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357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57화
357화. 악안적가 (1)
적가장에서 연회가 벌어졌다. 참여한 사람들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차려진 요리는 상다리가 휠 정도였고, 내온 술은 천하의 명주이다 보니 자연히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적운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황옥정이었다.
적운상은 백수연 때문에 마지못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적문후가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 그렇게 과민반응이 나올 정도로 껄끄러웠다.
그리고 황옥정은 적운상이 껄끄러웠다.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들춰지면 적문후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 두려움이 일었다.
적문후의 성격상 집에서 쫓아낼지도 몰랐다. 그러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당연히 앉아있는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적운상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면서 감시를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적운상은 묵묵히 앉아서 술만 마실 뿐,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간 어찌 지냈느냐?”
“잘 지냈습니다.”
적운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적문후는 미소를 지었다.
“한 잔 하거라.”
적문후가 술을 따라주자 적운상이 잔을 들었다. 그러면서 힐끗 적문후를 봤다.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있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리자 적문후가 다시 한 잔을 따라줬다.
“이 애비를 많이 원망했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부님과 사형제들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허, 그랬더냐? 당신은 가서 상영이를 좀 불러 오시오.”
적문후가 하는 말에 황옥정이 잠시 머뭇거렸다. 자리를 뜬 사이에 적운상이 적문후에게 무슨 말을 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가서 상영이를 불러 오라는데 뭘 하는 거요? 제 형이 왔으니 얼굴을 보여야 할 것 아니오?”
“알았어요.”
그제야 마지못해서 황옥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적운상을 힐끔 한 번 보고는 적상영을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운상아, 나는 정말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네 어미에게 정말 면목이 없었는데…….”
“아버님, 이제 그만하세요. 아버님답지 않게 왜 자꾸 그러세요.”
옆에 앉아있던 적교희가 위로하며 말하자 적문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나이가 드니 자꾸 감상에 젖는구나. 그나저나 교희 너는 또 한 번 그랬다가는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
“호호. 그래도 제가 오라버니를 찾아왔잖아요.”
“그래도. 여자 혼자 몸으로 돌아다니기에 강호가 얼마나 험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알아요. 아무 탈 없이 돌아왔으니까 그만 혼내세요.”
적교희가 매달려서 애교를 부리자 적문후가 허탈하니 웃음을 터트렸다. 혼내려고 해도 늘 이런 식이니 따끔하게 혼낸 적이 없었다. 적교희의 성격이 그리 나대고 겁이 없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때 황옥정이 적상영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자 적문후가 미소를 지으면서 적상영을 불렀다.
“이리로 오너라.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 여기는 네 형이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있었구나.”
적상영은 적운상을 잠시 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십여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형 노릇할 생각은 마시오.”
“네 이놈! 형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버지도 그렇잖아요.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와서 무슨 아들입니까? 나는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이 녀석이 정말!”
적문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적상영의 뺨을 때렸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제야 적문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상, 상영아…….”
“괜찮습니다. 이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듣자니 무공이 대단하다던데 한 번 겨뤄봅시다.”
“상영아!”
적문후가 다시 발끈해서 소리치는데 적운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잖아도 무료했었는데 잠시 노는 것도 괜찮겠군.”
“그럴 실력이 되었으면 좋겠소.”
적상영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사실 적상영도 적운상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적상영은 월영매화문의 다음 대 장문인으로 지목이 될 만큼 무공이 뛰어났다. 게다가 주위에서는 적상영의 배경 때문에 모두 그의 콧대를 높여주기만 했다.
해룡표국의 아들인 한태덕과 싸운 것도 그래서였다. 주위 사람들이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니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데, 본인은 그러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적운상이 천하제일의 고수니 뭐니 하지만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고, 고수다운 기세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허명이거나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적상영은 적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회의 분위기를 보니 모두 적운상을 대단하게 보며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고수들이나 보타문에서 온 보해신니조차 그랬다.
“상영이 너…….”
적문후가 적상영을 말리려고 하자 백수연이 조용히 제지를 했다.
“괜찮아요. 아버님. 남자들은 저러면서 친해지잖아요.”
백수연이 훈훈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너무나 예뻤다. 게다가 스스럼없이 아버님이라고 부르니 그게 그렇게 듣기가 좋았다.
“적 동생의 무공이 뛰어나니 봐주면서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험, 그도 그렇구나.”
적운상과 적상영이 대청 중앙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흥미를 갖고 그들을 봤다. 적운상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모두 알고 있었으니, 적상영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모두의 관심사였다.
“무기를 뽑아.”
“당신은 권장법(拳掌法)으로 할 거요?”
“아니, 이걸로 하지.”
적운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중지를 엄지에 걸어서 한 번 튕겼다. 그걸 본 적상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요?”
“아니었나?”
챙!
적상영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곧바로 적운상을 향해 찔러갔다. 정당한 비무인 만큼 겨루기 전에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적상영은 화가 나서 그런 것을 싹 무시했다.
적운상은 적상영이 찔러오는 검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몸을 살짝 틀어서 피했다. 그러자 오른쪽 어깨를 찔러오던 적상영의 검이 변화를 보이며 목을 그으려고 했다. 하지만 적운상이 적상영의 검신에 대고 엄지에 걸어놓았던 중지를 튕기자 검이 출렁이면서 휘었다.
땅!
“헛!”
다급하니 검을 회수한 적상영이 다시 검을 찔러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운상은 슬쩍 피한 후에 중지로 검신을 두드렸다. 몇 번이나 그렇게 검이 튕겨지자 적상영은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적운상의 하체를 노리고 크게 원을 그리면서 검을 쓸어갔다.
월영매화문의 절기 중 하나인 추풍낙화(秋風落花)라는 초식이었다. 마치 바람에 날리는 매화처럼 한 번에 확 몰아치는 초식이었는데 적상영은 그 초식을 완벽하게 펼칠 수가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그 초식을 보고 크게 감탄을 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에 적절한 힘의 안배, 그리고 전력으로 쏟아 부은 내공의 위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이익!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며 적운상의 다리가 잘려나가려는 찰나였다. 적운상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적상영의 바로 옆에 나타나서 그의 이마에 중지를 튕겼다.
그걸 보고 남궁세가에서 온 남궁방, 남궁호와 보타문에서 온 보해신니가 눈을 부릅떴다. 그들도 나름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건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이동을 했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따악!
“크악!”
깜짝 놀란 적상영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마의 아픔보다는 적운상이 갑자기 옆에 나타난 것에 더 놀란 것이다.
“한심하군. 한 번 겨뤄보자고 하기에 기본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엉망이야. 상대의 실력은 전혀 파악하지도 못하고 말 몇 마디에 흥분하지를 않나 앞뒤 재지 않고 절초를 쓰지를 않나, 검법에 진솔함이 없어. 허영만 가득 차서 멋이나 부리려는 걸로밖에 안 보여.”
“다, 닥치시오! 그러는 그대의 검은 얼마나 진실하기에 그러는 거요? 당장에 검을 뽑아서 보여주시오.”
적상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러자 적운상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린애로군. 내 검의 무게를 네가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인이 검을 뽑았을 때는 사문과 사부의 명예는 물론이고 자신의 명예와 그동안 갈고닦은 노력, 그리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검 한 번 잘못 휘두르면 그 책임을 부모나 사문에서 져야 할 때가 있다. 이번의 네 경우처럼. 그러니 검을 뽑을 때는 나 하나의 목숨이 아니라 사부와 사형제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런데 네 검에는 그런 것이 없어. 가볍다 못해 한심하다.”
적운상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하지만 적상영은 승복하지 않았다. 말하는 상대가 적운상이었기 때문이다.
“닥치시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요?”
“방금 말하지 않았나? 검의 무게를 안다고.”
“그럼 어디 한 번 보여 보란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검의 무게는 말로만 주절주절 떠드는 거란 말이오?”
적운상은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이 적상영을 보다가 가만히 백운검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백운검을 뽑기 시작했다.
스릉……
백운검이 조금씩 뽑혀 나옴에 따라 주위의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묵직해졌다. 적상영은 마치 커다란 바위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에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서 버텼다. 주위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바짝 쪼이는 압도감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백운검이 모두 뽑혔고, 천천히 적상영에게 겨눠졌다. 적상영은 목이 탔다. 백운검이 뽑히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벌써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다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 내가 떨고 있는 건가?’
그랬다. 적상영은 극심한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인해 다리가 떨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키며 어떻게든 떨림을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적운상의 나직하면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와라.”
적상영은 들고 있던 검을 꽉 움켜잡았다. 뒤늦게 손이 심하게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손을 거기에 겹쳐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떨림은 멈추지가 않았다.
‘주…… 죽는다!’
적운상과 눈이 마주치자 적상영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만이 떠올랐다. 등골이 찌릿해지면서 두려움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도 호흡이 가빠왔다. 심력의 소모가 그만큼 큰 것이다.
‘아니다. 아니야. 저 사람은 내 형이다. 나를 죽일 리가 없어. 저건 허세다. 아버지도 있고 사부님도 있는데 나를 죽일 리가 없어.’
적상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내공을 몸 안에서 돌렸다. 하지만 적운상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뭐하나? 보이라고 해서 보였는데. 너를 죽이면 네 사부와 사형제들이 덤벼들 테지. 그럼 역시 그들도 벨 것이다. 네 사문에서 누가 오던 마찬가지다. 저기 있는 힘없는 늙은이가 막아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돈밖에 모르는 늙은이니까.”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적상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내공으로 버티려다가 기혈이 역류하고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인해 구토가 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적운상이 이런 식으로 적상영을 누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조금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오히려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월영매화문 문주의 생각이 그러했다.
그는 적상영의 오만함이 언젠가는 크게 한 번 사고를 칠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누누이 그걸 두고 타일렀지만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하니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적운상이 이런 방법으로나마 깨우치게 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너 정도 실력이 되는 자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네 오만함과 가벼움을 받쳐주기에는 실력이 턱없이 부족해. 나는 그 정도 실력이었을 때는 두려워서 검도 뽑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적운상이 백운검을 집어넣으면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는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저로 인해 흥이 깨졌군요. 취해서 실수를 한 것 같으니 먼저 가겠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적운상을 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