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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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59화
259화
광소를 터트리는 위지천백의 입에서 핏물이 튀며 허공에 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그것이 끝이었다.
위지천백은 살아생전의 마지막 웃음과 함께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천검무왕, 제왕성주, 무림왕.
일세를 풍미하고 나라를 세우기 직전까지 갔던 절대효웅이, 마침내 야망의 정점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천검무왕 위지천백이 죽었다!”
누군가의 외침이 관제산을 허물어뜨릴 것처럼 울렸다.
위지천백의 죽음은 제왕성 무사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상황이 급변했다.
제왕성의 간부들은 우왕좌왕하며 살 길을 찾았다.
그 와중에 인환은 북리중현에게, 지살객은 주호성에게 죽음을 당했다.
본래 지살객에게 결정적인 부상을 입힌 사람은 우덕청이었는데, 주호성이 마지막 순간에 끼어들어서 지살객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누가 죽이면 어떤가?”
그 말과 함께. 일만 냥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러고는 우덕청이 눈을 부릅뜨든가 말든가 다른 먹이를 향해 통통한 몸을 날렸다. 아직 두당 일만 냥짜리가 몇 더 남아 있었다.
제10장 낮은 황제(皇帝)가, 밤은 암천제(暗天帝)가
막위지는 다섯 개의 건물을 넘고 작은 숲을 하나 지나서야 밀천객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가 제왕성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밀천객의 부상이 가볍지 않았던 탓이 더 컸다.
“멈춰라! 네놈…… 장명이지!”
앞서 신형을 날리던 밀천객의 몸이 흔들렸다. 부상과 심적인 타격이 겹치자 기혈이 꼬인 것이다.
막위지가 계속 따라가며 달래듯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그러니 일단 멈춰라.”
밀천객은 숲을 지나 한때 금원이라 불렸던 곳의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하늘의 어둠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반쯤 포기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턱에 있는 점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큰데 내가 왜 몰라보겠느냐?”
밀천객의 얼굴가죽이 뜯겨져 나간 곳에는 커다란 점이 있었는데, 족히 엄지손톱만 했다. 어릴 때는 절반 정도의 크기였는데도 그는 그 점 때문에 점박이라는 애칭 아닌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짧은 순간, 얼굴의 반쪽만 보고도, 막위지는 그 점 때문에 곧바로 백장명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왜? 부끄러워서 그러느냐?”
밀천객, 백장명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막위지는 그런 백장명을 향해 코웃음 쳤다.
“흥! 하긴 그동안 부인과 아들의 생사는 내팽개친 채 위지천백과 함께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낯이 아무리 두꺼워도 얼굴을 들지 못하겠지.”
백장명은 이를 악물고 막위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삼 년을 싸우고 겨우 살아서 세상에 나왔는데, 제왕성은 위지천백에게 넘어가 있고, 부친도 죽고, 형님은 삭탈관직을 당한 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감정만 앞세우는 사람이었다면, 칼 한 자루 들고 쳐들어가서 죽기 살기로 싸웠을 것이다.
겁쟁이였다면 멀리 도망가서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감정만 앞세우는 열혈한도, 겁쟁이도 아니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린 그는 제왕성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하고 있던 고은선과 두진진이 비밀장소에서 죽은 것 같다는 정보를 얻은 그는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자신의 행복을 앗아간 세상이 싫었다.
빌어먹을 세상, 내 모든 것을 바쳐 뒤집어버리고 말리라!
그는 백화명의 집을 먼발치에서 밤새 바라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세상을 뒤집어버리기로 작정한 터다. 실패한다면 역도로 몰릴 것은 기정사실. 죄 없는 형님이 자신 때문에 또다시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발길을 돌리며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백장명은 죽었다! 이제 오직 세상을 증오하는 복수귀만이 있을 뿐!
하지만 그에게는 당장 세상을 뒤집을 힘이 없었다.
없다면 키워야겠지. 몇 년, 몇십 년이 걸려도!
그렇게 생각한 그는 정체를 숨기고, 원수나 다름없는 노태군의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노태군은 그를 가까이 두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에게 마침내 노태군의 비고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는 그곳에서 이백 년 전,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밀천도객의 비급을 발견하고 몰래 훔쳤다.
하지만 육 개월이 지날 무렵, 비급이 사라진 것을 안 노태군이 그를 추궁했다. 지나가던 중 그가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는데, 하필 그때 훔친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노태군은 용서를 모르는 사람. 특히나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즉시 은룡산장을 도망쳐 나왔다. 만에 하나 그러한 일이 벌어질 경우까지 대비하고 있던 그였다. 그는 삼십 리를 도망친 후,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것처럼 꾸미고 노태군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오대산으로 들어간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뜯어서 정리했다. 세월은 쉼 없이 흘렀지만, 그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십 년 후.
힘을 얻고 세상에 나온 그는 산서와 하북, 섬서의 강자들을 은밀하게 찾아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았다.
밀천객이라는 이름이 강호의 저 밑바닥에서 수면으로 떠오르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
이름을 얻은 그는 얼굴을 바꾸고 위지천백에게 접근했다.
처음에는 위지천백을 죽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그는 너무 컸다. 자신이 암습을 한다 해도 죽일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그는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세상을 뒤집기로 작정한 터다.
위지천백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위지천백을 죽이는 것은 천하를 얻은 다음에 해도 될 듯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위지천백을 은밀하게 찾아갔다. 때로는 간단한 이야기만 나누기도 했고, 어떤 때는 넌지시 자신의 뜻을 비치기도 했다.
오 년이 지나서야 위지천백은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뒤에 서게 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백장명이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도 지독할 정도로 철저히 부정했다.
오죽했으면 부인인 고은선에 대한 것도 일체 알아보지 않았다. 오로를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백장명이 아닌 이상 알아볼 이유도, 찾아갈 이유도 없었다.
세상에 대한 복수를 마치기 전까지는.
그랬거늘…… 아들이 살아있었을 줄이야!
‘얼굴을 보고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황궁에서 봤을 때 기이한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최후의 순간, 어떻게 하면 위지천백을 제거하는데 독고무령을 이용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을 뿐.
그런데 아들이란다. 백장명과 고은선의 아들.
오! 맙소사!
그는 잘게 떨리는 눈을 들어 어둠을 응시했다.
자신은 그의, 독고무령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었다.
“백장명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럼, 앞에 있는 너는 뭐란 말이냐?”
“밀천객. 세상을 뒤집기 위해 위지천백과 손을 잡은 역도. 그게 접니다.”
“흥! 네가 아무리 그래봐야 네 몸속의 피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했던 제 피도 이미 욕망으로 물들어서 변한 지 오랩니다.”
막위지는 백장명이 계속 부정하자 발끈해 소리쳤다.
“너 정말……!”
그러나 백장명의 눈을 보고 말을 흐렸다.
어둠을 응시하는 백장명의 두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던 것이다.
“비옥십팔호실이 얼마나 참혹한 곳인지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십 수 년을 살고, 결국 살아나온 아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그 아이 앞에 가서 내가 네 애비다. 그럴까요? 지난 이십 몇 년 동안 너를 찾지 않은 것은 몰라서 그랬다? 그도 아니면, 부인과 아들을 팽개친 것은 내 욕망 때문이었다, 그럴까요? 지금 내가 그 아이 앞에 나선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시는 겁니까?”
막위지라고 해서 그게 얼마나 우습고 어이없는 일인지 왜 모를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저는 당분간 밀천객입니다. 밀천객처럼 살아야겠지요. 언젠가는 백장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그저 밀천객일 뿐입니다.”
마지막 말에 막위지의 눈이 반짝였다.
“돌아오긴 돌아오겠다는 거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밀천객으로 살지, 아니면 백장명으로 돌아올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부인의 배 속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들이 하늘 아래에서 자신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 세상을 뒤집는다 해도, 천하를 얻는다 해도 그 일보다 기쁠 것 같지는 않았다.
‘세월이 걸리더라도, 떳떳하게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서 찾아가마.’
* * *
독고무령은 장내를 정리할 동안 장소천과 함께 제왕지처로 향했다.
그곳에는 위지천백의 가족이 아직까지 도주하지 않고 남아있었는데, 독고무령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함부로 손을 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터였다.
제왕지처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호천위가 보였다. 그리고 오십여 명의 암향단 무사들이 전각 앞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들의 전면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위지성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제왕지처에 있었던 듯했다.
독고무령이 장소천과 함께 전각으로 다가가자 암향단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중에는 도청진과 천수옥, 홍려려도 있었다. 옷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긴 했지만,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무사했군.”
독고무령의 말에 천수옥이 씩 웃었다.
“회주의 술을 한 잔 얻어먹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습죠.”
도청진이 눈치도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천수옥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 하, 오면서 그랬잖습니까. 안 그래, 사매?”
홍려려는 그래도 도청진보다는 눈치가 빨랐다.
“맞아요, 사형. 호, 호, 호. 저도 회주님이 사주시는 술을 꼭 마시고 싶어요.”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일이 모두 정리되면 내가 술 한잔 사겠소.”
천수옥이 헤벌쭉 웃었다. 도청진도 그건 마음에 드는지 함께 웃었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돌려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찢겨진 옷자락 사이에서 배어 나온 핏물이 그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 공허한 눈빛.
그의 뒤 이 장쯤 떨어진 곳에는 부상당한 청년 하나가 기둥을 의지하고 서 있었는데, 언뜻 봐도 위지성과 비슷하게 보였다.
‘동생인 위지환인가 보군.’
그의 이 장 앞에 멈춰선 독고무령은 미처 위지천백에게 묻지 못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장이생 어르신 부부와 유유를 그대로 돌려보냈더군. 그 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허공을 바라보던 위지성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유유? 장유유를 말하는 건가?”
독고무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성은 고개를 들어 어둠을 바라보고는 푸들거리며 웃었다.
“큭큭큭, 그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오빠의 친구라더니, 그게 바로 그대였던가?”
갑자기 장이생과 장유유의 이름이 나오자, 장소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장유유의 오빠다. 그런데 무슨 말이지? 저자가 내 부모님과 유유를 돌려보냈다니?”
“위지천백이 며느리로 삼기 위해서 아버님과 어머님과 함께 유유를 숭산에서 데려온 모양이더군. 그런데 위지성이 빼돌려서 무사히 태원으로 돌아왔다네.”
장소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그게 정말인가?”
“자네 부모님은 내게도 부모님이나 다름없고, 유유는 장차 내 사람이 될 여인이 아닌가? 상황이야 어쨌든 은혜는 은혜. 나는 그 대가로 위지천백의 가족을 모두 조건 없이 풀어줄 생각이네.”
위지선유까지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 역시.
위지성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는 위지천백처럼 욕망에 물든 자가 아닌 듯했다.
장유유의 일은 그들을 살려줄 수 있는 훌륭한 조건이었다.
‘어머니, 이해해주십시오. 가슴에 맺힌 한을 여기서 끝내려 합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만 같다.
“흑!”
그때 전각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독고무령은 그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해라.>
<막 할아버지에게 들었어요. 왜 독고 공자가 아버지와 싸우는지…….>
독고무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막위지는 자신과 위지선유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위지선유에게 자신과 위지천백 사이에 얽힌 사연을 말해준 듯했다.
<가슴이 아프면 마음껏 울어라. 그리고 떨쳐라. 쌓이면 한이 되어서 몸만 해치니까.>
독고무령이 전음을 보내는 사이, 장소천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저자 덕분에 아버지와 어머니, 유유가 무사했다면, 당연히 살려줘야 할 거네.”
독고무령의 말을 들은 터라,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보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마차를 내줄 테니, 날이 샐 때까지 짐을 챙겨라.”
* * *
비옥십팔호실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피가 흐른 지 오래 되어서인지 비릿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고, 탁자와 쇠로 된 침상에도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독고무령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침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하하하, 우리 아들 왔구나!
‘예, 아버지. 제가 왔어요.’
-내 걱정은 말아라.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거든.
‘위지천백이 죽었어요. 뭐 반쯤은 제가 죽였지만…….’
-과연 내 아들이다! 위지천백을 죽이다니! 그럼 네가 천하제일인이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천하를 통틀어도 셋은 안 넘을 거라는 건 분명해요. 아마 그들도 저를 이기지 못할 거고요.’
-우와! 우리 아들 대단하구나!
‘그러니 걱정 말고 편히 지내세요.’
-그럼, 그럼!
아버지가 환하게 웃는다. 아무 걱정 말라는 듯.
독고무령도 조용히 웃으며 침상에서 손을 뗐다.
그때 염상소가 뒤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