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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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10화
210화
당황한 삼성궁 무사들은 앞다투어 뒤로 물러섰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서로 부딪치고 뒤엉켜서 넘어질 지경이었다.
그 위로 화살과 암기가 계속 쏟아졌다.
위효릉의 머리 위로도.
퍽!
휘청거린 위효릉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비스듬히 몸을 관통한 화살 하나가 깃만 보였다.
“이, 이게 아닌데…….”
* * *
삼성궁의 공격 실패 소식은 곧 유원당에게도 알려졌다.
그로부터 이각 후.
각 세력의 수뇌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천사교도 백여 명을 죽였지만 삼성궁은 무사 이백 이상을 잃었다.
독에 중독되거나 죽은 사람 중에는 간부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고, 군사인 위효릉도 사망자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회의 분위기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소! 잘잘못에 대해서 분명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오, 총군사!”
관호명이 노성을 내질렀다.
삼성궁의 공격 실패는 단순히 삼성궁의 피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정파연합 전체에 피해를 준 셈이었다.
“노부 역시 같은 생각이오. 이 중요한 시기에 어찌 총군사의 명령을 어긴단 말이오?”
평소 입이 무거운 백학일선 여무경도 관호명의 의견에 찬성했다.
뒤이어서 철군성과 백검맹에서도 책임자에 대한 처벌 의견이 분분했다.
유원당은 착잡한 표정으로 영허진인을 바라보았다.
“진인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무량수불.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전체의 약속을 깨고 총군사의 명령을 어긴 것은 분명 큰 잘못이네. 그에 대해서 확실히 매듭을 짓지 않는다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네.
그러나 그 일을 주도한 위 시주가 사망했으니 그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앞으로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옳다고 보네.“
“혹여 생각하신 거라도 있으면 마저 말씀을 내려주시지요.”
“빈도의 생각으로는, 총군사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삼로의 책임자로 새롭게 임명하는 게 우선으로 보이는구먼.”
영허진인의 말이 끝나자, 유원당의 눈이 천군호에게로 향했다.
구양은은 보이지 않았는데, 그는 독이 묻은 암기에 맞은 다리가 퉁퉁 부어서 걷기도 힘든 판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해 보시지요, 가주?”
천군호는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입이 열 개인들 어찌 할 말이 있을 수 있겠소. 총군사의 의견에 따르겠소.”
유원당은 눈빛을 빛내며 수뇌부를 둘러보았다.
부드럽게만 보였던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만인을 누르는 위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을 최대한 존중해 드렸습니다. 그래도 될 거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철저히 총군사로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명령을 어긴 분은 어느 누구든, 정파 모든 무사들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을 겁니다.”
모두들 급변한 유원당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마음을 하나로 뭉치지 않으면 천사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점 잊지 마시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적과 싸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유원당의 눈이 삼성궁 간부들을 둘러보다 한 사람에게서 멈췄다.
“삼로는 천기룡 공자가 맡아 주시오.”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원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천 공자는 삼신가 가주들의 합의를 거쳐 차대 삼성궁주로 내정되었다 들었소. 충분히 지휘할 자격이 있소. 또한 그 총명함과 정대함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으니 능력 또한 모자라지 않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자랄 게 없었다.
특히 천군호는 유원당의 결정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원당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천기룡이 차대 궁주가 되는 데 방해가 될 걸림돌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유원당에 대해서 은근히 못 미더운 감정을 지녔던 그는 이제 유원당이 고맙기만 했다.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못 봤군.’
그는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유원당의 계산에 들어 있었다는 걸.
천기룡은 갑자기 자신이 책임자로 거론되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무거운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아버님이나 다른 장로분들이 맡는 게 어떨지요?”
유원당이 천기룡을 직시했다.
“천 공자,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했소. 지금 고개를 끄덕인 많은 분들은 천 공자를 믿고 있소. 천 공자는 그런 마음조차 아꼈다가 적과 싸우는 데 쓰도록 하시오.”
천기룡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총군사! 모자란 역량이나마 모조리 쏟아부어서 적과 싸우겠습니다!”
* * *
세상이 잠들어 있는 축시 무렵.
금천장의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삼백여 무사가 들어섰다.
호연도광이 직접 금화전에 나가서 밤에 온 손님을 맞이했다.
“허허허허, 오시느라 수고하셨네, 나 문주.”
핏빛 붉은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그의 앞까지 걸어오더니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하하하하, 오랜만입니다, 교주.”
장대한 체구, 넓은 어깨, 각진 얼굴. 약간 역팔자를 그리며 치켜 올라간 눈매.
그가 바로 혈문의 문주, 혈왕 나종백이었다.
“삼백을 데리고 왔습니다. 최고의 정예를 데리고 왔으니 숫자가 너무 적다고 타박하진 마십시오.”
“문주가 직접 왔거늘, 내 어찌 타박한단 말인가? 이렇게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울 뿐이네.”
“마종보에서도 오기로 했다 들었습니다만, 저희보다 늦나 보군요.”
“아침쯤 되면 도착할 거네.”
“보주도 오신다고 합니까?”
“글쎄, 일단 도착해 봐야 알 것 같네. 자, 내실로 들어가세. 간단히 주과를 차리라 했으니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 * *
고요한 여명산 산정(山頂).
북궁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싸움 전체를 지켜본 터였다.
삼성궁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천사교도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피해가 적었다. 사상자들이 대부분 천사교의 제사군인 야랑군무사들인 것이다.
반면 삼성궁은 정예무사들. 게다가 간부도 상당수 당했다. 대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정도 피해는 전체적인 싸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파연합은 충천했던 사기가 싸늘히 식었고, 천사교는 거꾸로 사기가 충천했다. 분위기가 역전된 것이다.
‘대승 소식이 전해지면 숙야돈도 한껏 고무되겠지.’
문제는 호연도광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계획에 큰 영향을 미칠 터.
북궁천은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여명산 산정에서 처음으로 하늘에게 빌었다.
‘천신이여! 진아를 저에게 돌려주소서!’
그리고 겁도 주었다.
‘만약 진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판단은 알아서 하쇼.
산을 내려온 북궁천은 금천장으로 향했다.
장추람 등에게는 몇 가지 명령을 내려서 벽성장으로 보내고 혼자서 호연도광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인시(寅時) 말, 뿌연 새벽 어스름이 밀려들 즈음 금천장에 도착했다.
북궁천이 정문으로 다가가자 정문위사들이 짜증 난 표정을 지으며 막아섰다.
분위기는 제법 그럴듯한데 나이도 젊고 행색도 평범했다. 덩치가 남들보다 큰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멈춰라! 이 새벽에 웬일로 찾아온 거냐?”
“제길, 왜 하필이면 교대 시간에 찾아오고 그래? 안 그래도 분위기가 엿 같아서 쉬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그때 교대하기 위해서 눈을 비비며 나오던 조팽이 북궁천을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달려왔다.
“헉! 물러서!”
북궁천 앞으로 달려온 그는 목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교주를 만나러.”
대답은 전날과 같았다. 그러나 조팽은 그때처럼 비웃지 못했다.
대신 전 조의 위사들이 비웃었다.
“웃기는 자군.”
“교주님이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아나?”
조팽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는 전 조의 위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북궁천의 정체를 바로 말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전 조의 위사들을 쓱 노려보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마제님을 교주님께 안내해 드리고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렸다 교대해.”
비웃던 전 조의 위사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얼굴은 석고상처럼 하얘졌고.
‘으헉!’
‘마, 마제?’
호연도광은 이른 새벽임에도 잠을 자지 않고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받았다.
숙야돈으로부터 여명산의 싸움에 대한 보고를 받은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혈문의 무사들이 도착했고, 첫 번째 싸움이 승리로 장식되었다.
모든 일이 생각대로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이어 기분 좋은 소식을 듣는군.”
“여우 같은 유원당이 워낙 조심스러워서 삼성궁 외의 다른 놈들은 모두 전진을 멈췄습니다.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아침이 되면 좀 더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밖에서 호위무사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주시여, 마제가 찾아왔사옵니다.”
호연도광이 슬쩍 눈을 들었다.
“마제가 이 시간에?”
숙야돈도 의외라 생각했는지 곤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호연도광은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야 아기와 관련된 일이겠지. 안으로 들여라!”
곧 문이 열리고 북궁천이 안으로 들어섰다.
호연도광은 북궁천이 삼 장 앞에 멈춰 서자 미소를 띤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일찍 웬일인가? 빈손인 걸 보니 본좌의 요구 조건을 모두 완수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북궁천은 호연도광을 직시한 채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정파연합이 총공세를 진행하는 터라 영허진인을 죽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에서 그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허허허, 마제가 그런 소리를 하니 어울리지 않는군.”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목령검군과 공려대사를 비롯한 고수들이 그를 항상 둘러싸고 있거든. 해서 다시 부탁을 하러 왔다.”
“흐음, 본좌가 죽이라는 영허진인을 놔두고 와서 부탁이라…….”
비꼬듯 느물거리는 호연도광의 말투에 북궁천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사실 삼성궁이 당할 때 내가 몰래 나서서 막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영허진인을 제거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일로 대신하는 셈 치자는 마음이었지.”
호연도광이 하얗게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그래? 그것은 잘한 일이군.”
“저들이 총공세를 시작한 만큼 지금은 유원당과 임강령만 죽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군. 합의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들을 죽이겠어.”
“흐음, 유원당과 임강령만 죽이는 걸로 아기를 내달라?”
“맞아. 사실 그 일도 쉬운 일은 아니야. 유원당은 저번 일로 인해서 고수로 형성된 호위무사들에게 철저히 둘러싸여 있으니까. 그를 제거하는 게 늦어지면 천사교도 그만큼 피해가 커질 텐데, 결정을 내려 줬으며 좋겠어.”
호연도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무슨 마음인지 숙야돈에게 물었다.
“숙야돈, 네 생각은 어떠냐?”
흠칫한 숙야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북궁천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그였다. 북궁천이 더 많은 사람을 죽여 주길 바랐지만 바로 반대하지도 못했다.
그가 초조하게 망설이고 있을 때, 전음이 숙야돈의 고막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