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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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18화
218화
유원당은 쓴웃음을 매단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계획이 성공한 것은 잘된 일이기 하오만, 그 정도 일로 총군사가 우리 모두를 속이고 마도의 인물인 마제와 협상한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외다.”
무림맹 사람 몇과 선우명을 비롯한 삼성궁의 장로 서너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유원당은 그들의 뜻을 알고도 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북궁천이 호연도광의 족쇄에서 풀려났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할 만큼 한 셈이었다.
이제는 힘을 합쳐서 천사교를 공격하는 일만 남았다.
금천장이 코앞인 상황.
이제는 자신이 아니어도 충분했다.
“그 일의 책임을 지고 제가 총군사의 직을 내려놓겠습니다.”
“뭐, 꼭 그러라는 것은 아닌데…….”
청원도장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바라는 대로 되어서 만족한 눈치였다.
선우명 역시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고.
유원당을 끌어내리는 일을 주도한 청원도장은 영허진인을 바라보았다.
“사숙, 제갈 시주라면 충분히 총군사를 할 재목이라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용히 있던 영허진인이 청원도장을 지그시 바라보며 탄식하듯이 말했다.
“노도는 왜 무림맹이 지난날 천사지난을 겪어야 했는지 오늘에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예?”
“당시의 장로들도 사질이나 다름없었지. 마음이 썩은 사람들이 장로를 맡고 있었으니 어찌 천사종 같은 자에게 농락당하지 않겠느냐?”
“사, 사숙…….”
청원도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러나 그 말속에 들어 있는 뜻은 천둥보다 더 맹렬했다.
영허진인은 그를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합장한 채 천천히 유원당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무량수불. 용서해 주시게, 총군사. 다 이 사숙이라는 늙은 말코가 잘못 가르친 탓이네.”
당황한 유원당이 급히 손을 뻗어서 몸을 세웠다.
“진인,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한 일입니다. 저는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를 악다문 제갈상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총군사! 저는 총군사를 반 푼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만두신다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제갈상이다.
유원당에게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제갈세가의 기재.
그런 그가 왜 유원당 앞에 무릎을 꿇고 격정에 찬 목소리로 간청한단 말인가?
갑작스런 상황에 군웅들 모두 석상처럼 굳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공손후가 냉랭한 눈빛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파의 승리를 위해 지금 당장 목숨을 내놓을 자신이 있으신 분들만 총군사를 질책하십시오!”
진왕리가 눈을 퉁방울처럼 크게 뜨고 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소성주?”
“숙부, 원래 총군사와 임 대협께선 가짜 머리로 호연도광을 속이려 하셨던 게 아닙니다.”
“응? 그럼 금천장에 걸린 머리는 뭐지?”
주위가 고요해졌다.
군웅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공손후를 바라보았다.
유원당은 무안한 표정으로 공손후를 말리려 했다.
“소성주…….”
그런데 거꾸로 공손후가 손을 들어서 유원당의 입을 막았다.
“막지 마십시오, 총군사. 지금 말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두 눈에서 한광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진짜로 자신들의 머리를 내놓겠다며 북궁 궁주를 찾아갔습니다. 천사교를 물리치려면 북궁 궁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머리를 줄 테니 호연도광과 협상해서 아기를 되찾아라.”
공손후는 잠깐 말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무 위의 새들도 궁금한지 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숨을 들이쉰 공손후의 힘이 담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심장이 멈출 정도로 놀란 저와 제갈 형은 두 분을 말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너무나 편안한 표정을 보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북궁 궁주가 묘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금천장에는 가짜 머리가 내걸렸고, 두 분은 목숨을 부지한 채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묘책을 내놓지 못했다면…… 지금 금천장에는 앞에 계신 두 분의 머리가 내걸렸을 겁니다. 아마 웃는 얼굴이었겠지요.”
그제야 전말을 알게 된 군웅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유원당과 임강령을 바라보았다.
정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사람들은 많다.
자신들도 그러한 각오로 참여했으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 해도 명령이 떨어지면 뛰어들 사람 역시 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과 자진해서 칼 앞에 목을 내민다는 것은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많은 것이 다르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진왕리가 유원당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격동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총군사!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이 진 모에게 술 한잔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구려!”
* * *
“뭐야?”
숙야돈은 눈을 치켜뜨며 벌떡 일어났다.
상주의 삼대세력에서 차출한 무사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더니 어느새 대부분 이탈했다는 보고였다.
남은 자들은 철수 명령을 미처 듣지 못했거나 천사교에 들어가기로 작정한 자들뿐.
무위가 약해서 큰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이지만 빠져나간 자들의 숫자가 사오백이나 되었다.
당장 외곽 경비를 걱정해야 할 판.
분노한 숙야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놈들이 감히!”
“아무래도 마제가 뒤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고구선의 말에 숙야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고수들을 파견해서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제가 그들을 움직였다면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말인즉 마제가 상주에 있다는 뜻. 뜨거운 맛을 보여 주기는커녕 뜨거운 물을 뒤집어쓸 게 뻔했다.
“끄응, 끝내 그놈이 말썽이군.”
북혈회가 북궁천 손에 들어간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서마련과 남패령까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문득 자신이 얼마 전 북궁천에게 내린 명령이 떠올랐다.
그가 마제인 줄도 모르고 서마련과 남패령을 맡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 서마련과 남패령을 손아귀에 넣은 것 같다.
“빌어먹을! 힘만 센 멧돼지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런 여우 짓을 할 줄이야!”
그것도 보통 여우가 아니다.
숙야돈은 이를 으드득 갈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언제 유원당과 임강령의 머리가 가짜라는 게 알려질지 몰랐다.
화를 피하려면 전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바삐 움직여야 했다.
교주가 자신에게 죄를 물을 정신조차 없을 정도로.
정파연합을 혼이 빠질 정도로 몰아붙이면서.
‘흥! 유원당, 네놈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네놈에게 뒤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느니라!’
전쟁은 어느 한쪽의 목이 떨어질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인 법!
‘문제는 마제야. 그 새끼가 돌아가지 않고 빚을 갚겠다고 날뛰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북궁천이 상주에 남은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고 불안했다.
하지만 북궁천이 싸움에 뛰어든다면 오히려 뒤통수를 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죽일 놈! 내가 순순히 당할 줄 알고?’
일각 후.
뒷문을 통해 금천장을 빠져나온 법당주 과종위는 백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우회해서 여명산으로 향했다.
그 외에도 또 다른 법당주 하나가 적을 혼란시키는 일에 투입되었다.
철저히 천사교도로만 이루어진 이백여 명.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독암기를 나누어 갖고서 결사의 마음으로 금천장을 나섰다.
숙야돈이 그들을 보낸 것은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천사교도들이기 때문이었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목이 떨어질 때까지 후퇴를 모르는 자들.
그런데 그는 그들을 보내면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후퇴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
천사의 세상을 위하여!
8장.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여명산 기슭은 넓었다.
이천여 명을 품었는데도 기껏해야 발 위에 파리가 올라탄 듯했다.
정파연합 무사들은 최대한 편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좋은 지형을 골라 자리 잡았다.
유원당은 적의 공격을 우려해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지는 것을 금했지만, 사람 중에는 그런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등경 역시 그랬다.
그는 몇 번의 싸움을 하면서 불만이 쌓였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산서에서 이름을 날린 그였다. 철군성의 사위로서 뿐만이 아니라 실력으로도.
산서의 무사라면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기에 그는 중원으로 오면서 꿈에 부풀었었다.
중원에 철무검 등경의 이름을 알리리라!
천하의 많은 무사들이 자신을 우러르게 만들고 말리라!
그런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중원에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고수들이 훨씬 많았다.
자신은 특출 나지도 않았고, 수많은 고수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잘해야 오십 명 안에 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
그러다 보니 진짜 고수들 사이에 매몰되어서 얼굴도 못 내미는 신세가 되었다.
짜증나게도 그게 현재의 자신이었다.
‘내가, 이 철무검 등경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자괴감이 들 정도.
마음이 씁쓸해진 그는 자신을 따르는 금사령 무사 이십여 명과 함께 본진으로부터 삼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총군사는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했지만, 그곳에는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떨어졌다고 해 봐야 기껏 삼십여 장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그런 마음에 외곽을 감시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눌러 앉았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않았을 텐데…… 괜히 따라왔어.’
그는 깍지 낀 손을 뒷머리에 대고 뒤로 드러누웠다.
그런데 머리를 뒤로 젖힌 덕분에 자신의 뒤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벌떡 일어난 그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조심해! 습격이다!”
등경이 소리침과 동시.
피비비비빙!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금사령 무사들을 향해서 암기가 우박처럼 날아왔다.
수백 개의 암기는 앉아서 쉬고 있던 금사령 무사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날아들었다.
무사들이 다급히 몸을 피했지만 날아든 암기가 워낙 많았다.
“크윽!”
“억!”
“윽. 이런, 제기랄!”
대여섯 명이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몸 여기저기에 맞았다.
급소는 대부분 피했지만, 문제는 암기에 독이 묻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금사령 무사들은 급히 무기를 빼 들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곧 개울 건너편 숲 속에서 흑의인 이십여 명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금사령 무사들을 공격했다.
“어림없다!”
등경이 이를 갈면서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철군성 무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달려왔다.
철군성 무사 중 백여 명이 움직이자, 다른 자들은 바로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고 일단 지켜보았다.
적의 숫자는 이십여 명. 그 정도 숫자는 철군성 무사들만으로도 충분할 듯했다.
그런데 철군성 무사들이 막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 도착했을 때, 흑의인들이 또 쏟아져 나왔다.
또 한 차례 쏟아진 암기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