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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243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45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243화

 

243화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나를 대동까지 보내려 했겠소?”

 

“설마요.”

 

“아니오. 분명히 내 짐작이 맞을 거요, 나쁜 친구. 나를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다니!”

 

“풋.”

 

유하령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어떤 말이든 서슴없이 하는 장소천이 편했다. 그에게는 독고무령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그는 상대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유로웠다.

 

독고무령과 맺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픈 그녀로선, 장소천의 그런 태도와 말투가 많은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다는 걸 알고 그런 것일지 몰랐다. 나름대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이 사람은 자신이 독고무령을 사무치게 좋아한다는 걸 알까?

 

모를지 몰랐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언제 가시는 건가요?”

 

“석양이 지면 출발할 거요. 그래서 더 괘씸하지 뭐요.”

 

“어머, 왜요?”

 

“생각해보시오. 그거야말로 잠도 자지 말고 달려가라는 심보지 뭐겠소?”

 

“호호호, 그렇게 되나요?”

 

“뭐, 사실 고생하는 거야 별 문제가 아니오. 진짜 큰 문제는 며칠 간 유 소저를 볼 수 없다는 거요.”

 

장소천은 혀에 기름을 바른 듯 거침없이 말하고는 유하령을 빤히 바라보았다.

 

추월루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해본 유하령조차 그의 강렬한 눈빛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왜…… 그렇게 보세요?”

 

“유 소저도 내가 보고 싶어질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소?”

 

“그건……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기다려 줄 수 있소?”

 

“기다리는 거야 당연히…….”

 

“갔다 오면 정식으로 청하겠소.”

 

“예?”

 

유하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장소천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거기까지. 더 깊은 이야기는 비밀이오. 대동에 갔다가 죽으면 헛소리만 한 꼴이 되지 않겠소?”

 

“장 공자는 꼭 살아서 돌아오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 것 같소?”

 

“분명히 그럴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회주가 설마 친구를 죽을 곳에 보내겠어요?” 

 

장소천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 친구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친구요.”

 

그때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내 흉을 보고 있었군.”

 

독고무령이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장소천이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왜 친구 흉을 본단 말인가?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네. 안 그렇소, 유 소저?”

 

독고무령이 유하령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유하령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추켜올렸다.

 

“대답하지 않겠어요. 저는 두 분이 다투는 걸 원하지 않거든요.”

 

독고무령이 단정하듯이 말했다.

 

“무언은 인정이라, 흉을 본 것이 맞나 보군.”

 

장소천이 맞받아쳤다.

 

“귀가 막혔나 보군. 언제 유 소저가 인정했단 말인가?”

 

유하령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누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암천사신과 혈왕이라 생각할까?

 

그녀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그저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는 친구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아파하고 있을 뿐이고…….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펑펑 울고 싶었다.

 

‘미안해요, 아버지. 아버지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독고무령이 알려준 곳에서 곱게 적힌 서신을 하나 찾아냈다. 거기에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네 어미는 죽지 않았단다.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 떠났을 뿐……. 미안하구나. 네가 상심할까봐 클 때까지는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아버지를 떠나 도망쳤으니……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했을까.

 

유하령이 유백하를 생각하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자, 장소천이 슬그머니 독고무령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만 가세. 아무래도 자네 때문에 슬픈가 보네.”

 

“왜 나 때문인가?”

 

“자네가 나와 유 소저를 떼어놓으려고 하잖아.”

 

 

 

* * *

 

 

 

장유유는 석실을 둘러보았다.

 

등잔불이 타오르는 석실은 직경이 삼 장 정도 되어 그리 답답하지 않게 느껴졌다.

 

벽에는 온갖 동물이 음각되어 있었고, 동물들 사이사이 무공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모습도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려주시오.”

 

위지성이 나직이 말하며 몸을 돌렸다.

 

석실을 둘러보던 장유유는 고개를 돌려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위지성이 그녀와 그녀의 부모를 찾아온 것은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제왕성을 빠져나가게 해주겠다면서.

 

장유유는 반신반의했지만, 위지성의 눈을 보고는 그를 믿기로 했다. 감정을 최대한 자제한 그의 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아픔이 느껴진 것이다.

 

사실 믿지 않아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곳은 제왕성.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제왕성을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장유유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지성은 그녀와 그녀의 부모를 지하통로로 안내했다.

 

지하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고, 곳곳에 등잔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제법 중요한 장소와 연결된 듯했다.

 

그런데 그 끝에 이르러 지금의 석실이 나온 것이다.

 

“여긴 어디죠?”

 

“내가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요. 다른 사람은 오지 않으니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리시오.”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죠? 내일 날이 밝은 다음에 보내주셔도 되잖아요.”

 

위지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건…… 내일이면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오.”

 

“예? 왜요?”

 

장유유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왜 내일은 제왕성을 나갈 수 없다는 걸까?

 

위지성은 장유유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맑고 큰 눈동자에서 등잔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차마 그 눈에 대고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님과 약속을 했소. 당신을 보내주면 본래의 나로 돌아가겠다고 말이오. 그런데 다행히도 아버님은 내 요구대로 당신을 보내주겠다고 하셨소.”

 

말뜻이 묘하게 들렸다. 그럼 혼인도 하지 않을 사람을 계속 붙잡아 놓을 생각이었단 말인가?

 

“설마 강제로 붙잡아 놓을 생각은 아니었겠죠?”

 

“물론 그런 것은 아니오. 조금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위지성이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장유유는 그런 위지성을 똑바로 바라보고서 물었다.

 

“그런데 왜 영원히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말하시는 거죠?”

 

위지성은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버님은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어서, 자신의 아들이 거부당했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실 분이 아니오. 아마 어떻게든 당신을 붙잡아 놓고 나를 받아들이게끔 하시려고 할 거요.”

 

과연 그게 다일까?

 

장유유가 위지성을 압박했다.

 

“그것만으로는 지금처럼 서두르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 같은데요?”

 

그때 조용히 있던 장이생이 넌지시 물었다.

 

“위지 공자, 혹시 성주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니오?”

 

자존심이 강한 위지천백이 분노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더구나 며칠 동안 제왕성 내성에서 지낸 세 사람이 아닌가. 행여나 정보가 새는 걸 우려해서라도 입을 닫으려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위지성은 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무리 아버님이 화가 나셨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당신들을 죽이려 하시겠소?”

 

하긴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자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여인과 여인의 부모를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미치광이라면 몰라도.

 

더 몰아붙였다가는 위지성의 감정을 강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 장유유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돌렸다.

 

“좋아요. 어쨌든 당신을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그런데 언제쯤 나갈 수 있죠?”

 

위지성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준 장유유가 고맙기만 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시켜 길을 확보해 놓고 돌아오겠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을 눈치 챈 상태다. 장유유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여기서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죠.”

 

 

 

위지성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장유유와 장이생 부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이 독고무령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에 대한 이야기만이 긴장을 털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나자, 그마저도 세 사람의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주지는 못했다.

 

위지성이 돌아온 것은 장유유가 밖으로 나가볼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늦어서 미안하오. 나를 따라오시오.”

 

장유유와 장이생 부부는 위지성을 따라 석실을 나섰다.

 

이십여 장의 지하통로를 통과하자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들어올 때와는 다른 문이었다.

 

끼이익.

 

위지성이 문을 열더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음을 확신했는지 손짓을 보냈다.

 

밖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공력이 얕은 장유유는 사물을 제대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들이 나온 곳이 어떤 건물의 뒷마당이라는 것쯤은 대충 짐작으로도 알 것 같았다.

 

“갑시다.”

 

위지성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장유유와 장이생 부부는 그와 바짝 붙어서 움직였다.

 

그런데 위지성이 담장에 난 월동문을 통과할 때였다.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사마초였다.

 

“공자, 어딜 가시려는 건가?”

 

그가 말함과 동시,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반원을 그리며 둘러섰다.

 

위지성은 두 팔을 벌린 채 장유유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 갈 곳이 있습니다. 비켜주시지요, 장로.”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시게, 공자. 성주께서도 뭐라 하지 않으실 거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

 

위지성은 자신이 꾸민 일이 어긋났음을 알고 이를 악물었다.

 

“제가 심부름을 시킨 사람들이 있는데, 설마 그들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냈네.”

 

역시나 모든 게 틀어진 것 같다. 위지성은 이를 악물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장로, 정녕 비켜주면 안 되겠습니까?”

 

“성주께서 내린 명령이네. 미안하지만 저 사람들은 본성을 벗어날 수 없네.”

 

순간이었다.

 

쩡!

 

위지성이 검을 빼들었다. 사정해도 안 된다면 이제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강하게 나가는 수밖에!

 

“장로가 정녕 무인이라면, 어떤 게 옳은 건지는 아실 겁니다. 아버님께선 이 사람들을 내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지요. 나는 그 약속에 따라 이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마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잘잘못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얼버무리며 말하자, 위지성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며 신랄하게 공격했다.

 

“하하하, 이제 보니 사마 장로도 신의를 똥물에 버린 사람이었군요!”

 

“공자!”

 

“왜요? 가슴에 비수라도 꽂힌 기분입니까? 무사라면 어떤 경우라도 입에서 뱉은 말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지금은 약속이 헌신짝처럼 버려진 상황이지요. 장로께선 그걸 알고도 저를 막고 계시고 말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제 앞에서 신의를 말하지 마십시오!”

 

사마초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걸 왜 내가 모르겠나. 하지만 성주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버님께선 분명히 제 앞에서 이 사람들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한데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신 것 같더군요. 혹시 마음이 바뀔 때까지 몇 년이고 붙잡아 놓으실 거라고는 안 하시던가요?”

 

“그건…….”

 

“아니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저도 귀가 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요. 장로의 가슴에 아직 무사의 도리가 살아있다면,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하아…….”

 

사마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자신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위지천백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모른 척 눈감아주었을 것이었다. 

 

‘무사의 도리, 신의라…….’

 

사마초는 위지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어떤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다.

 

문득 위지성이 전과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전에는 제왕성이라는 거대한 품에 안겨 있던 애송이로만 보였다.

 

그런데 오늘 보니, 둥지를 벗어나기 위해 날갯짓을 하는 어린 매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저들을 내보내주면 성주께서 나를 닦달하실 거네. 어쩌면 목을 칠지도 모르지.”

 

위지성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쿡 찌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만약 아버님이 벌을 내린다면, 그것도 제가 받지요! 그 어떤 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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