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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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화
이무환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에… 그런데 말이죠, 다른 분들은 함께 가도 좋은데, 한 분은 안 되겠군요.”
그의 갑작스런 말에 황산검문 제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무환이 그들을 향해 심각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유 소저는 급히 항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눈을 크게 뜨는 공은효를 향해 이무환이 말했다.
“지금 막 위사가 크게 다쳤거든요. 그 사람이 유 소저에게 할 말이 있다지 뭐요.”
“그게 정말인가요?”
유소경이 다급히 물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고개를 숙였다.
“빨리 가보쇼. 죽으면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할 거요.”
유소경도 가보고 싶었다.
그 바보 같은 사람이 크게 다쳤단다. 가서 한 소리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뭘 보여주겠냐고.
하지만 혼자 온 것이 아니다. 하기에 가고 싶어도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담환이 이무환의 뜻을 알고 유소경을 재촉했다.
“이 공자 말대로 너는 항주에 가보도록 해라.”
유소경은 입술을 깨물고 담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돼요, 사형?”
담환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소경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왜 가는지 알면서도 담담히 떠나보내는 담환이 야속했다.
이제 가면 모든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가슴에 담고 있던 사람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담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떠날게요.”
유소경이 떠나자, 남궁산산이 옆구리를 쿡 찌르고 찡긋 웃었다. 잘했다는 듯.
반면에 순우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눈빛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진 이무환은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일행을 모두 넷으로 나누었다. 중심을 칠 열세 명만 빼고.
일대는 천태도장이, 이대는 백혜대사가, 삼대는 제갈도가, 사대는 화산의 청원자가 맡기로 했다.
본래 일대는 사마강에게 맡기고 천태도장은 중심부를 칠 고수들과 합류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마강이 서로의 임무를 바꿔서 맡겠다고 했다.
이무환은 흔쾌히 승낙했다. 하긴 미친 듯이 적진을 누벼야 할 터. 나이 든 천태도장보다, 무공은 떨어져도 사마강이 나을지 몰랐다.
그렇게 사대로 나누어진 무사들은 오 리의 간격을 둔 채 소주로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청명하고 바람도 선선했다. 먹을 것 싸 들고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이런 날은 비룡도에서 고기나 잡아 구워먹으면 딱인데……. 쩝.’
3
이무환 일행의 행적이 위지가에 알려진 것은 그날 유시 무렵이었다.
탐호당주 위지청은 전서구가 붉은 띠를 매달고 날아들자마자, 전서통에서 빼낸 서신을 들고 즉시 위지창화에게 달려갔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되느냐?”
“모두 사백 정도라고 하는데, 넷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넷으로?”
“예, 가주. 아마 백 명씩 나누어서 접근하려는 거 같습니다.”
“너구리 같은 놈들.”
위지창화는 이를 뿌드득 갈고 옆을 바라보았다.
“아우, 어떻게 생각하는가?”
“놈들도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아마 우리를 분산시켜서 상대하려는 것 같습니다.”
“흥! 쉽게 안 될 걸?”
위지창화는 코웃음을 치고 위지창준에게 물었다.
“총단의 무사들은 언제 도착할 것 같나?”
“운하를 따라 내려온 배가 무석(无錫)을 지났다는 연락이 왔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의자의 팔걸이를 버릇처럼 주무르던 위지창화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번들거렸다.
“이백이라고 했지? 그럼 모두 팔백이군. 좋아, 어디 와봐라, 이놈들. 모조리 태호의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주마.”
6
호주에서 백이십 리 떨어진 평망(平望)에 도착할 즈음, 석양이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사람 키보다 큰 갈대숲도 금빛으로 물들어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평망은 양주 아래쪽 진강에서 항주까지 이어지는 대운하가 가로지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소주까지는 팔십여 리.
이무환은 운하의 둑을 따라 곧장 북상했다. 선두는 일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영호승이 인도했다.
어차피 자신들의 움직임이 속속들이 전해지고 있을 터. 적의 눈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달리던 이무환 일행은 소주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오강의 갈대밭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석양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사위는 이미 어둠에 휘감기고, 하늘에선 총총히 뜬 별들이 그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휘이이잉.
동쪽에서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다.
난데없는 인간들의 출현으로 입을 닫고 있던 물새들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품속에서 식사 대용으로 지급된 육포와 교자를 꺼내 먹었다.
그렇게 멈춰선지 이 각가량이 지날 무렵, 나머지 삼대의 지휘자들이 이무환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 각.
휙! 휘이익!
물새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이무환이 휘파람 들린 곳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야!”
곧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호주에서 하루 먼저 파견된 항주 흑도 방파의 사람과 천마교 마월당의 무사였다.
그들은 이무환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고는, 품에서 한 장의 둘둘 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남궁산산이 종이를 받아 들고 펴보았다.
그 사이 각 대의 지휘자와 열두 명의 고수가 다가오더니 빙 둘러앉았다.
비치는 것은 달빛과 별빛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누구도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글자를 보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적의 지원무사들이 도착했나?”
이무환의 질문에 마월당의 무사가 대답했다.
“운하를 타고 내려왔는데, 숫자가 이백 정도 될 것 같았습니다.”
“흠, 그래? 그럼 대략 칠백에서 일천 사인가?”
“팔구백이라 보시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월당의 무사는 더 이상 이무환의 질문이 이어지지 않자, 검지로 커다란 점이 찍힌 곳을 가리켰다.
“이곳이 위지가의 장원인 소천장입니다. 접근하는 길은 모두 아홉 군데. 하지만 모두 저들의 순찰조가 눈에 불을 켜고서 지키고 있습니다.”
점을 향해 아홉 줄기의 선이 뻗어 있었다.
마월당의 무사는 아홉 줄기의 선을 하나하나 찍으며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소천장은 태호 쪽의 야산 자락에 있습니다. 이곳은 자양객잔이라는 곳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 길인데……. 여기는 두 개의 수로가 겹치는 곳을 지나……. 그리고 이쪽은 삼층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고택 옆으로 난 길…….”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데 그가 고택에 대한 말을 할 때다. 영호승이 이를 악물고 눈을 반짝였다.
‘너무 오래 잊고 있어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군!’
삼층의 고택. 그곳이 바로 한때 소주제일의 가문으로 이름 높던 영호가의 장원이었던 곳이다. 지금이야 남에게 넘어가 버렸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그 장원의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월당 무사의 말이 끝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단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5장. 소천장의 혈전(血戰), 그리고 무면검마(無面劍魔)
1
달랑 열네 명이 먼저 출발했다. 본래는 열셋만 갈 생각이었는데, 영호승이 합류해 열넷이 되었다.
남궁산산은 천태도장 곁에 맡겨놓은 상태였다. 그녀라면 천태 도장과 함께 전체의 행동을 잘 조율할 수 있을 것이었다.
‘뭐, 워낙 여우라 누구에게 당하지도 않을 거야.’
단순히 머리만 뛰어난 게 아니다. 기문진도 펼칠 줄 알지, 폭령잠마단을 복용한 후 일류 수준의 무공이 절정고수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그뿐인가?
누구보다도 냉정했다. 절대 자신이 다칠 일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빠와 함께 비룡도에 가고 싶어서라도.
갈대숲을 출발한 지 한 시진. 이무환은 남궁산산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소주로 들어섰다.
그의 곁에는 영호승과 순우경만이 있었다. 나머지 열한 명은 약간씩 뒤로 처져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절대고수. 오면서 주위 백 장 이내의 인기척을 달빛 아래서 손금 보듯이 확인하며 순찰무사들의 눈을 피해 온 터였다.
위지가의 순찰무사들은 그들이 소주에 입성한 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무환은 번화한 거리를 지나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지금쯤 근처에 왔겠지?”
영호승이 나직이 대답했다.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을 겁니다.”
사백여 명의 무사는 그들과 이각의 거리를 두고 출발했다. 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였을 테니 자신들보다 빠르게 왔다고 봐야 했다.
어쩌면 운이 좋아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적에게 들켰다고 보는 게 편했다.
“와아, 소주도 멋지네. 저 배 좀 봐. 놀잇배인가? 어? 저기는 여자들도 많이 탔네?”
이무환이 환하게 웃으며 탄성을 터뜨렸다. 마치 깡촌의 촌놈이 처음으로 대도(大都)에 놀러온 것 같았다.
영호승은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독사눈에게 이무환과 어떻게 만났는지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날도 이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흑도의 건달들이 털려고 했지.’
영호승은 입꼬리만 말아 올리고 담담히 대답했다.
“예, 소주에는 저런 놀잇배가 수백 척이나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한번 타볼까?”
“지금요?”
“음…….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타지, 뭐.”
옆에 있던 순우경이 힐끔거리며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정말… 탈 생각인가요?”
“타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이무환은 대답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순우경과 말을 나눈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맞아, 그때 마월당 무사들하고 만나보라고 했을 때 말하고 안 한 거 같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순우경은 살아온 환경으로 인해 먼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 자신이라도 말을 붙여서 순우경의 얼어붙은 마음을 풀어주었어야 했는데, 이곳까지 데려와 놓고―따라왔든 어쨌든―너무 무관심한 했던 것 같았다.
‘이제부터라도 하면 되지, 뭐.’
이무환은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다.
“순우 소저도 타고 싶어요?”
“저요?”
순우경은 막상 반문을 해놓고 당황했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저걸 타고 싶은 걸까? 왜 바로 답을 못하는 거지?
“타고 싶으면 일 끝나고 타요. 물론 그때까지 다치지 않아야 하겠지만요.”
“그… 러죠.”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고도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정말 타고 싶어서 대답한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런 대답을 했지?’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가 자꾸 자신의 마음을 흔든다. 항상 얼어붙은 채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이는 듯하다.
문제는 그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후우, 나도 모르겠어…….’
“저깁니다.”
영호승이 앞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무환은 전면의 삼층 전각을 바라보았다. 전각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장원 안에 지어져 있었다.
“장원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일 년 전 그대로라면 알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호승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삼층 전각을 바라보고는 장원의 정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은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이십 장 좌측에 있었다.
영호승은 정문으로 다가가더니 문을 두드렸다.
곧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영호승은 노인과 몇 마디 나누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이무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문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순우경이 바짝 붙어 그를 따라갔다.
기분이 묘했다. 천마궁에서 나올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단둘이 걷는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과 이무환만 바라보는 것 같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귓속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상기되었다.
설마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안심할 수 없었다. 광룡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천녀소수마령공을 끌어올렸다. 적의 심장을 얼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심장박동을 줄이고, 얼굴의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아버님이 알면, 아직 멀었다며 수련동에 집어넣을지도…….’
전이었다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수련동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끼이익.
장원의 문이 열리더니 영호승이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단주.”
이무환이 차갑게 굳은 얼굴의 순우경을 향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갑시다, 순우 소저.”
“예…….”
순우경은 유난히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