
“생각을 해보시구려. 진 문주가 나선 지 벌써 며칠째입니까? 여태 잠잠하다면…….”
늘 거칠 것이 없던 백면호리가 운진 앞에서 말끝을 흐렸다.
“맹주께 소식이 없는지 물어보면 어떻겠소?”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 맹주가 바로 알려줬지 이대로 두겠소? 더구나 어제까지 얼굴을 비쳤던 맹주가 오늘은 아예 연락조차 없지 않소?”
“그 말씀은?”
불안한 표정의 운진을 향해 백면호리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백면호리의 눈빛을 알아챈 운진은 소매에 손을 넣었다.
“어쩌시려고?”
“노도가 전중방으로 가서 직접 들여다봐야겠소.”
“어허!”
백면호리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나 본데 벽계에 비하면 유광은 애들 장난이라니까요. 이 백면호리가 죽을 뻔한 것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듭니까?”
만류하는 백면호리 앞에서 운진은 종횡주 하나를 발목에 매달고 있었다.
“안 된다니까요. 가봐야 그냥 죽는 거 말고는 없다니까.”
“진 문주가 아니었다면 모산은 제 모습을 지키지 못했을 테고, 노도 역시 이미 죽었을 게요.”
“그래서 이렇게 달려가 함께 죽기라고 하시겠다? 그걸 진 문주가 바란다고 생각하시나?”
양쪽 발에 종횡주를 단 운진이 그때 몸을 일으켰다.
“진 문주가 계신다면 분명 말리겠지요. 그렇더라도 노도는 가봐야겠소. 가서 아무것도 못 하더라도 이리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외다.”
유광에서 종무헌을 대신해 죽음을 청하던 운진을 이미 보았던 백면호리였다.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익히 알았다.
한숨을 푹 내쉬는 백면호리를 향해 운진이 입을 열었다.
“전중방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달려야 하오?”
“허어!”
“길만 잡아주시오.”
백면호리는 슬프게 웃었다.
“이럴 바엔 맹주께 소식이 없는지나 알아봅시다. 그런 뒤에 움직이면 좋지 않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운진을 잠시 달랜 백면호리는 별채의 바깥으로 움직여 입구를 경계하는 무인에게 뜻을 전했다.
“맹주께서는 맹을 잠시 나서셨습니다.”
“어딜 가셨는지는 모르시고?”
“출타하신 것도 별채의 귀빈이라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진무린 일행이 아니라면 이 정도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거 봐? 그렇다면 맹주가 전중방으로 향했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고개를 갸웃하며 별채 안으로 들어선 백면호리는 운진을 보며 계산을 마쳤다.
“함께 갑시다.”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소?”
“진 문주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는 판에 위험한 것이 대수요? 갑시다, 전중방.”
“과연 백면호리시오!”
운진의 칭찬에 백면호리는 남모를 미소를 그렸다.
**
운기를 마치고도 이틀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진무린과 모려원, 종무헌은 먼저 민가와 대전을 살피며 음식을 모았다. 샘마저 있어서 벽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첫날을 그렇게 보낸 진무린은 이튿날부터 모려원과 함께 종무헌의 검법을 살폈다.
수련이 끝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친 진무린은 운기를 앞두고 종무헌을 앞에 앉혔다.
“사제가 지닌 세 가지 보물을 회수하겠다. 지금껏 기운이 지나가던 길을 되새겨 묵룡심법을 운용한다면 반드시 대성을 이룰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사형.”
진무린은 몸을 일으켜 손바닥에 내공을 끌어올린 뒤에 종무헌에게 달려있던 세 가지 보물을 손쉽게 거둬들였다.
지금까지 모려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던 종무헌은 보물이 하나씩 떨어져 나올 때마다 급격하게 힘이 줄어들었다.
서운할 수 있었다.
세 가지 보물을 계속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이 솟을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무헌은 그런 내색이 전혀 없이 덤덤했다.
“지금부터 묵룡심법을 운기해.”
진무린의 지시를 들은 종무헌은 바로 바닥에 내려가 자세를 잡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종무헌을 지켜보던 진무린은 세 가지 보물을 모려원에게 건네준 뒤에 민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상을 쓰러트린 뒤로 세 번째 어둠이 내려앉은 벽계의 세상은 고요했다.
죽은 자들을 한쪽으로 치운 덕분에 평지는 거칠 것 없이 펼쳐졌고, 그 끝에서 이어진 하늘에는 빛나는 별이 가득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까요?”
진무린의 곁으로 다가온 모려원이 주변을 둘러보며 건넨 질문이었다.
“아직 사흘이다. 혹여 밖에서 불행한 일이 벌어져 이곳에서 남은 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사매가 있고, 사제가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냐.”
“대사형은 바깥이 염려되지 않으세요?”
모려원의 질문을 받은 진무린은 먼저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한 달 이상 연락이 없다면 장 노대가 본문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때쯤이면 본문의 제자들이 모두 은천수호검을 익혔을 텐데 본문은 염려할 것이 없고.”
모려원의 시선 앞에서 진무린은 아예 편안한 얼굴이었다.
“강호의 모든 어려움을 본문과 우리가 모두 해결하지는 못한다. 벽계의 최고수인 태상을 쓰러트렸고, 본문이 있으니 비록 어려움이 잠시 있다 할지라도 강호는 다시 평화를 찾을 거다.”
진무린은 시선을 내려 모려원을 찾았다.
“욕심을 지닌 이들은 언제고 나오지. 그들 모두를 상대할 것이 아니라면 바른 정신과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전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다.”
“대사형은 소매가 이해하지 못할 마음공부를 이루셨나 봐요.”
“홀로 살아남기보다는 사매, 사제와 이렇게라도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 그런 모양이다.”
진무린의 대꾸를 들은 모려원이 보기 좋게 미소 지은 뒤에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처음엔 소매도 그리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욕심은 끝이 없는지 소매가 평생 여기 갇히더라도 대사형은 강호로 나가셨으면 싶어요.”
“나가게 될 거다. 장 노대를 믿고 본문의 어른들을 믿자. 바람이 있다면 그 전에 사제가 묵룡검법을 대성하는 것이다.”
진무린과 모려원은 그렇게 무수한 별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
마교의 본산에 도착한 섬도곤은 곧장 정동추의 앞으로 나가 몸을 구부렸다.
“쓸데없는 소리 빼고 보고 들은 것만 말해봐.”
섬도곤은 워낙 과장 따위 못하는 제자였다. 그는 정말이지 감정이나 느낌을 완전히 배제한 사실만을 전해주어서 시간조차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보고가 끝난 다음이었다.
“만약 강호일통을 하라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냐?”
뜬금없는 질문이 섬도곤을 향해 떨어졌다.
“네가 교주가 된다는 가정이다. 내 눈치 볼 것 없다. 네 마음대로 본교를 주물러도 된다.”
“은천문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아무렴 본교가 강호일통에 나선 걸 은천문이 지켜보고만 있겠냐?”
입술을 굳게 깨물며 섬도곤이 시간을 끌었고, 정동추는 또 그답지 않게 기다려주었다.
“이십 년을 주시면 반드시 강호를 본교의 손에 넣겠습니다.”
“흠.”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정동추는 매섭게 섬도곤을 노려보았다.
“본교가 추구하는 강호는 어떤 모습이냐?”
“본교의 교리가 강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신 있느냐?”
“거절하는 것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본교의 교리를 따르는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정동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껏 강호일통을 외쳤던 본교의 퇴물들이 그리했었다. 본교의 교리보다는 무공에 치우쳐 힘을 내세우는데 치중했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섬도곤을 향해 정동추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교도들의 삶을 본 강호인들이 스스로 걸어들어오도록 만들어. 무공은 천하제일이요, 삶은 평화로운 곳, 그리하면 굳이 목을 자르지 않아도 언젠가 강호는 본교의 것이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대답대로 기억은 하겠지만, 섬도곤은 정동추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내일부터 교를 이끌어.”
“사부님?”
“반대할 만한 것들의 목을 모조리 잘랐으니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제자는 아직 이릅니다.”
“이십 년이다. 그때까지 내가 납득할 성과가 없다면 반드시 돌아와 네놈의 목을 몸뚱이에서 떼어낼 테니 허튼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좋아.”
말을 마친 정동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본교에서 가져갈 것은 수신호위 다섯과 환약 세 개가 전부이니 그리 알아.”
차갑게 말을 던진 정동추는 감히 나서지 못할 정도로 냉정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
사흘째였다.
세 번의 낮이 지나고 세 번째 어둠이 내렸을 때, 장 노대는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벽계가 이겼다면 그쪽 인물들이 밖으로 나왔을 일이고, 진무린이 승리했다면 역시 이맘쯤에는 진법에서 나섰을 텐데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 노대는 백면호리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무공이 없는 대신 경공만큼은 뛰어난 것이 첫 번째였고, 다음으로 백면호리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면 장 노대는 은신술이 그 이상이었다.
진무린 같은 고수들은 기운을 감출 줄 안다. 구대문파의 장로급 이상만 돼도 장 노대는 무공이나 기운을 감추는 면에서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붙들린다면 장 노대가 죽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은천문은 영원히 강호와 연이 끊긴다.
어쩔까.
이대로 은천문으로 가서 진법을 개방할까.
아니면 진무린이 향로 옆에 둔 기물을 먼저 손에 넣을까.
그도 아니면 향로를 당겨 벽계의 진법을 개방할까.
주변을 살피며 장 노대는 진무린을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진무린은 진중한 편이었다.
진무린을 경계하는 눈초리를 알아서인지는 몰라도, 사소한 행동 하나를 할 때도 늘 다른 이를 배려했다.
진무린이 속을 보이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는데 장 노대는 그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런 진무린이 향로 옆에 무언가를 올려두었다.
“힘을 잃은 방파라 해도 사당을 지나치며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오.”
장 노대가 지켜보는 것을 익히 아는 상태에서 진무린이 한 말이었다.
‘우선 회수한다.’
진무린의 진중함을 믿은 장 노대는 마음을 굳혔다.
남은 것은 저 물건을 가져올 때의 안전이었다.
개인적인 죽음 따위 은천문을 위해 얼마든지 감수한다.
그러나 장 노대가 사라지면 은천문은 영원히 강호에 나오지 못하는 불행을 맞는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핀 장 노대는 암연 특유의 기운을 뿜어냈다.
그가 서 있는 곳의 잡풀이 가볍게 일렁인 다음이었다.
바람처럼 움직인 장 노대는 사당 입구 앞쪽의 담에 붙어 몸을 감췄다.
고수가 있다면 장 노대가 뿜어낸 기운을 읽었으리라.
정동추가 마교 앞에 몸을 감춘 암연의 수하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다.
‘문주. 이 늙은이에게 힘을 주시오.’
하늘을 살핀 장 노대는 기운을 뿜어낸 뒤에 사당의 제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울리며 담벼락에서 솟구친 사람의 그림자가 장 노대를 덮쳤다.
화라락.
장 노대가 향로 옆에 놓인 보자기를 회수한 직후에,
퍼어억!
그의 옆구리를 손날이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옆구리를 얻어맞은 장 노대의 모습이 사라지자 사당 앞에 선 중년 남자는 먼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뒤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근처에 있는 것을 안다. 움직이려면 기운을 다시 뿜어내겠지? 하루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기다려주마.”
장 노대를 향해 말을 던진 중년 남자는 담벼락을 향해 가볍게 솟구친 뒤에 이내 몸을 감췄다.
어둠이 직전에 있었던 살벌한 장면을 삼키며 사당 앞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장 노대는 사당의 뒤편에 붙어서 있었다.
은신술을 발휘해 죽음을 피하기는 했으나 앉지도,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울컥 올라오는 피를 토해내지도, 그렇다고 움푹 들어갈 정도로 뼈가 부러진 오른편 옆구리를 치료할 방법도 없었다.
더는 막을 길이 없었다.
목을 타고 올라온 피를 장 노대는 악착같이 다시 삼켰다.
은신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까지는 감추지 못한다.
‘문주. 이 늙은이는 죽어도 상관없소. 부디 몸뚱이만이라도 본문으로 돌아가 마지막 역할을 다하게 해주시오.’
억지로 피를 삼킨 장 노대는 진무린을 떠올리며 소망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