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369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69화
369화. 적운혜 (1)
졸졸 흐르는 냇가 위에 있는 구름다리의 난간에 앉아 멍하니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아니 소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숙해 보였다. 그러니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녀의 옆에는 반듯하게 차려입은 이십대의 사내가 서있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거기에 얼굴은 여느 여자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고, 입고 있는 옷은 질이 좋은 비단옷이었다. 허리에는 한눈에 봐도 보검이라 여겨지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그런 것으로 보아 명문가의 자제가 분명했다.
그의 옆에는 머리는 산발을 하고 까칠하니 수염을 기른 채 허름하니 옷을 풀어헤치고 있는 사내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다.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사내는 야수와 같은 눈빛으로 주위를 쓸어보다가 난간 위에 앉아있는 여인을 보고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보고 명문가의 자제로 보이는 사내가 기분 나쁜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상관하지 않고 가볍게 무시했다.
파천일도(破天一刀) 화적성.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호남지역은 적운상이 명성을 크게 떨친 이후로 수많은 고수들이 출현을 했으나 이렇다 하게 이름을 날린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적운상의 명성이 너무나 커서 웬만해서는 알아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적운상이 젊은 고수이다 보니 새로이 이름을 알리려고 하면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파천일도 화적성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법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다. 그의 성문절기인 파천유성도법(破天流星刀法)은 파괴력이 워낙에 강해서 무엇이든지 부숴버렸다.
한번은 절세의 보검을 가진 사람과 비무를 했었는데, 단 일격으로 그 보검과 함께 그의 갈비뼈까지 부숴버렸었다. 그래서 파천일도와 대결을 할 때에는 절대로 그의 칼을 받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를 못마땅한 듯이 보고 있는 명문가의 자제처럼 보이는 사내는 한때 호남칠대세력 중 최강이었던 통천문의 소문주인 혁이태였다. 현재 통천문은 혁무한의 형인 혁강운이 문주로 있었다.
통천문은 무공의 고하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진다. 그것은 문주의 아들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혁이태는 이제 겨우 약관을 넘은 나이로 소문주가 되었다.
이에 혁씨가문의 역대 이래로 무(武)에 관한 재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었고, 호남의 젊은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파천일도 화적성과 함께 순위를 다투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한 여인에게 반해 벌써 십여 일이 넘게 쫓아다니고 있었다.
다리의 난간 위에 마치 선녀처럼 앉아 있는 여인.
이름도 성도 출신도 모르는 그녀에게 두 사람은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너무도 간단하게.
처음의 만남은 이러했다. 파천일도 화적성은 성격이 괄괄해서 싸움을 즐겨 했다. 그래서 이름 좀 있다 하는 고수들을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던 꼭 한 번 겨루고야 말았다.
그날도 화적성은 한 명을 거뜬하게 해치우고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가까운 주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길에서 혁이태를 만난 것이다.
평소부터 혁이태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듣고 있던 화적성이었다. 옥면호검(玉面浩劍) 혁이태.
그는 명문의 자제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는 자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화적성과는 달랐다.
화적성은 부모도 없이 고아로 크며 온갖 고생을 하며 거칠게 세상을 살아왔지만 혁이태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모든 것이 받쳐주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렇잖아도 호승심이 강한 화적성이 그런 혁이태를 그냥 보낼 리가 없었다. 당장에 비무를 청했고, 싫다는 혁이태의 화를 살살 돋워서 끝내 한판 붙게 되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에서 검과 도를 빼 들고 대치를 하자 모두 흥미를 느끼며 모여들었다. 두 사람 모두 명성이 제법 알려져 있던 터라 언제 또 이런 구경을 하겠냐 싶었던 것이다.
팽팽한 기세싸움이 먼저 시작되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두 사람에게서 느껴졌다. 호적수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두 사람이 그랬다.
그 팽팽한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그러나 무기를 채 휘두르기도 전에 멈춰야 했다. 웬 미녀가 두 사람 사이를 태연하게 걸어서 지나쳐갔기 때문이다.
팽배한 기세싸움이 극에 달한 상황인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화적성과 혁이태를 슥 한 번씩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길을 막고 뭐하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아연했다. 세상에 어찌 저리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아름답기만 했다면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가 있었다. 물망초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그 영혼의 맑음과 깨끗함에 두 사람은 무기를 들고 있는 자신들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무인이 무공을 겨루는 것을 한심하다고 느끼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고, 이에 허무감이 들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 옆에 있는 탁자에 앉아서 밥을 먹었고, 객잔에서 잠을 자면 옆방에 묵었다. 그녀가 어디를 가건 계속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한마디도 말을 걸지 못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과 사귀기를 염원하는 여자들은 줄을 서있었다. 그 중에는 분명 그녀보다 뛰어난 미녀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문이 대단하거나 학식이 대단한 여인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가 자색을 겸비한 빼어난 여인들이었다. 그런 여인들을 대할 때는 이렇게까지 조심스럽지 않았었다. 예쁘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 뛰기는 했어도 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이 여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는 것이 다였다.
신기한 것은 십여 일이나 두 사람이 따라다녔는데도 그녀는 단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기이한 동행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물이 맑네요. 내가 있던 곳도 저렇게 물이 맑았어요.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어서 거기서 매일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그랬었어요.”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연 것은.
이에 화적성과 혁이태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그녀는 여전히 흘러가는 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나 필시 지상낙원일 것 같구려. 그곳에 소저가 있었으니 말이오.”
다분히 아부가 섞인 말이었다. 혁이태는 그렇게 말해놓고 크게 놀랐다. 자신이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요?”
화적성이 그동안 궁금해 하던 것을 간신히 물었다. 성격이 거칠어서 누군가에게 이름을 묻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으나 지금 그녀에게 묻는 이 말을 하기까지는 십여 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적운혜예요.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저를 혜아라고 불러요.”
“그럼 나도 혜아라고 부르겠소.”
“당치 않소! 당신이 뭔데 혜아 소저를 그렇게 부른단 말이오?”
혁이태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화적성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는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리 부르는 거냐? 피차일반이니 조용히 넘어가자.”
“뭐야?”
“그만들 두세요. 당신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건 그건 당신들 자유지만 내 앞에서는 혜아라고 부르지 마세요.”
“소저, 그건…….”
혁이태가 당황해하고 있는데 적운혜가 난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나는 이제 가야겠어요.”
“어디로 가는 거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 있기가 싫네요.”
“함께 가겠소.”
“나도 함께 가겠소.”
적운혜는 두 사람이 따라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적운혜는 앞에 보이는 허름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장사가 잘 안 되는지 주점 안은 한산했다. 점원이 주문을 받으려고 왔다가 적운혜의 미모를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혁이태와 화적성의 살벌한 눈초리를 의식하고는 흠칫하며 물었다.
“뭐, 뭘 드릴까요?”
“오리고기하고 화주를 한 병 줘요.”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점원이 대답을 하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더 있다가는 혁이태와 화적성에 의해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마십시다.”
혁이태가 용기를 내서 적운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화적성이 말없이 그 옆에 털썩 앉았다. 혁이태는 그런 그가 못마땅했지만 혹시라도 적운혜의 신경을 거스를까 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호오…… 제법 반반하구나.”
어디에선가 들려온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에 혁이태와 화적성이 그쪽을 봤다. 그러자 인상이 좋지 않은 삐쩍 마른 노인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커다란 대도를 등에 찬 뚱뚱한 체구의 중년사내 두 명이 앉아있었다.
혁이태는 그들이 누군지 선뜻 알아보지 못했으나 화적성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듣는 소문이 많아서 그들을 금방 알아봤다.
‘반선도귀(半仙刀鬼) 두육택!’
성격이 호전적이어서 싸움을 즐기는 화적성이었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두육택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두육택은 사람의 허리를 훌쩍 넘게 오는 커다란 도를 귀신 같이 잘 썼다. 하지만 하는 짓이 악랄했다. 강도짓은 흔하게 하는 일이었고, 아녀자들을 겁탈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양옆에 앉아있는 뚱뚱한 중년사내들은 제자인 귀도(鬼刀)와 살도(殺刀)가 확실했다.
“파리 떼는 쫓아버리고, 꽃을 꺾어서 내게 가져오너라.”
두육택이 귀도와 살도에게 말하자 두 사람이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보고 화적성이 잔뜩 긴장하며 도파에 손을 얹고 언제라도 뽑을 준비를 했다.
뒤늦게 두육택 일행을 알아본 혁이태는 일단 말로 해결할 생각을 했다. 그들하고 붙어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했더니 명성이 자자한 구 선배님이었군요.”
나쁜 쪽으로 명성이 자자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혁이태가 알아주니 두육택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통천문의 소가주인 혁이태라고 합니다.”
“호오…… 후기지수들 중에서 제법 잘나간다는 옥면호검이 너였구나.”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혁이태는 말이 좀 통할 것 같자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두육택의 말에 그는 망연자실해졌다.
“좋다. 네 아비의 체면을 봐서 너는 그냥 보내주겠다. 가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기 있는 적 소저는 제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클클. 네 얕은 재주로 가능하겠느냐?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선배님께서 한발 양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가 오늘 크게 한턱 내겠습니다.”
“좋다. 그럼 저 계집이 내게 술을 한 잔 따른다면 그렇게 하마.”
두육택의 말에 혁이태가 슬쩍 적운혜를 봤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고개를 돌려 창밖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