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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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09화
209화
천군호는 왠지 찜찜했다. 그러나 위효릉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 없기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사교는 영서의 패배로 기둥 하나가 뽑힌 상황. 그들의 전력이 복구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었다.
“총군사에게 사람을 보내서 강력히 건의해 보는 게 좋겠소.”
천군호가 그리 말하자 위효릉의 눈매가 보일 듯 말 듯 떨렸다.
그가 원하는 것은 건의가 아니었다.
“가주, 유원당은 저의 병법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총군사의 허락도 없이 공격할 수는 없지 않소?”
“비록 총군사가 총지휘를 하긴 하지만 급할 때는 사 로의 지휘자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공격이 성공해서 천사교의 방어망에 구멍이 뚫리면 유원당도 자신이 너무 소심했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천군호는 둘러선 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소?”
선우명이 먼저 찬성했다.
“위 각주의 말이 맞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일일이 유원당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오. 적의 칼이 목으로 다가와도 명령을 받고 피할 수는 없지 않소?”
임시로 검신가를 이끄는 장로 구양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나섰다.
“적을 코앞에 두고 멈춰 서다니. 강호의 동도들이 알면 하품할 일이네. 더구나 궁주께서 돌아가시면서 본 궁의 명예가 땅에 처박힌 상태네. 놈들을 쳐서 궁도들의 쌓인 분노도 분출하고, 무너진 본 궁의 명예도 되찾도록 하세.”
검신가와 신도가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천군호도 위효릉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특히 구양은의 마지막 말이 결정적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아들인 천기룡이 명예가 땅에 떨어진 삼성궁이 아니라, 예전처럼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삼성궁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좋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우리의 공격이 성공한다면 총군사가 뭐라 하겠소?”
그때 구석진 곳에 있던 천광호가 눈을 치켜뜨고 한마디 했다.
“지미,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총군사가 내린 명령을 어기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구양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어허!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가주가 결정 내린 일에 왈가왈부하다니. 자네가 뭘 안다고!”
“제가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이것만은 압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엉덩이에 털이 나는 법이죠! 혹시 장로 엉덩이에 털이 난 것 아뇨?”
“뭐야?”
구양은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위효릉이 그를 말렸다.
“그만 참으시지요, 장로. 천 당주, 가주와 장로님이 어련히 알아서 그런 결정을 내렸겠나? 너무 걱정 말게.”
천광호가 천군호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가주 형님, 정말 따로 움직이시는 게 옳다고 보십니까?”
“너무 걱정 마라. 우리 앞에 있는 적은 숫자가 우리 반도 안 된다고 하지 않더냐? 더구나 고수의 숫자에서도 우리가 딸리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냐?”
천광호는 천군호가 굽힐 뜻을 보이지 않자 홱 몸을 돌렸다. 가주와 싸울 수는 없는 일. 더 이상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도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쇼! 대신 일이 잘못되면 애꿎은 무사들 탓은 절대로 하지 마쇼!”
한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기룡도 침중한 마음이었다.
‘이건 아니야. 모두들 욕심이 앞서 있어.’
* * *
북궁천은 일행과 함께 삼로와 사로 사이 뒤쪽 야산 위에 서서 전면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높은 지대. 달빛마저 밝아서 밤인데도 삼로와 사로의 무사들이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삼성궁의 움직임이 눈에 거슬렸다.
“삼성궁의 움직임이 이상하군.”
냉호가 고개를 돌려서 의아한 듯 반문했다.
“삼성궁이요?”
“철군성이나 백검맹 쪽은 속도를 많이 늦춰서 거의 멈추다시피 한 상태인데, 삼성궁은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다시 높이고 있다.”
“설마……?”
“아무래도 설마가 맞는 것 같다. 쫓아가 보자.”
삼성궁 무사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두가 길게 뻗은 여명산 산줄기의 외곽으로 진입했다.
보고된 대로라면 적이 형성한 방어벽이 코앞이었다.
삼성궁 무사는 모두 육백여 명.
적은 삼백여 명 정도.
숫자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리적 이점이라는 것도 상대의 존재를 파악한 이상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위효릉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시간을 끌지 말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적을 무너뜨려야 하오. 검신가가 중앙을 칠 테니 신도가와 비룡가가 좌우를 맡아 주시오. 놈들이 야비한 술수를 쓸지 모르니 직접적으로 맞붙기 전까지는 조심하도록 하시오. 자, 갑시다!”
앞쪽에 있는 무사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무사들이 무기를 빼 들었다.
무기를 빼 드는 소리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곧 육백여 무사들이 적진을 향해 쇄도했다.
북궁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삼성궁 무사들이 쇄도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주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냉호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우영산장의 패배로 약해진 것 같아도 쉽게 무너질 천사교가 아니다. 적은 숫자로 방어벽을 형성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과욕을 부리면 거꾸로 당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삼성궁이 피해를 입으면 자신과 유원당의 계획에 차질이 온다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삼성궁의 피해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삼성궁을 돕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북궁천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결정을 내렸다.
“그냥 놔두자.”
“그러다 삼성궁이 당하면 계획이 틀어질지 모르잖습니까?”
“유 원주는 천사교가 다급해져야 호연도광이 내 의견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고 했지. 하지만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천사교가 유리해져서 자신감이 생기면 호연도광이 더 편한 마음으로 내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어. 그의 마음이 편해지면 그만큼 진아에 대한 위협도 줄어들 거고.”
독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판단.
북궁천의 말을 들은 장추람 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가 이기든 천사교가 이기든 승패는 저들의 문제였다. 자신들은 진아를 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삼성궁이라면 안타까워할 일도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유원당과 임강령의 마음이다.
흔쾌히 목숨을 건네주겠다는 두 사람의 진정을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북궁천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로선 조금이라도 나은 길을 택하는 수밖에…….
* * *
“삼로가 멈추지 않고 계속 진격하고 있다 합니다, 총군사! 곧바로 고개를 넘을 모양입니다.”
천종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와 보고했다.
유원당은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적의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소?”
“특별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럼 지원할 생각이 없나 보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다행? 과연 그럴까?
유원당은 적을 가볍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적도 자신들이 전력에서 밀린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지원이 없다는 것은 그만한 대책이 서 있다는 뜻.
결국 삼성궁은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쯤은 고갯길에 도착했을 테니 지원하기에 이미 늦은 상황.
이를 지그시 다문 유원당의 눈빛이 깊어졌다.
‘일사불란한 명령 체계가 잡히지 않으면 아주 힘든 싸움이 될 거다. 피해가 크겠지만 힘을 하나로 뭉칠 수만 있다면 손해는 아니야.’
최소한의 피해로 마무리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위효릉은 시력을 집중해서 고갯길 입구를 살펴보았다.
고갯길 초입에 천사교도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숫자는 백여 명.
잠은각 대원이 보고한 대로라면 중턱과 정상 근처에 나머지 이백여 명이 머물고 있다고 했다.
‘저딴 놈들에게 겁을 먹고 멈추다니.’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을 시작하시오.”
공격 명령이 좌우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곧 삼성궁 무사들이 고갯길 입구를 향해 밀물처럼 밀려갔다.
천사교도들은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듯 허둥지둥 일어나서 대항했다.
“적이다!”
“놈들을 막아라!”
“목숨을 걸고 막아!”
그러나 숫자와 실력에서 워낙 큰 차이가 났다.
순식간에 삼사십 명이 쓰러지자, 천사교의 간부로 보이는 자들이 뒤로 물러나며 악을 썼다.
“일단 후퇴해라!”
“중턱까지 물러나라!”
사기가 충천한 삼성궁 무사들은 도주하는 천사교도들을 바짝 추적했다.
중턱까지 삼백여 장을 가는 동안 천사교도 십여 명이 더 쓰러졌다. 그래도 그들이 목숨을 걸고 막은 덕에 나머지 반 정도는 중턱까지 도망갈 수 있었다.
중턱에 머물고 있던 천사교도들은 동료들이 도주해 오자 무기를 빼 든 채 고갯길을 틀어막았다.
양쪽은 경사가 심한 바위벽이어서 길만 틀어막으면 올라오는 자들이 전진하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었다.
삼성궁 무사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공격했다.
천사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막았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사교도들이 물러서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삼성궁 무사들은 이미 승리를 거머쥐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천사교도들이 이십여 장을 물러서고, 삼성궁 무사 중 반 정도가 바위벽 사이의 고갯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쉬쉬쉬쉬쉭!
쒜에엑!
어둠 속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악을 쓰는 소리와 함께 삼성궁 무사들이 허공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따다다당!
퍼버벅!
“크윽!”
“으헉!”
“놈들이 화살을 쏜다!”
“암기다! 조심해!”
“일단 물러서!”
악다구니와 비명이 이어지면서 한순간에 수십 명이 화살과 암기에 당했다.
삼성궁 측에서 고수 백여 명이 메뚜기 떼처럼 뛰어오르며 양쪽 바위벽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숨어서 화살을 쏘고 암기를 던지는 천사교도들도 약하지 않았다.
공력이 실린 암기는 끊임없이 날아들었고, 겨우 위에 올라가도 천사교도의 집중 공격을 상대해야 했다.
뛰어올랐던 무사들 중 많은 수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낙엽처럼 떨어졌다.
뒤쪽에 처져 있던 삼성궁의 수뇌부들이 악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방어하면서 뒤로 물러서라!”
“이 죽일 놈들! 모조리 산짐승 밥으로 만들어 주마!”
그 와중에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으윽, 도, 독이다! 놈들의 암기에 독이 발라져 있다!”
사오십 명이 화살과 암기에 맞아 쓰러졌다. 상당히 큰 피해를 보긴 했어도 그 정도 피해가 끝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화살과 암기에 독이 묻어 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치듯 맞았든지, 아니면 몸에 박혔어도 중요하지 않은 부위에 맞은 사람들이 백여 명에 달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암기와 화살은 계속 날아들었고.
독이라는 말에 삼성궁 무사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제는 스치기만 해도 위험했다.
충천했던 사기는 싸늘히 식고, 공포가 무사들의 정신을 짓눌렀다.
“모두 물러서라! 뒤로 물러서!”
위효릉이 미친 듯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