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5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54화
자신만만한 소천악의 대답에 힘이 난 주혜미가 힘겹게 말했다.
"정파연합을 도와주세요. 소녀를 돌봐준 소림사를 생각해서라도요."
"으음! 역시 그 문제는 어려운 일이라."
슬쩍 회피하려는 소천악이었다. 사실 쉽게 승낙할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주혜미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소녀는 그 부탁만 들어주시면 무엇이든지 당신의 뜻을 평생 따르며 살 겁니다. 저로 하여금 은혜를 저버리는 짐승을 만들지 말아주세요."
"으음, 잠시 생각을 좀 해보겠소."
소천악은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정파연합이 혈교에 무너지면 힘겨운 싸움이 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사실 폭풍문의 수뇌들이 정파연합이 무너진 후 혈교와의 최후의 결전에 이기기만 한다면 강호독패라는 전무후무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된 걸 모르지 않았다.
소천악은 무림독패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폭풍문의 개파도 일단 세력을 모아야 안전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아주 단순한 결과였다.
그가 겪은 강호는 정파나 사파가 독패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게 당연한 것이 사파가 득세하면 정파를 핍박할 건 분명했고 그에 반발한 정파의 저항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있을 리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답은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면 강호를 독패하려는 흉심을 품은 마두란 소리 듣기 딱 좋은 현실이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갔다.
거기에는 주혜미의 부탁이 조금은 작용했다는 걸 심정적으로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결정을 내리자 바로 말하는 소천악이다.
"알겠소. 일단 당신의 의견을 수용하는 쪽으로 노력해 보리다. 단 모든 수뇌부 특히 우리 폭풍문을 사실상 주도하는 심자앙 군사의 의견이 반대라면 나도 어쩔 수 없다오."
"그 정도라면 소녀도 만족합니다."
더 이상 강권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나올 걸 짐작한 주혜미도 한발 뒤로 물러섰다. 흐뭇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천악이 넌지시 말했다.
"좌우간 이번 혈교겁난만 끝나면 우리 조용한 산속에 가서 평화로운 세월을 보냅시다."
"저야 하늘 같은 낭군님 뜻대로 따르지요."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주혜미의 목소리 어디에도 자미혈성의 그 놀라운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둘 다 몰랐지만 이렇게 된 건 다 혈천신공의 위력이었다.
자미혈성의 음기를 제압한 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혈천신공의 놀라운 효과였다. 아무리 자미혈성의 요기라 해도 인간의 근본적인 힘인 잠재력마저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혜연 대사의 마지막 안배였던 게 삽시간에 수포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그는 만약 폭풍문이 혈교에 이어 무림정복의 야욕을 불태울 걸 우려해 문주인 소천악의 정기를 고갈시키려는 고육지책마저 썼다.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통한의 탄식을 토할 일이었다. 비록 주혜미가 자미혈성의 정기를 받았다고는 하나 숫처녀의 순결을 바친 후라 이미 마음은 혜연 대사보다는 소천악에게 기울어져 갔다.
영특한 그녀는 자신을 받아들이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소천악을 보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풀어줄 남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두 사람은 다시 불타는 눈길을 마주치며 조용히 서로에게 다가섰다. 아무도 말릴 사람도 없는 정열의 시간이 또다시 재점화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주혜미의 방을 나온 소천악은 나른한 피로감 속에 이모저모를 판단하려 노력했다.
대부분의 폭풍문 사람들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가급적이면 정파가 이겨주기를 바랐다. 정파가 이긴다면 한결 전력이 약해진 정파를 향해 큰소리칠 수 있는 폭풍문의 현 전력이었다.
사실 정파연합이란 위기상황에 직면해 급조된 것일 뿐 혈교대란이 지나가면 곧 각 정파끼리 이합집산할 건 뻔했다.
그런 정파를 상대로 큰소리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집마부와 사존맹의 모든 무인들을 흡수하고 낭인무사와 살수집단을 통합한 폭풍문의 전력은 실로 막강했다.
당연히 단일 문파로는 거의 천년마교와 자웅을 겨뤄볼 만한 세력이었다. 물론 절정고수 수에서는 많이 모자랐지만 일반 고수의 숫자에 비해서는 일류 이상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 같은 생각은 심자앙 군사 등 수뇌부도 다르지 않았다. 소천악도 처음에는 귀찮은 마음에 수뇌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고 그저 탁천웅과 편안하게 있을 생각만 했다. 어지러운 무림 정세에 끼어든 것에 그다지 달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강호에 몸을 담은 이상 못 본 척 넘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참가한 마음은 별로 편하지는 않았다.
소천악은 늦은 밤 홀로 조용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릴 때 자신이 혈검신마를 만나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한 꿈만 같은 세월을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 봤다.
어릴 때 자신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쫓겨 다녔다.
그 후 혈검신마를 만나 비록 고된 무공수련을 했지만 강한 무공을 배운 이후로는 그 누구에게도 힘들지 않은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이 들었다.
소천악은 다시 한 번 서찰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마침내 그가 심자앙 군사를 부른 건 아침 해가 밝은 지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심자앙 군사와 자리를 마주한 소천악이 자신의 내심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심 군사님,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우리 폭풍문을 위해서 결코 좋은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무섭게 나오는 소천악의 말에 심자앙은 긴장하며 말을 받았다.
"일단 말씀을 해보십시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오만 지금 현재 정세가 정파 쪽으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오?"
"예, 그렇다고 합니다. 혈교의 숨겨진 전력이 상상외로 막강하여 소림사 등 정파 무림이 기를 쓰고 막고 있으나 조금씩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혈교에서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소?"
"혈교에서는 우리 폭풍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바라보고 어부지리를 노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장담하는 소천악이다.
"그럼 그놈들이 바보요. 자신의 전력을 다해서 정파와 싸우고 힘이 탈진되면 우리에게 당할 것이 뻔한데."
"혈교를 그렇게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히 혈교에서는 전력으로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자앙의 날카로운 분석에 소천악이 바로 반문했다.
"그럼 숨겨진 전력이 있다는 게 군사님의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막강한 배후세력이 아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대한 근거가 있습니까?"
"우선 들어오는 정보에 따르면 혈교인들이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첫 증거입니다. 만약에 우리 폭풍문을 의식한다면 저들은 저렇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빨리 정파를 소멸시키고 우리와 일전을 치를 준비를 할 텐데 전혀 그럴 낌새가 없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소천악은 고심에 빠졌다.
"현 우리 폭풍문 전력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지금 나타난 혈교 전력이 전부라면 충분히 격파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배후의 세력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심 군사님도 참 고심이 많겠소."
"허허! 남자로 태어나 책사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다는 것, 그거 하나로도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참 인생 고달프게 사십니다. 편하게 사실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이렇게 사십니까?"
넌지시 속마음을 떠보는 소천악의 말에 미소로 답하는 심자앙이다.
"남자란 야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망이요, 저도 그거 있지요."
"문주님의 야망은 보통 사람들과 워낙 동떨어진 것이라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간접적으로 힐난하는 심자앙의 말에 머쓱한 듯 소천악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 한 가지 제가 제안을 해도 될까요?"
"예, 말씀하십시오."
"그전에 심 군사님이 저를 말씀하실 때 무림의 구성이 되라고 하셨죠?"
"그랬죠. 무림의 구성이 되어 최강문파의 문주로 모시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진심을 말하는 심자앙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그게 그의 꿈이었다. 최강문파의 군사! 그 자리는 머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학자들의 꿈이었다.
"심 책사님, 제가 생각한 것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난 말이오, 기왕 벌이는 판이면 뒤에서 눈치 보다가 어부지리를 취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요. 화끈하게 해봅시다. 힘껏 해보다 안 되면 말고."
씩 웃으며 말하는 소천악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보였다. 심자앙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미 그는 소천악의 입장에 대해 대충 짐작한 처지였다. 약간 속이야 상했지만 어차피 이 길이 맞는다는 건 그도 인정했다.
더욱이 문주를 보필하는 군사란 지위는 가급적이면 문주편에 서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지한 그였다. 당연히 그의 대답은 소천악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차피 제 계책대로 한다면 나중에 원망은 분명히 들을 테니까요."
"맞소이다. 기왕 하려면 화끈하게 다 벗고 주는 겁니다."
"하하. 역시 문주님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조금은 짐작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이럴 때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계책이 있으니 가져오지요."
"역시 심 군사님은."
감탄하는 소천악의 엄지손이 높이 치솟는 걸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던 심자앙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이걸 보시지요. 제 나름대로 만들어놓은 병법입니다."
"고맙소이다, 심 군사님"
서둘러 펼쳐보는 소천악의 눈은 갈수록 광채를 뿜어냈다.
<가마솥의 장작을 치우는 책략이 먼저입니다. 혈교의 무인들을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하여 각자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겁니다.
이 계략은 적의 힘을 분산시켜 각개격파하는 게 목적이지요. 홀로 고립된 적은 기습을 당하면 사기가 극도로 떨어지는 틈을 타 모조리 쓸어버리는 거지요. 이 계략은 절대 명심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입니다. 되도록 항복을 유도해 발악하는 적의 예봉을 꺾어야 합니다.>
<물을 휘둘러서 고기를 찾아내는 계략을 써야 합니다. 이 책략은 적의 내부와 지휘본부를 혼란시켜 전력을 약화시킨 다음 아군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세를 이끌게 된다는 겁니다. 적진에 기습을 반복해 적들로 하여금 정신 차릴 틈을 주면 안 되지요.>
<'문을 닫아버리고 도적을 잡는다.' 얼핏 보면 모순된 책략 같지만 힘이 약한 적은 포위해서 섬멸하라는 겁니다. 상황에 따라 강하게 또는 약하게 가려서 판단하여 실행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상대의 병력이 후에 큰 화근이 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는 거지요. 요컨대 상대가 이쪽보다 약할 때에는 인정사정없이 철저하게 섬멸하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