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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165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165화

 

  똑같은 중상이었지만 그 경지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소천악은 순간적으로 운기를 해 내상을 완화시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구백천에게 말했다.

 

  "제가 반초에 우세를 점했군요."

 

  "분하다, 만겁마황 사부님도 연성하지 못했던 천마군림을 연성한 나도 이길 수 없다니. 과연 혈검의 신화는 영원한 것인가……."

 

  감탄식을 하는 구백천을 바라보면 소천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영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혈검구식이 천하제일 초식이라는 법도 없죠. 세상에는 은자들이 많고 또 다른 혈검신마들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세상을 얻는다는 거 골치 아픈 일 아닙니까?"

 

  "음……."

 

  조용히 탄식을 터뜨리는 구백천의 눈에는 진한 실망감이 스며나왔다. 천하제일고수라 자부하던 그의 자존심이 일시에 무너지자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듯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소천악이 그런 그의 내심을 짐작하듯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혈교주님."

 

  "내가 졌다. 패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니 죽일 테면 죽여라."

 

  이미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 혈교주의 표정에는 참담함이 가득 감돌았다.

 

  천하정복을 노리고 수십 년간 온갖 고통을 인내해 왔던 것이 한순간에 헛수고로 돌아가자 그의 마음은 곧 좌절감이 감돌며 모든 생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소천악은 고된 수련기간을 통해 어느 정도 혈교주의 마음을 이해했다.

 

  "죽이긴 왜 죽입니까? 제가 아까 한 말을 잘 기억해 보십시오."

 

  "말해라."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혈교주의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교주님이 없어진다고 혈교가 없어질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분명히 우리 혈교는 다시 재기할 것이다. 그때 너는 다시 복수의 칼날을 받아야 할 것이야."

 

  "그것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혈교를 없애지 마시고 강북무림에 터전을 마련하십시오. 단 강호정복이니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솔직히 강호정복해서 뭐 하겠습니까? 만날 반항하는 놈들 뒤치다꺼리하다 보면 골치 아파서 하룻밤도 편안히 자지도 못할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혈교주님을 노리고 수많은 암살단들이 정파연합에서 나타날 것이고 혈교주님은 마음 편하게 식사 한 번 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것은 뻔합니다.

 

  "

 

  "음……."

 

  맞는 말에 혈교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천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차라리 강북무림을 혈교의 영역으로 인정해 드릴 테니 거기서 기반을 잡고 사십시오. 그게 어떻습니까?"

 

  "강북무림을 준다고? 그럼 아까 한 말이 사실이란 거냐?"

 

  "물론 사실이죠. 단 강북무림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영향권은 행사하시되 모든 문파들과 정파연합 이런 데와는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단 혈교도 중원에서 무슨 표국이나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가 조치를 취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강북무림에 만족하라, 이 말 아닌가?"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지금 이 땅에서 혈교는 강북무림은커녕 교의 존속마저도 위험한 처지입니다. 또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백 년 이백 년 그 수많은 세월을 고통 속에서 지내려 하십니까?"

 

  "커험……."

 

  현실에 딱 맞는 말을 하는 소천악에게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던 구백천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제 제안이."

 

  "네가 한 말을 지금 약속할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저는 사내대장부입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가만히 소천악을 바라보던 구백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소천악이 결코 자신이나 혈교가 두려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입장에서 자신이 죽는다면 혈교는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어 또다시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이 또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닥쳐올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백 년 동안 싸울 힘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졌으면 앞으로는 이백 년이 아니라 삼백 년이 걸려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는 능히 짐작하고 있었다.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게."

 

  "얼마든지 드리죠. 단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싸움 소리가 갑자기 사라져 사람들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올라올지 모르니 그 점을 유념해 주세요."

 

  "알겠네."

 

  혈교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천악의 제안은 밑지는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자 주저없이 말했다.

 

  "좋네, 자네의 제안을 수락하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네는 천하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는 천하에 대해서 관심도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혈교가 강북무림을 장악하고 정파연합은 강남무림에 자리 잡습니다. 마교는 십만대산 주위로부터 오천여 리를 영향권으로 줄 생각입니다."

 

  "아니 그러면 폭풍문이 있을 자리가 없지 않은가?"

 

  "폭풍문은 그냥 폭풍문입니다. 저는 폭풍문을 어떤 패권 세력이라기보다도 힘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힘을 추구한다… 그거 멋진 생각이군."

 

  어느덧 소천악의 패기에 호감을 느낀 혈교주가 다소 호의적으로 말하자 소천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폭풍문은 무슨 패권을 장악하자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상단, 온가상단이나 표국 이런 것을 하면서 문파 무인들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무공수련에 전념하여 한마디로 말해서 무림의 보루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무림을 군림하며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군림은 무슨 군림입니까? 그냥 남아 있는다는 거죠."

 

  "거참, 재미있는 생각이구먼. 나도 혈교라는 테두리가 없다면 폭풍문에 들어가서 한번 웅심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이야."

 

  "언제든지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좋네, 자네의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락하겠네."

 

  빙긋 웃으며 구백천이 손을 내밀었다. 소천악은 전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아가며 따뜻한 손의 체온을 교환했다.

 

 

 

  잠시 후 산을 내려오는 두 사람이었다.

 

  이미 산 밑에는 폭풍문과 마교 그리고 혈교의 모든 고수들이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히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혈교주님, 이제부터 잘해야 합니다."

 

  "패자는 유구무언일세. 알아서 하게나."

 

  체념한 듯 말하는 구백천의 모습에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은 채 소천악이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두 사람 모두 멀쩡하게 걸어나오자 모여든 군웅들이 당혹감을 보일 즈음 소천악이 구정학 마교주에게 말했다.

 

  "구 교주님, 잠시 이리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지."

 

  안 그래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혹감을 드러내던 구정학이 얼른 대답하며 몸을 날렸다. 마교주답게 그의 신법은 허공을 직선으로 쭉 가르며 바로 소천악의 앞에 내려섰다.

 

  "잠시 이리로 오시지요."

 

  소천악은 구정학을 이끌고 으슥한 곳에 들어가 내공으로 소리가 새지 않게 막을 친 채 사정 이야기를 전했다. 처음엔 붉으락푸르락 노화를 드러내던 구정학은 차츰 소천악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천하를 나누자는 이야기군."

 

  "그렇지요. 힘은 균형을 이뤄야 썩지 않는 법이지요. 한쪽이 창궐하면 다른 쪽은 피를 흘려야 합니다. 차라리 균형을 가지면 이런 싸움은 줄어들지요."

 

  "허어, 그거 참."

 

  난처한 듯 고개를 젓는 구정학에게 소천악은 결정타를 날렸다.

 

  "제 말대로라면 마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천하삼세로 자리합니다. 물론 독패는 아니지만 사실 독패해 봐야 반항하는 무인들을 상대하느라 옷에 피 마를 날이 없을 겁니다."

 

  "으음, 그야 그렇지."

 

  "그대로 하시지요. 제가 보기엔 마교에 손해나는 일이 아닙니다. 설마 제가 사돈인 마교에게 해악이 되는 일이야 하겠습니까?"

 

  "사돈이라. 으하하하! 유쾌한 말이로군.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승낙하는 구정학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무림독패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십만대산 근처 땅을 지배하고픈 소박한 마음이 마교의 목표였다. 그런데 소천악의 제안은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준다고 하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거절은커녕 반가운 제안이었다. 소천악이 구정학 마교주를 설득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바로 평화를 선언하자 계속되는 죽음에 신물이 나던 폭풍문 마교 그리고 혈교의 고수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후 정파연합에 연락을 취해 천하사패의 수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정파연합을 제외한 세 개 세력의 입장을 설명하자 정파연합 수뇌부의 술렁거림이 시작됐다. 먼저 제갈세가의 제갈상린 가주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천하를 나누자니요.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내린다는 겁니까?"

 

  "정파연합에서 거부한다면 우리 폭풍문과 마교 그리고 혈교는 공동의 적으로 당신들을 정하고 공격할 겁니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우리 폭풍문은 단지 광동성에서만 움직일 겁니다."

 

  싸늘한 소천악의 대꾸에 제갈상린 가주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양보하겠다는 말에 더 이상 우겨봐야 강호에 욕심만 부린다는 소문을 줄 뿐이란 걸 알았다. 혈교 하나만 하더라도 도무지 승산이 없는데 마교에 폭풍문까지 합공하면 정파연합의 파멸은 불을 보듯 뻔했다.

 

  위협적인 소천악의 말에 현유자 무당 장문인 등 정파 수뇌부가 거세게 반발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걸 그들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분한 김에 한소리 마지막으로 외치는 가냘픈 몸부림이었다.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던 혜연 정파연합 맹주가 조용히 말했다.

 

  "소 문주님의 말대로 하시는 게 좋을 듯하오."

 

  "맹주님!"

 

  "자자,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우리 정파연합도 이 협약에 동의합시다. 막말로 거부한다면 우리 정파의 명맥은 바로 끊어질 것이오. 아미타불."

 

  자조 어린 혜연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맹주의 말이 나오자 정파 수뇌부는 마지못해 협상을 타결지었다.

 

  강북무림은 장강을 기준으로 해 혈교가 장악하고, 강남무림은 정파연합이, 십만대산을 중심으로 사방 오천여 리는 마교의 영역으로 결정지었다. 약속대로 폭풍문은 광동성 하나만을 영역으로 받았을 뿐이다.

 

  분기를 누르며 의자에서 일어서는 정파연합의 수뇌부 중 현유자 무당파 장문인에게 소천악이 말을 건넸다.

 

  "현유자 장문인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요번에 강호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혈검신마 누명사건에 대해 들을 것이 있으니 며칠 내로 무당파를 방문하겠습니다."

 

  "아니 그럼 소 문주가 그 소문을 낸 주인공이시오?"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리지요."

 

  "음! 좋소이다. 기다리지요."

 

  승낙을 들은 소천악의 눈길이 바로 제갈상린 가주에게 향하며 말했다.

 

  "기왕이면 제갈상린 가주님도 함께 계시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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