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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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58화
258화
위지천백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독고무령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
“참으로 아깝구나.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복수에만 미쳐 날뛰다니. 하긴 복수에만 미쳐 날뛰는 네놈이 백성의 아픔을 어찌 알겠느냐?”
독고무령이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지천백, 언제부터 북원의 간자가 대명의 백성을 생각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북원의 간자란 말이냐!”
“설마 자신의 핏줄을 속일 생각은 아니겠지? 정말 자신이 북원의 간자가 아니라면 자신 있게 말해봐라! 북원의 역대 칸을 그대 입으로 욕하고 발로 짓밟아봐라, 위지천백! 그리고 알탄을 향해 열 가지의 욕을 해봐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위지천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하하하! 위지천백! 나는 사실 그대가 북원의 사람이든, 대명의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대를 비웃는 것은, 근본을 속이려는 자가 만인을 다스리겠다는 것이 우스워서 그러는 것이다!”
“미친놈이 이제 별 소리를 다하는구나! 감히 본좌를 능멸하다니! 정녕 몸뚱이를 핏물로 만들어 죽여도 싼 놈이로다!”
그때였다. 독고무령이 십 장 근처까지 다가온 장수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마상에 있던 삼백에 가까운 장수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태원의 도지휘사 정추경이 커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북원의 잔당이 나라를 세우겠다니, 령주의 말씀대로 저자는 제정신이 아닌 자입니다!”
일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위지천백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추경과 독고무령을 번갈아보았다.
독고무령이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위지천백, 안 됐지만, 대동의 안청은 오지 못한 것 같군.”
장소천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당연하지. 나와 실혼대가 죽였거든. 그자 말고도 스물두 명을 더 죽였는데, 알고 보니 모두 제왕성에서 오래 전부터 심어놓은 자들이더군.”
위지천백의 안색이 급변했다.
“네놈들이 무슨 수작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대의 모든 욕망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놈이 뭔데……!”
정추경이 버럭 소리쳤다.
“그분께선 태자 저하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으신 용검령주시다! 말조심해라, 위지천백!”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어렴풋이 깨달은 위지천백이 광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하! 진정 어이가 없구나!”
독고무령은 그의 광소가 잦아든 틈을 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멋모르고 이 일에 끼어든 제왕성의 사람들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하나 누구든! 앞으로 위지천백을 따르는 자는 역모를 꾀한 역도로 규정하고, 그 죄를 물어 죽음을 내릴 것이다!”
제왕성의 무사들이 술렁였다.
역모! 역도!
성공하면 영광이지만, 실패하면 구대가 멸족을 당하는 죄가 아닌가.
문제는 저울추가 실패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장소천이 목소리에 진기를 실어 말했다.
“반각의 시간을 줄 것인즉, 역모에 가담하지 않을 자는 동쪽으로 가라!”
동쪽에는 암천회와 천룡방의 무사들이 있었다.
웅성거리던 제왕성의 무사들 중 동쪽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곧 수십 명이 움직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무사들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동쪽으로 이동한 무사들의 숫자가 숨 몇 번 쉴 시간 만에 삼사백에 이르렀다.
심지어 간부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이동하는 자들이 나왔다.
“나는 처음부터 역모를 할 생각이 없었소이다!”
“나, 나도 그렇소!”
그들 중에는 노태릉도 있었다.
“성주가 북원의 간자라니. 그걸 알았으면 처음부터 따르지 않았을 거요.”
위지천백은 분노가 머리꼭대기가 치솟은 상태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느덧 동쪽으로 옮겨간 무사의 수가 반을 넘었다. 그리고 바라보는 중에도 계속 옮겨가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독고무령, 이놈! 네놈 때문에 수십 년 쌓아온 탑이 허물어지는구나!”
“나 때문이 아니다. 하늘이 그대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우하하하하! 오냐, 이놈! 어차피 네놈만 죽이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터!”
찰나였다. 위지천백의 전신에서 무지갯빛에 가까운 밝은 홍광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비키시오!”
독고무령은 일갈을 내지르고 전력을 다해 태천일심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좀 전에 겪었던 공격보다 더 강한 느낌!
절망과 분노를 단 한 번의 공격에 모조리 쏟아내려는 듯하다.
독고무령은 마음을 모두 비웠다. 위지천백에 대한 분노조차 저편에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태천일심을 끌어올린 채 수천제마구겁무의 여덟 번째 춤을 떠올렸다.
천명단상(天明斷想)!
몸 안에서 피어난 빛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다.
손에 들린 검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과 검이 하나가 되고, 의지가 태천일심의 기운과 합해져 모든 것이 하나로 느껴진다.
심신이 하나가 된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위지천백을 가리켰다.
고오오오오!
칠 장가량 떨어진 두 사람 사이의 대기가 묵직한 기음을 흘리며 휘돌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다급히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북리중현과 장소천, 주호성과 우덕청 등 절대고수들은 이어 벌어질 상황을 짐작하고 해쓱하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물러서라!”
“휘말리면 죽는다! 멀찌감치 물러서!”
“젠장! 저게 인간들이야?”
“혹시 합공할지 모르니까 다른 놈들을 감시해!”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홍광과 영롱한 빛이 한가운데에서 정면으로 얽혀 들며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켰다.
쩌저저저적!
십 장 두께의 얼음이 깨어져나가는 것처럼 어둠이 산산이 부서지고, 빛의 회오리가 천공으로 솟구쳤다.
그러다 일순간, 빛이 터져나가며 천둥소리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콰과과과광!
독고무령과 위지천백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두 사람의 발밑은 땅이 모두 뒤집혀 암반이 드러나 있었는데,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암반에 깊이 한 자는 될 법한 고랑이 파였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충격!
안색이 창백해진 독고무령의 입가에 핏기가 보였다.
반면 위지천백은 이를 악문 채 여전히 분노에 찬 표정으로 독고무령만 노려보았다.
극히 미미하지만 독고무령은 자신이 손해를 봤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위지천백은 자신이 이득을 봤다는 걸 알고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크, 독고무령, 그게 네놈의 모든 것이더냐? 그렇다면 네놈은 오늘 내게 죽는다!”
다시 한번 그의 전신에서 홍광이 피어났다.
“회주!”
“무령!”
북리중현과 장소천이 독고무령을 향해 소리쳤다.
진사혁과 진원명, 주호성과 우덕청도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제왕성 쪽의 고수들은 그들이 행여나 독고무령을 돕기 위해 뛰어들까봐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비록 영호진광과 등후양이 무너지고 밀천객이 사라져 절대고수의 수는 부족하지만, 그들의 전력은 여전히 강했다.
인환과 지살객이 한걸음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네놈들이 끼어들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다!”
북리중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네놈들은 우리와 싸워보자!”
주호성과 우덕청도 좋은 생각이라는 듯 나섰다.
“그것도 괜찮겠군! 어차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놈들이 아닌가?”
두당 일만 냥이다. 쓰러뜨려야 받을 수 있는 돈.
그들마저 나서자 장소천과 진사혁, 진원명도 제왕성의 간부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마음이 바뀐 자들은 지금이라도 동쪽으로 가라!”
커다란 진사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제왕성 간부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누가 끼어드는 것을 가장 원치 않는 사람은 독고무령 본인이었다.
“위지천백, 그대와 나의 싸움에는 누구도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말고 다시 한번 겨뤄보자!”
“우후후후, 역시 네놈은 나의 천적이 될 자격이 있는 놈이다, 독고무령! 내 너를 인정해 영광된 죽음을 내리겠다!”
일갈을 내지른 위지천백은 양팔을 쫙 펼쳤다.
마치 상상의 새 가루라가 어둠 속에서 날개를 편 듯하다.
천지를 쓸어버릴 것 같은 날갯짓!
콱!
독고무령은 손에 든 검을 암반에 깊숙이 꽂고 땅을 박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위지천백과의 접전 때 느닷없이 떠오른 환영이 쉼 없이 맴돌고 있었다.
천광멸혼(天光滅魂)의 겁(劫)!
수천제마구겁무의 마지막 춤사위가!
태천무극(太天無極)의 흐름에 따라!
위지천백도 날개를 편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끝을 내자, 독고무령!”
십 장 허공까지 치솟았을 즈음, 독고무령의 손이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원이 커지면서 거대한 손 하나가 선명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컴컴한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떨어지며 가루라의 머리를 덮쳤다.
너무 커서 피할 곳도, 피할 수도 없는 손이었다. 남들은 몰라도 위지천백에게만은 그렇게 느껴졌다.
일순간, 가루라의 날갯짓처럼 펼쳐졌던 홍광이 거대한 손 안에 갇혀 서서히 소멸되었다.
위기를 느낀 위지천백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이런…… 안 돼!”
그러나 거대한 손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홍광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쾅!
단발마의 굉음.
위지천백의 몸뚱이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허공에서 튕겨졌다.
“크억!”
참담한 비명을 내지른 위지천백은 십오륙 장을 날아간 다음에야 겨우 땅에 내려섰다.
안간힘을 다해 중심을 잡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두 다리로 내려서지도 못했을 터였다.
위지천백은 땅에 내려선 뒤로도, 충격의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십여 걸음을 밀려났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다가갔다.
위지천백은 혼몽의 와중에도 등 뒤의 암습을 인지하고 홱 몸을 돌리며 반격을 가했다.
콰직! 콰광!
암습자의 공세와 위지천백의 반격이 거의 동시에 서로의 몸에 작렬했다.
위지천백이 눈을 홉뜬 채 주춤거리며 물러나는데, 그의 왼쪽 가슴에는 신월처럼 휘어진 한 자루 칼이 꽂혀 있었다.
“네, 네놈이 왜……?”
암습자는 이 장가량을 튕겨진 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암습자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암습자가 다름 아닌 밀천객이었던 것이다.
밀천객은 위지천백의 공격에 의해 얼굴 한쪽이 완전히 뜯겨져 있었다. 한데 피는 나지 않고, 하얀 살결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웩!”
밀천객은 한 움큼의 피를 토하고는 비틀거리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때 막위지가 소리쳤다.
“거기 서라! 이놈! 확인할 것이 있으니 거기 서!”
하지만 밀천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렸다.
막위지는 도주하는 밀천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라니까!”
그 사이 땅에 내려선 독고무령은 위지천백을 바라보았다.
밀천객의 신월도는 정확히 위지천백의 심장에 꽂힌 상태였다.
울컥거리며 뿜어지는 핏물.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과 발.
주요 혈맥마저 터져나간 위지천백은 그저 의식만 조금 남아 있는 시신이나 다름없었다.
“위지천백, 이제 그대의 헛된 꿈도 종말이 다가왔구나.”
“크, 크, 크크……. 나는 위지천백, 무림왕……. 남자로 태어나…… 꿈을 꾸었다. 대칸의 꿈을……. 누가 나를 욕할 수 있단 말…….”
“꿈을 꾸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인간…… 가장 더럽고, 사악한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내 아버지처럼! 최소한 내 눈에는, 위지천백, 그대보다 내 아버지가 더 남자답고 인간답다!”
“독고헌……. 이 위지천백이 그 비옥의 꼽추보다 못하다고? 크, 크, 크하하하하! 우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