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407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407화
느릿하게 움직인 청산자의 시선이 장천운의 손끝에 머물렀다.
“원시천존…….”
나직한 도호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한마디에 그의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피바람이 휩쓸고 간 천지사방에서 온통 피 비린내가 가득한데.
“저승에 가시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찾아갈 거요. 저승길을 가면서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오.”
장천운의 손끝에서 밝은 빛이 뿜어졌다.
그가 손가락을 구부려 튕기자, 구슬처럼 뭉친 빛이 한줄기 선으로 뻗어나가서 청산자의 이마를 관통했다.
청산자의 이마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아마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장천운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혼이 떠나간 청산자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천하를 암중에서 지배했던 천외의 절대자조차 이승을 떠난 이후의 모습은 일반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하지 않던가.
천하를 손에 쥘 것 같던 그도 결국은 빈손으로 가야 하는 길이 저승길인 것이다.
* * *
남궁세가는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북쪽 마을에 있는 객잔을 거처로 삼았다.
장천운은 그들과 간략하게 인사만 나누었다.
어차피 길게 이야기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남궁세가 역시 사상자가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일단 수습이 끝나면 세가로 돌아갈 거네.”
남궁력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한쪽을 맡는 거라면 문제될 것도 없이 깨끗하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본 청산궁 본진은 기가 질릴 정도로 강했다.
특히 운가휘는 남궁세가의 고수 셋이 합공했음에도 역부족이었다. 아마 나중에 나타난 모용문태와 고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목숨조차 위험해졌을 것이다.
“우릴 도와주신 그분들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갈지도 모르겠네. 어떤 분들인지나 알려주게. 나중에라도 인사를 드릴까 하네.”
“북천도왕 모용문태 대협과 고완 대협입니다.”
“…….”
남궁력은 물론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남궁세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천……도왕?”
“천외를 상대하기 위해서 잠시 본 성에 머물고 계십니다. 성에 들어가서 만나 뵈면 말씀 전하겠습니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꼭 전해주게나.”
장천운이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남궁호가 배웅했다.
안색이 창백하고 몸에 상처도 났지만, 표정은 밝았다.
자신을 고깝게 보던 숙부들의 놀란 모습에 속이 다 시원했다.
“장 형, 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천성에 남으면 안 될까? 아마 아버님께 말하면 승낙해주실 것 같은데…….”
“좋을 대로 하쇼.”
괜찮은 무사 하나 생기는데 왜 마다할 건가. 더구나 남궁세가까지 뒤에 엮어져 있지 않은가.
구천성은 적을 물리치고도 북망산 공동묘지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사망자만 일천오백 명이 넘었다.
남은 구천성의 무사 삼천오백여 명 중 부상자 아닌 사람을 찾기가 드물 정도였다.
더구나 임시성주인 사마경이 마기의 침습으로 쓰러진 상태.
적은 아직도 암천문이 건재했고, 청산궁 역시 청산자만 없을 뿐이었다.
거기다 무림맹과 파천회가 호시탐탐 어부지리만 노리고 있었다.
구천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상자 처리에 매달리고 있을 때, 장천운은 구천무원의 내실에서 남사명과 마주앉았다.
“어떻습니까?”
장천운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사명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이건 병이 아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저 기력을 북돋는 약 정도 쓰는 수밖에.”
장천운은 침상에 누워 있는 사마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잃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 옥색기운이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그나마 그가 한 시진에 걸쳐서 자신의 공력으로 녹령마기를 억눌렀기에 처음보다는 조금 약해진 상태였다.
‘보름 안에 그분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데…….’
단목화종을 찾지 못하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금룡장의 명안대 뿐만 아니라, 첩밀각과 비령조도 단목 노인 일행을 찾는 일에 투입된 상황. 그 정도 정보력이라면 며칠 안에 찾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불안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말고 가봐라. 당장 큰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거다.”
장천운은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성주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이른 새벽녘, 구천성 곳곳에서 수백 개의 화톳불이 타올랐다.
동이 트려면 아직 반 시진은 더 남았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 안팎을 오갔다.
아직 사상자를 다 추스르지 못한 듯했다.
그 시각, 장천운은 비령각으로 갔다. 우문각과 정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유가 그 동안 들어온 보고를 정리해서 말했다.
“장 대주가 말한 노인을 찾기 위해 비령조와 첩밀각은 물론이고, 사밀령까지 급파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적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청산궁은 금양관을 버리고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청산자가 죽은 이상 그들 역시 금룡장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아니 금룡장보다 더 안 좋았다. 금룡장은 늦게나마 구천성과 손이라도 잡았지 않은가. 그들은 구천성에 쫓길 판이었다.
“아마 세력이 몇으로 쪼개질 것입니다.”
장천운의 그 말을 듣고 우문각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강호에 제법 힘깨나 쓰는 문파가 몇 개 늘어나겠군.”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 청산궁의 중간 간부 이상은 한 문파를 세울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청산자라는 절대의 존재가 없는 이상은 크게 걱정할 것 없었다.
“문제는 암천문입니다.”
그들이 청산궁과 다른 점은 암천신마 탁무겸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천양지차였다.
“암천문도 청산자가 죽은 걸 알고 광명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대별산맥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아무래도 산맥을 타고 본거지로 돌아가려는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정유가 말했다.
우문각이 몇 마디 덧붙였다.
“암천문과 청산궁이 손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장천운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청산자가 죽었으니까요.”
그 한마디 말에 모든 이유가 들어 있었다.
청산궁 사람들은 본래 정파를 추구하고 마도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충성을 맹서한 청산자의 욕망 때문에 함께 움직였을 뿐.
그런데 청산자가 죽었으니 암천문과 같은 길을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구천성의 친구가 되지도 않겠지만.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우문각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지금 당장 암천문을 추격해서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암천문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인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구천성 역시 피해가 너무 컸다. 그리고 강호에는 구천성과 암천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요전력이 빠져나가면 파천회조차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일단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행선지만 철저히 파악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우문각도 그 일만큼은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잘하면 이번 기회에 암천문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일어서려던 장천운이 멈칫하더니 우문각을 보며 말했다.
“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탁무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장천운의 이야기를 들은 우문각은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세차게 일어났다. 눈도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뭐야? 죽은 철산이 살아있다고?”
“그렇습니다. 탁무겸은 제가 긴급으로 찾으라 한 노인과 함께 있던 사람이 구천성에서 오래 전에 행방불명된 장철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철산이 바로…… 전에 무 노인과 함께 있던 사람입니다.”
“그럴 리가…….”
우문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장철산이 살아서 나타나다니!
더구나 그 장철산이 동방 노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더더욱 의외였다.
장천운이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거짓말을 할 리 만무한 일. 우문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 있는 장철산을 왜 죽었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총사께선 혹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까?”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죽었다는 소문을 믿고?
말이 안 되었다.
일반 무사도 아니고, 성주와 총사의 친구였던 사람이다. 대 구천성의 중요조직을 맡고 있던 사람.
그런 사람을 일 년 나타나지 않았다고 죽은 사람 처리하다니.
“나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네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우문각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장천운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실인 듯했다.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전대 성주님께서도 장철산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거라 보십니까?”
우문각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알고 계셨다면, 왜 숨긴단 말이냐?”
“사람들에게 숨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
우문각은 허탈감마저 들었다.
사실이라면, 결국 자신을 못 믿었다는 말 아닌가 말이다.
‘어쩌면…….’
사마경의 말처럼, 정말로 자신이 청산궁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놔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장천운이 다시 물었다.
“장철산이란 분의 부인을 찾아보신 적 있습니까?”
“물론이다. 그래서 병에 걸려 사망한 사실도 알아냈지.”
“장철산이란 분에 대한 진실도 거짓이 되었는데, 그것 역시 거짓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역병에 걸려서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 미설…… 제수씨 시신을 거둔 사람을 직접 만나봤거든.”
우문각이 만나서 조사해봤다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단순하게 질문 몇 마디 던져서 알아본 것이 아닐 테니까.
“그랬군요.”
“그런데 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이 있었다고요?”
가슴에서 찡한 전율이 일었다.
“그래. 제수씨가 구천성을 떠나간 후 낳았나 보더라. 당시에 백일이 조금 넘었다고 했는데, 사망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역병의 전염력이 워낙 강해서 아기도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
“안타까운 일이군요.”
가슴이 먹먹해졌다.
결국 부인도 죽고 자식도 죽다니.
그래서 찡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나 역시 그녀와 아이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사흘 간 술만 마셨지…….”
옛 기억을 떠올린 우문각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장천운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구멍 깊은 곳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것처럼 찜찜한 점이 없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싸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일을 밝히는 것보다 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우문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왜? 왜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한 거냐, 철산.’
* * *
장천운이 흑월대를 집합시킨 것은 해가 뜬 이후였다.
흑월대원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그의 눈초리가 잘게 떨렸다.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명후, 이한, 이공진, 유각, 탁도광, 임주상, 막소광, 문등천, 홍산산, 마공추, 진명산…….
죽은 사람도 있었고, 막소광이나 문등천, 유각처럼 중상을 입어서 다시는 무공을 펼치기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유진생 역시 부상이 심해서 의당에 처박혀 있었다.
장천운은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한명후와 이한의 빈자리를 보고 가슴이 아렸다.
‘보고 싶을 거야.’
흑월대원들도 그의 슬픈 마음이 전염되었는지 눈가가 시큰해졌다.
‘악귀 같은 대주가 마음은 아이처럼 순진하다니까.’
‘이래서 내가 대주를 미워할 수 없어.’
마침내 하나하나 흑월대원들을 눈에 담은 장천운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해 보이는지 흑월대원 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고개를 내린 장천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내가 자만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친구였던 대원들이 아직도 이 자리에 있었을 텐데…….”
끝내 두어 명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장천운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거요. 그리고 우리 흑월대원들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할 거요. 일단 내일 아침부터…….”
왠지 결연한 마음이 느껴지는 목소리.
흑월대원들의 표정에 서서히 불안감이 감돌았다.
‘설마……?’
눈물을 흘리던 사람도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며 장천우의 입을 뚫어지게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