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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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59화
59화
“비겼다는 말은 하지 마라. 나 아직 안 늙었다.”
겉으로 보면 비겼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운추양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심력을 모두 쏟아서 좌소천을 상대했다.
그런데 좌소천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부동심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언뜻 생각하면 그다지 마음 쓸 것도 없는 미미한 차이다. 하지만 그러한 미미한 차이가 한순간에 죽음과 직결되는 법.
운추양 정도의 고수가 그 차이를 왜 모를까.
“이름이 뭐냐?”
“무연만상이라고 합니다.”
“킁.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에 밀리다니.”
“밀리지 않았습니다.”
“네가 뭐라고 해도 밀린 건 밀린 거다.”
“그게 그리 중요한 겁니까?”
“나에겐 중요하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운추양이다.
전이었다면 승부가 날 때까지 싸웠을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미미한 차이에 도를 거둔다. 세월만큼 계단을 하나 올라섰다는 뜻.
‘그나마 다행이군. 한때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도 마뜩치 않았는데.’
그때 운추양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호승이는 나이만 먹었지 아직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무슨 말인지는 네가 알아서 생각해라.”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좌소천도 아니었다.
좌소천은 찻잔을 비우고 나직이 말했다.
“최소한 제가 먼저 손을 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좌소천이 뒤돌아서 전각을 반쯤 지나갔을 때다. 운추양이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 번 기회가 있었는데 왜 중간에 도를 틀었느냐? 정말로 내 공격을 막기 위해서 틀었느냐?”
좌소천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반쯤 돌렸다.
“물론입니다. 아니면 둘 다 부상을 입었을 테니까요.”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나왔을 것이다.
좌소천은 경상을, 운추양은 중상을 입고 선약당 신세를 져야만 했을 게 분명했다.
좌소천은 그 말만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었소. 그때 만약 내가 무진칠도를 펼쳤다면 당신은 죽었을 거요.’
좌소천이 나간 지 일각이 지나자 절룡각의 문이 열리고 혁련호승이 들어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운추양을 보고 그가 다급히 물었다.
“숙부님,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저놈이 멀쩡하게 걸어서 나가는 겁니까? 설마 그냥 보내신 겁니까?”
운추양은 왈칵 짜증이 났다.
“그냥 보내지 않았다. 소천이와 도를 겨루어봤다.”
“그런데 왜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겁니까? 저딴 놈이 조카와 함께 크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홱, 고개를 돌린 운추양이 짜증을 쏟아냈다.
“눈이 없느냐? 보이는 대로다! 내가 이기지 못했으니 걸어서 나간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도 혁련호승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서 추궁하듯이 소리쳤다.
“그걸 저더러 믿으란 소리는 아니겠지요? 혹시 저놈이 한때 제자였다고 봐주신 겁니까?”
운추양은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다. 조카만 아니라면 단번에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조카를 병신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너무 곱게 키웠어. 어릴 때부터 길을 제대로 잡아줬어야 했거늘.’
때늦은 후회였다.
혼자 큰 좌소천과 더욱더 비교가 되는 혁련호승이다.
그때 혁련호승이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진 것은 아니겠지요?”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조카다. 숙부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서 저딴 질문을 한단 말인가.
운추양은 이를 악물고 혁련호승을 쏘아보았다.
“사십 초를 겨루었는데, 소천이와… 비겼다.”
무심코 결과를 털어놓은 운추양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 와중에도 차마 졌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다.
분명 마음은 밀렸다고, 졌다고 말하고 있거늘, 입에선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크큭, 나도 저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군.’
운추양이 자괴감에 빠져 있는 사이, 혁련호승이 돌아서서 절룡각을 나갔다.
탕!
거칠게 닫힌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운추양은 눈을 부라리며 혁련호승이 나간 곳을 쳐다보았다.
그때다. 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랑 하나 있는 숙부가 저 모양이니……. 에이, 씨발, 궁내에 믿고 일을 맡길 놈이 이렇게 없을까?”
순간 운추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 저놈의 새끼를 그냥!’
2
운추양을 만나고 온 지 이틀이 지났다.
혁련호승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운추양조차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했으니 마땅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혁련호승, 마음껏 분노해라. 네 분노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중에 더 비참하게 무너질 테니까.’
좌소천은 한여름의 한 마리 모기만큼도 혁련호승의 수작질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암습, 독, 모략.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
차라리 그 걱정을 할 시간에 대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이 나았다.
이제 패천단 오대의 인원도 그럭저럭 칠십 명을 넘어선 상황. 좌소천은 조장들을 철저히 실력 위주로 뽑을 생각이었다.
하기에 평가서에 적힌 내용을 세세히 훑어보았다. 한 명 한 명 직접 만나기 전에 기본적인 것을 알아야 했다.
다음날. 좌소천은 실제로 조장의 후보자로 이십 명을 뽑은 후, 그들끼리 실력을 겨루도록 했다.
이상한 점은, 능히 조장이 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전하련이 조장 후보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자가 무슨 조장, 하며 한마디씩 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자광은 나무에 기댄 채 풀잎을 질겅거리고 있는 전하련에게 다가갔다.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 듯 눈가에 잔뜩 웃음이 묻어 있었다.
씹던 풀잎을 뱉은 전하련이 고개를 돌리자, 이자광이 목에 잔뜩 힘을 주고서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다.
“전하련, 그대는 지금부터 대주의 직속무사다.”
전하련이 눈을 힐끔거리더니 조소를 지었다.
“나더러 어린 대주 밑이나 닦아주란 말이야?”
“아니, 선두에 서서 싸울 사람이 되란 말이지.”
전하련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그건 좀 마음에 드는데…….”
“좋아, 그럼 응낙한 것으로 보고하지.”
그때 전하련이 물었다.
“근데 정말 대주가 원해서 나를 택한 거야?”
움찔한 이자광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저번에 네가 곡추렴을 작살낸 거 아시잖아?”
전하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자광을 쏘아보았다.
“얼핏 듣기로는, 내가 오조장이 되는 것을 곰탱이가 막았다고 하던 것 같던데…….”
이자광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 내가 왜 막아?”
“정말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당황해?”
“음하하! 내가 원래 목소리가 크잖아.”
전하련이 유심히 이자광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좋아, 믿어주지. 하지만 이건 알아둬.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나중에 내 추룡편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절대 아니라니까! 험, 그럼 그렇게 알고 이따가 점심 먹고 대주 방으로 와라.”
돌아선 이자광은 괜히 식은땀이 났지만 태연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대주가 그걸 털어놓지는 않겠지?’
어제저녁에 좌소천을 찾아갔다.
“대주, 할 말이 있소이다.”
“뭡니까?”
“전하련을 조장이 아닌 직속무사로 뽑았으면 좋겠소.”
“이유라도 있소?”
“그냥… 여자가 조장을 하면 아무래도 분란이 생길 것도 같고, 뭐 직속무사들 중에 여자가 하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오. 험!”
좌소천은 그냥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칠개 조의 조장이 다 정해지자, 전하련을 직속무사로 삼을 테니 점심이 끝나면 데려오라고 했다.
일의 전말은 그렇게 간단했다.
그런데 슬슬 걱정이 되었다.
전하련의 무공이야 걱정될 것이 없었다. 정작 문제는 전하련이 자신을 싫어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3
패천단 무사들 중 가장 근육이 발달한 사람 몇을 꼽으라면, 항상 나오는 이름 중 하나가 홍려운이었다.
반면에 무공이 가장 약한 사람을 꼽아도 그의 이름이 꼭 들어갔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이를 악문 홍려운은 구슬땀을 흘리며 커다란 칼을 휘둘렀다.
그는 패천단에 들어온 다음날부터 시간만 나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구석으로 가서 칼을 휘둘렀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들만 보였다.
쪽팔렸다.
하다못해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덩치도 이자광에 비하니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자존심 상하게 패천단을 나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만큼 강해지는 것!
물론 단시일 내에 강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이 모르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적은 노력으로도 강해지는 몸, 한나절을 뛰어도 쉽게 지치지 않는 심장. 그것은 그만의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사실 그의 근육은 그가 특별히 노력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수련을 했는데 그렇게 된 것일 뿐.
언젠가 사부가 말했다.
타고난 몸을 지녔으니 좀 더 열심히 한다면 빛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차라리 유명한 다른 무관에 가서 도를 제대로 익혀보라고.
그는 다른 무관으로 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한번 맺어진 인연, 사부를 어찌 바꾼단 말인가?
그리고 그동안에는 그저 남이나 다름없이 했다. 그러고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곳에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 없었다.
“하앗! 야압!”
벌써 한 시진째.
홍려운의 숨소리는 처음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마 두 시진 정도 더 해야 숨소리가 거칠어질 것이다.
홍려운은 아무도 오지 않는 이곳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칼을 휘두를 작정이었다.
좌소천이 칼을 휘두르는 홍려운을 처음 본 것은 미시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본 것이 유시쯤이었다. 거의 두 시진 만에 본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하는군.’
그런데 홍려운을 바라보던 좌소천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동작이다. 벌써 두 시진 가까이 지났는데도.
쉬어가면서 했다고 해도 저 큰 칼을 두 시진이나 휘두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홍려운의 외적인 능력만 따진다면 진즉 지쳐서 동작이 흐트러져야 옳았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길게 잡았다면 또 몰라도.
하지만 땀으로 흥건히 젖은 옷. 떨어진 땀으로 인해서 주위와 조금 달라 보이는 근처의 흙 색깔.
쉬어가면서 했다면 바닥이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정말로 두 시진 동안 계속 수련을 했다는 건가?’
좌소천은 홍려운의 수련장소가 보이는 곳의 바위에 앉아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각이 더 흘렀다.
홍려운은 그 동안 잠깐씩 멈칫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제야 좌소천은 홍려운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는 것을 알았다.
‘어이가 없군.’
공력이라도 높으면 그러려니 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홍려운의 공력은 기껏해야 이삼십 년 정도. 그 정도로는 반 시진만 칼을 휘둘러도 지치는 게 보통이다.
더구나 홍려운의 칼은 보통 칼보다 두 배 이상 큰 칼이 아닌가.
결론은 홍려운에게 남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위에서 일어난 좌소천은 홍려운이 수련하고 있는 건물 뒤쪽 구석진 곳으로 다가갔다.
벌게진 얼굴로 칼을 휘두르던 홍려운이 그제야 동작을 멈췄다.
“대주를 뵈오.”
좌소천은 약간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두 시진이 넘도록 칼을 휘두른 사람의 숨소리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원래 그렇게 오래 수련해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소?”
그러잖아도 붉어진 홍려운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예, 대주.”
“보통 오래 수련을 하면 얼마나 견딜 수 있소?”
“네 시진 정도까지는 쉬지 않고 해봤습니다만…….”
그 이상은 해보지 않았다.
식사는 해야 할 것 아닌가?
“…….”
좌소천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류에 겨우 턱걸이한 무사가 네 시진 동안 저 큰 칼을 휘두르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그 말을 믿어야 돼, 말아야 돼?
‘사실이라면 보물을 앞에 두고도 몰라봤다는 말이군.’